18.09.24 14:59최종 업데이트 18.09.24 14:59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에 찬성 또는 묵인하여 조인을 거들어준 다섯 매국노를 '을사5적'이라 한다. 을사5적은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처변삼사'를 역행한 반역자들이다.

당시 대신으로서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은 조약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일본의 강압으로 물러가고, 조약에 조인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다. 따라서 을사5적에 박제순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고종황제의 분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늑약을 막후에서 추진하고 이에 찬성 또는 묵인한 을사5적은 과연 어떤 인물들인가?
 

'을사오적'들.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 보림재 블로그

 
을사5적의 수괴 이완용(1858~1926)은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188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ㆍ응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887년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도미했다. 

귀국 후 승지ㆍ참의를 거친 후 다시 주미 공사로서 2년을 지내고 귀국하여 대사성, 학부대신 등을 거쳤다. 1896년 아관파천 때 친러파로서 외부대신이 되고, 그후 친일파로 변신,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을사늑약 체결 때 일본의 무력을 업고 고종을 협박, 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을사5적의 수괴가 되었다. 


이어 12월에는 의정대신 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하고,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 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일진회 회장 송병준 등과 함께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를 강요하여 마침내 순종에게 양위케 했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고, 그의 집은 의거민중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그 자신은 이재명의 칼을 맞고 부상했다.

1910년 8월 22일에는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寺內正毅) 통감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 나라와 겨레를 완전히 왜적에게 넘겨주었다. 그 공으로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취임, 3ㆍ1운동 때는 동포를 공갈하는 경고문을 3회나 발표하여 이듬해 후작 작위를 받는 등 죽을 때까지 매국매족으로 일관했다.

박제순(1858-1916)은 호는 평재(平齋),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883년 별시 문과에 급제, 중국 천진에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 이조참의ㆍ참판ㆍ한성부윤 등을 역임했다. 1898년 외부대신이 되고, 이듬해 전권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조인, 5적신의 한 사람으로 지탄받았다. 같은 해 한규설의 뒤를 이어 참정대신(수상)이 되고, 1909년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1910년 한일합병조약에 서명,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지용(1870-?)은 자는 경천(景川), 호는 향운, 본관은 전주다. 1887년 문과에 급제, 경상ㆍ황해 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 및 주일공사를 지내고 1904년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와 한일의정서에 조인했다. 후에 법부대신, 판동령부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찬성,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의 하나가 되었다. 한일합병이 되자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근택(1865-1919)은 본관은 전주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ㆍ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ㆍ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전복을 음모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판윤ㆍ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법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하여 5적신의 하나로 지탄받았으며, 1910년 한일합병에 협력하여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의 고문이 되었다.

권중현(1854-1934)은 호는 경농(經農), 본관은 안동이다. 1884년 부산감리 서기관에 이어 주일공사ㆍ한성부윤ㆍ참찬 등을 거쳐 법부ㆍ군부대신을 역임했다.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을사늑약에 찬성, 서명하여 을사5적의 한사람으로 오명을 남겼다. 한일합병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