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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그림자 하나가 초가집 사립문을 밀치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밤손님처럼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방문으로 다가선 그림자는 주저하지 않고 방문을 잡아당겼다. 안에서 문고리를 잠갔지만 억센 사내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림자는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아이들과 자고 있던 변진숙(가명)의 가슴팍을 때렸다.

그녀가 가슴을 쥐고 숨을 쉬려 할 때, 사내는 준비해 간 자루로 그녀를 들씌우고, 들쳐 업었다. 변진숙을 납치한 사내가 30분 정도 달려 가 도착한 곳은 충북 제천군 한수면 복평리 자신의 집이었다. 방에 들어간 그는 초롱불을 켜고, 자루를 벗겼다. 까무룩 기절을 했던 변진숙은 곧바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사내에게 무조건 빌었다.

"살려 주세요. 저에겐 아이들이 있어요."

하지만 사내로부터 돌아온 말은 돼지 멱따는 소리 뿐이었다.

"시끄러워! 잠자코 있어. 니도 혼자고, 나도 홀아비니 그냥 같이 사세."

밤새 훌쩍이는 변진숙에게 사내는 손찌검을 했다. "만약 도망치는 날에는 죽을 줄 알어"라며 무언가를 들이댔다. 초롱불에 번쩍하고 빛나는 것은 사내의 오른 손에 끼워진 쇠갈고리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상이군인(傷痍軍人) 오상사였던 것이다.

오상사는 변진숙이 살던 이웃마을 사람으로 6.25 당시 부상을 당한 제대 군인이었다. 그가 군(軍)에 있을 때, 그의 처가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았다. 휴가 나와서 이 사실을 알은 오상사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이 난 사내를 붙잡아 밤나무에 묶었다. "이 새끼 감히 내 마누라와 바람을 펴! 죽어 봐라"하며 수차례 구타를 했다. 사내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눈은 퉁퉁 붓고, 콧물과 핏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오상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내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소리에 사내의 목은 푹 꺾였다.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던 오상사의 아내도 집에서 쫓겨났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인근 마을에도 번졌고, 변진숙도 그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그 사건이 있은 지 4년 만에 오상사는 변진숙을 납치해 자신의 둘째 부인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변진숙의 수차례 탈출시도는 무의미하게 끝났다. 밤새 몰래 집으로 도망 오면 오상사는 제천군 한수면 동창리(송계리) 새터말로 찾아왔다. 변진숙의 친정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이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상사의 횡포에 마을 사람 누구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경찰도 아예 개입하지 않았다. 오상사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변진숙이 납치당한 1950년대 중반은 상이군인하면 무사통과하는 무법천지의 시대였다.

상이군인 무법천지 시대

변진숙이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몽둥이찜질이었다. 수차례의 몽둥이찜질 끝에 그녀는 이내 체념했다. 너무 울어 목이 쉰 아이들에게 "내 팔자려니 하고 그냥 살란다. 내 몸 하나 고생하면 우리 가정이 편하겠지. 그리고 집에 남자가 있으면 나무라도 해다 주고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니"하며 아이들을 달랬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새 남편이란 작자는 일체 일을 하지 않았다. 또한 집안에 돈만 생기면 놀음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의 밑천이 바닥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면 홧김에 술을 먹고 집에 돌아 와 새 아내와 본처에서 난 아이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보다 못한 오상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몽둥이 질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악"하는 비명소리가 부엌에서 들렸다. 변진숙이 마당으로 뛰어갔을 때는 오상사 친딸의 귀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무언가에 화가 난 오상사가 솥뚜껑을 던져 딸의 귀가 잘려나간 것이다. 기절초풍할 것 같은 상황에 변진숙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만 동동 구르는 거였다.

상이군인 오상사의 횡포는 끝이 없었다. 무위도식하며 세상에 대한 모든 분풀이를 새 아내와 딸에게 퍼부었다. 심지어 새 아내가 데려온 사내아이에게도 화살은 벗겨가지 않았다. 변진숙은 1990년 죽기 전까지 남편에게 폭언을 듣고 살았다. 제왕처럼 살던 오상사 역시 끝내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

"친구가 빨갱이면 너도 빨갱이지"

 
 증언하는 박인순
 증언하는 박인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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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사단 16연대 소속의 군인들이 문경 중뜰마을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정삼룡의 집에 들이닥쳐 정삼룡을 다짜고짜 끌어내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성님이 어디다 숨겼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님이가 마을에서 없어 진지가 언제라구요."


정삼룡의 항변은 총 개머리판이 그의 입에 부딪치면서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친구가 빨갱이면 너도 빨갱이지. 너라도 같이 가자"면서 피투성이 된 정삼룡을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성님을 머슴으로 고용했던 구장 이갑성 집에도 찾아갔다. "네놈들이 빨갱이 이성님을 숨겼지"하면서, 구장과 같은 마을 사람 성낙삼과 주준삼도 연행했다.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 본 정춘순(가명. 76세. 청주시 모충동)은 당시 집 나이로 7세였다. 어머니 변진숙과 외할머니 역시 울며불며 아버지 뒤를 따랐지만 동네 어귀부터는 군인들이 아예 쫓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1949년 9월 25일 경북 문경군 문경면 중평리(중뜰)에서 있었던 일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군인들은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정삼룡이 거주하던 경북 문경과 인접지역인 충북 제천 한수면·덕산면은 월악산이 소재한 산악지대로 빨치산이 출몰하던 곳이다.

