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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에서일까? 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학자인 이윤기,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지 8년이 지났다는데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가 늘 우리 곁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과 같은 소설에서 연구서까지 그가 번역한 250여 권에 이르는 다방면의 책들을 생각하면 그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는다. 다만, 그 많은 번역서들과 함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가 건너는 강>과 같은 책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다. 
 
이윤기 소설, 작가정신 출판
▲ 진홍글씨 이윤기 소설, 작가정신 출판
ⓒ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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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이윤기는 문제적 소설을 한국사회에 내놓았다. 여성을 억누르고 재단하는 한국사회를 고발한 중편소설 <진홍글씨>였다. 워낙 번역가로 명망 높았기에 그가 소설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윤기라는 이름이 남긴 족적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진홍글씨>는 남성 작가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철저하게 가부장적이던 시절, 남성 우월주의가 판치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는 "내가 사랑하는 여성들을 나는 노예로서 사랑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듯 밝히고 작품을 써 내려갔다. 

소설은 마치 구술 생애사를 채록해 놓은 것 같은 문장, "내 세대 자매들과 다음 세대 딸들에게 써서 남긴다"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은 <진홍글씨>를 문화인류학적 가치를 지닌 보고서와 수필을 읽는 느낌이 들게 한다.

문화인류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 이유는 여성을 억압하는 우리사회 구조 혹은 의식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요, 수필 같다 함은 주인공 '나'가 작심하고 이야기 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하는 독백은 어떤 소명의식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하다. 

<진홍글씨>, 소설 속 화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구부러진 작대기를 바로 휘려면, 반대쪽으로 더 구부리는 수밖에 없는 법'이라면서 "나는 나의 말이 난폭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화자의 독백과 달리 소설을 읽어보면 소설 속 화자의 말은 결코 난폭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논리적이며 차분한 어조다. 

무엇이 스스로 난폭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던 화자의 독백을 퇴색하게 했을까? 세월이다. 미투 운동이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고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페미니즘 소설이 등장한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어느 정도라고 딱 잡아 말할 수 없지만, 소설이 나온 후 20년이라는 세월은 구부러진 작대기를 반대쪽으로 어느 정도 휘게 했다. 그런 면에서 <진홍글씨>는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즘 보고서였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제목 <진홍글씨>는 언뜻 19세기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이 쓴 <주홍글씨>를 떠오르게 한다. 주인공 헤스터 프린이 가슴에 주홍색의 'A'라는 글자를 달고 다녀야 했을 때, A는 간통(Adultery)을 뜻했다. 반면, <진홍글씨>에서 말하는 A는 간음이 아닌 아마존(Amazon) 머리글자 A를 뜻한다.

그것은 "모성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성의 노예 노릇만은 거절하겠다는 피눈물 나는 선택"을 했던 모권 사회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이마에 핏빛 진홍글씨를 새길 테면 새겨보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주체적이기를 선언한 여성의 독립선언문 전문처럼 결연하다. 두려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나'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일부에다 글씨를 새기는 저 자자형(刺字刑)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위협했던가? 하지만 이제 나는 이마를 내밀고 자자형을 받겠다. 이제는 자자형도 내게는 위협이 될 수 없다." - 13쪽

주인공의 아버지는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이유로 아들과 딸을 차별했다. 아들을 낳아야 여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믿는 아버지와 큰 아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어딘가 부당하다고 여기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있어도 참고 지냈다.

가부장제의 윤리를 버릇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화자는 어느 날 남편의 외도를 확인하고 가부장제의 종으로 살아온 세대들에겐 당황스러울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내 딸에게는 지아비의 종이 되라고 하지 않겠다. 나는 세상의 남성에게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남성은, 딸에게 바라지 않는 것은 아내에게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남성은, 딸이 처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상황에는 아내도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공정하다. 그런데 남성은 공정한가?" - 16쪽

이 시대 여성들에게 화자가 요구하는 '공정함'은 상식이다. 시대가 어느 땐데, 아들 타령이냐!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가 가당키나 하냐고 힐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화자가 '남성은 공정한가'라고 물었을 때, 이 질문에는 이 시대 남성들의 이중성에 대한 질타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내 딸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받지 않고,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살기를 바라면서, 누군가의 딸인 아내에게 당신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지금도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남성들이 존재하는 한 문학평론가 류보선의 말처럼 <진홍글씨>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남성작가에 의해 여성 억압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서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진홍글씨>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공정한가?"

진홍글씨 - 이윤기 소설

이윤기 지음, 작가정신(2018)


태그:#이윤기, #진홍글씨, #주홍글씨, #가부장제, #폐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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