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1 19:58최종 업데이트 18.11.13 11:32
 

박재혁 의사가 재학했던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정'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박재혁의 짧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부산공립상업학교(상업학교)에 진학한 일이다. 이 학교는 한말에서 일제강점 초기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교장과 교사들은 일본인이었으나 학생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초기에는 단 1명의 일본인 학생도 없었다. 

박재혁은 '상업학교'에서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깨우치고 의형제를 맺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상업학교는 나중에 교명이 몇 차례 바뀌어 현재는 개성고등학교라는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53회 상업학교 졸업생이고, 인문학자 고 신영복 선생은 46회 졸업생이다. 이들 뿐 아니라 상업학교인데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체육ㆍ음악ㆍ예술 등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을 대량 배출하였다. 

이 학교 출신으로 국가에서 서훈을 받은 분이 30명이고, 일제강점기 이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사건이 19건에 이르렀다. 단일 학교에서 서훈자나 학생운동이 이토록 많이 전개된 경우는  전국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 중심에 박재혁이 있었다. 

역사학자 E. H. 카는 "필연은 우연히 옷을 입고 나타난다"라는 의미 깊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박재혁이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였거나, 생활이 어려워 졸업 후 은행이나 금융기관 등 취업을 위해 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평범한 학생이 비범한 정신을 갖게 되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에 항일운동의 전통을 남겼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명운이 갈리거나 바뀌기도 한다. 개인사는 물론 인류문화ㆍ문명사가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예수가 베드로를 만남으로써 세계적인 종교가 되고, 불교는 석가모니가 가섭(迦葉)과의 염화미소(拈華微笑)를 통해 불심을 전하게 되고, 서양 철학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으로써 아테네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의 경우 동학(東學)은 조정의 혹독한 탄압에도 최제우가 최시형을 만남으로써 교통(敎通)을 전수할 수 있었으며, 광산업자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를 만남으로써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준하는 함석헌을 만나면서 <사상계>를 일약 대중적 정론지로 만들고, 노무현은 문재인을 만나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소 먼 길을 돌아서 온 것은 박재혁이 공부하게 된 부산상업학교와의 인연을 살피기 위해서이다. 그 당시 박재혁이 이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우연히 또는 필연이라는 운명의 끈에 따라 입학한 상업학교에서 그는 새삼 나라 망한 아픔을 깨닫게 되고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부산상업학교 졸업사진.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1911년 3월 22일 사립육영학교를 마친 박재혁은 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이 학교를 택한 것은 앞서 소개한대로 생계가 어려운 가정을 돕겠다는 경제적인 이유와 부산은 상하이ㆍ싱가포르 등 국제항구 도시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박재혁은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최천택(崔天澤)ㆍ오택(吳澤)과 각별하게 사귀었다. 두 사람은 박재혁처럼 남자 형제가 없는 독자들이어서 쉽게 가까워졌다. 세 사람은 좌천동 소재 증대산(增大山)에 올라 의형제를 맺고 부모상을 당하거나 다른 대소사가 생기면 형제처럼 서로 돕고 살자고 약속하고 다짐하였다. 
 

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세 사람은 이후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최천택은 박재혁보다 한 살 아래이고 오택은 두 살 정도 연하여서, 박재혁이 장형 노릇을 하였다.

세 사람은 학교 성적도 우수했지만 생각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기 의협심이 강하고 개성이 있어서 자주 어울렸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시국 이야기를 나누고 나라 일을 걱정하게 되었다.

이런 우정이 쌓여서 이들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찍어 돌리고, 구세단이라는 비밀 써클을 조직하는 등 소년 독립운동가 노릇을 한다. 뒷날 함석헌이 쓴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바로 이들의 관계에도 해당이 될 것 같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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