2사단 16연대 군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은 이성님은 원래 충북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동창리) 구례골 사람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웃 마을에 살았던 친구 정삼룡을 찾아온 것이다. 정삼룡은 원래 충북 제천군 한수면 동창리(송계리) 새터말 출신으로 문경 땅에 와서 살고 있었다.

이성님의 이전 활동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정삼룡은 친구의 부탁으로 마을 구장 이갑성 집에 머슴으로 소개해줬다. 이갑성 집에서 묵묵히 일하던 이성님에게 어느 날 빨치산들이 찾아 와 동반입산을 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군인들은 정삼룡과 이갑성을 빨갱이로 의심한 것이다. 이들과 같이 끌려 간 성낙삼과 주준삼도 이성님과 평소 친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었다.

친구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빨갱이를 머슴으로 두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 4명은 제천군 덕산면 월악리 대판마을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정삼룡과 이갑성은 무참히 학살당했고, 성낙삼과 주준삼은 죽지 않을 정도로 맞은 후에 풀려났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박인순(87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은 성낙삼과 주준삼이 "똥물을 먹고 살나났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군인들은 왜 정삼룡과 이갑성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월악리 대판마을로 끌고 가 학살했을까? 충주지역사회연구소 전홍식 소장은 "월악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고 한다. 즉 빨치산 내통혐의자들을 빨치산활동의 근거지인 월악산 근처로 끌고 가 학살함으로써, 빨치산과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동시에 협박을 가하는 이중 효과를 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1949년 9월에 발생한 정삼룡 사건은 우연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월악산 인근 지역인 경북 문경과 예천, 충북 제천 한수면에서는 1949년과 1950년에 빨치산과 북한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군경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 선발대가 경북 예천군 풍양면 낙상리에 진주한 것은 1950년 9월 26일이었다. 선발대는 당시 풍양중학교 밑에 있던 방앗간을 임시 숙영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보부상의 부인이 같은 마을 김진묵이 부역행위를 했다고 신고했다.

군인들은 김진묵을 풍양지서로 끌고 가 고문을 가했다. 고백을 하려야 할 게 없었던 김진묵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김진묵의 사촌형제 김영묵이 부축해 집으로 데려왔다. 이때 군인 2명이 그들을 따라 와 방에 누워 있던 김진묵을 사살하고, 김진묵의 처와 자식을 죽이겠다며 협박했다. 특히 김진묵의 처 정○○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욕보이려 하자, 시숙인 김영묵이 차마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 자리를 떴다. 군인들은 "저놈도 똑같은 놈이다"라며, 김영묵을 쫓아가 사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 「예천·문경 민간인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정삼룡이 살았던 옆 마을도 비극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삼룡이 끌려가기 이틀 전인 1949년 9월 23일 경북 문경군 문경면 갈평리 주민 40여 명이 마을공회당에 구금당했다. 마을에 총 16정과 다이너마이트 200발이 숨겨져 있다는 첩보를 받고 군인들이 주민들을 강제연행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마을 구장이 빨치산 토벌대인 군인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한국전쟁 전후에 빨치산을 토벌하는 군인들이 마을에 진주할 때, 주민들은 고역을 겪어야만 했다. 없는 형편에 닭과 돼지를 잡아 쌀밥과 함께 군인들에게 대령해야만 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빨치산내통마을'로 규정되었다.

갈평리 사람들 역시 군인들에게 접대가 소홀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초토화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공회당에 구금된 주민들은 곡괭이와 쇠뭉치로 매질을 당했다. 20여일의 감금과 고문 후에 18명의 주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 「예천·문경 민간인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시아주버니의 무고(誣告)로 경찰들에게 성폭행 당해


 
 문경읍 갈평리에 세워진 위령비
 문경읍 갈평리에 세워진 위령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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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문경과 예천, 충북 제천 한수면에서 빨갱이 사냥을 벌일 때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던 정삼룡은 1949년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역사의 비극은 정삼룡에게서만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내 변진숙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군인들에게 남편을 잃은 변진숙은 7살 딸과 4살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일이 앞에 있었다. 그녀는 삶의 거처를 문경에서 제천 한수면으로 옮겨야 했다. 동창리에 시아주버니 내외가 살고 있었고 남편 몫의 땅도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진숙에게 기막힌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아주버니가 아무도 모르게 남편 몫의 땅을 자기 명의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 땅마저 없다면 변진숙이 먹고 살 길은 없었다. 그래서 독한 맘먹고 시아주버니에게 따졌다.

그런데 진실은 변진숙의 편에 있지 않았다. 시아주버니가 제수씨인 변진숙을 무고죄로 제천경찰서에 신고한 것이다. 정춘순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가 경찰서에 끌려가 그 짓을 당해버렸대요. 어머니가 나중에 울면서 얘기하더라고요"라고 전했다. 변진숙은 경찰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지 몇 년 후에 상이군인 오상사에게 몹쓸 짓을 또 당한 것이다.

변진숙이 겪은 한국전쟁, 변진숙의 딸 정춘순과 남동생이 겪은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정춘순에게 새로 나타난 의붓아버지는 강도나 다름없었고, 12세부터 식모로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70대 중반의 그녀에게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빨갱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전쟁의 상흔 역시 곳곳에 남아있다. 그녀의 가슴을 누가 어루만져 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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