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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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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헬스장 메이크업이나 워터파크용 메이크업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따로 이름을 붙여서 부르긴 하지만 이 또한 화장이다. 땀이나 물이 묻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그러면서 운동이라는 티피오(T.P.O)에 맞게 간소한 화장.

이런 종류의 화장법은 운동 중에도 완전히 민낯이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오직 여성에게만 주어진 억압의 산물이다. 외모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선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애초에 화장이 필수가 아닌 남성으로선, 화장한 채로 운동하는 것을 터무니없이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십 년도 더 된 달리기의 기억

그런데 운동을 할 때 여성이 의식하는 이른바 코르셋은 민낯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움직임과 호흡을 부자연스럽게 하면서까지 가리고 단속해야 하는 가슴이 있다.  운동과 가슴, 이 두 단어로 이십 년도 더 된 충격적인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되던 무렵,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었다. 입학하던 그 해 학교가 남자 중학교에서 공학으로 바뀐 탓에 여학생 수가 고작 한 학년의 절반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성비 불균형이 심각한 집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내 체육대회가 열렸다. 트랙에서 1학년 여학생들의 백미터 달리기가 진행되는 동안 2, 3학년이 스탠드에 앉아서 1학년이 달리는 광경을 구경했고, 그러던 중에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 일을 '원숭이 떼의 발광'이라고 부른다. 2, 3학년들이 트랙을 달리는 1학년 여학생의 가슴이 얼마나 큰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구경하다가 일제히 발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경주마에 돈이라도 건 것마냥 트랙에 번호까지 붙여가며 큰소리로 연호했다. 아마 몇 날 며칠을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했어도 그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우리는 정반대의 의미로 그 사건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몸이, 타고난 신체의 일부가, 누군가에겐 그토록 집요하고 더러운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특히 학교 안에서는 절대로 뛰지 않았다. 지금도 수많은 십대 여성들이 '못생겨지고 시선을 끌기 때문에' 체육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포츠 아닌 브라에 방점 찍힌 '스포츠 브라'

성인이 되자, 다행히 원숭이떼를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대신에 어떤 운동을 하든 스포츠 브라를 필수로 갖춰 입어야 했다. 실제로 여성용 스포츠 의류 가운데서 가장 많이 팔리는 품목으로 레깅스와 함께 스포츠 브라를 꼽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스포츠 브라는 결코 싸지 않고, 오랜 시간 여러 종류의 제품을 입어본 결과 광고와 달리 딱히 인체공학적이지도 기능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스포츠 브라의 방점은 스포츠가 아니라 브라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브라도 결국 움직임을 방해하고 몸통을 옥죄는 브래지어의 일종일 뿐이다. 헬스장 메이크업이 그냥 메이크업이듯이. 일반 브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운동을 할 때 입기 때문에 어깨 끈이 두껍고 훅 없이 일체형 디자인에, 땀 흡수를 고려한 소재로 만들어진 게 전부다. 

그렇다면 굳이 이 비싸고 가슴을 옥죄는 브라를 운동 중에 입는 이유는 뭘까? 널리 알려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운동할 때 가슴이 많이 흔들리면 가슴을 지지하는 쿠퍼 인대가 손상되는데 쿠퍼 인대는 한번 끊어지면 재생되지 않기 때문에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쿠퍼 인대란 가슴을 지지하는 섬유조직으로 운동을 하면 상하좌우로 흔들린다. 이 움직임이 계속되면 인대가 끊어지거나 가슴이 아래로 처질 수 있고 또 스포츠 브라를 착용하지 않은 채로 운동을 하면 가슴이나 어깨, 등 위쪽의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쿠퍼 인대가 느슨해져서 가슴이 처지고,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서 쿠퍼 인대가 끊어지기도 하는 걸까? 그러려면 우선 쿠퍼 인대가 발목 인대나 어깨 인대처럼 뼈와 뼈 사이를 연결하는 강한 섬유조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쿠퍼 인대의 진짜 정체는 해부학자 애슐리 쿠퍼가 처음 발견함으로써 이름을 붙인, 유방체에서 진피까지 뻗는 섬유성 돌기이자 피부소대(皮膚小帶)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피부소대를 설명하자면 어떤 기관이 움직이는 범위를 제한하는 주름을 뜻한다. 따라서 쿠퍼 인대는 다른 인대처럼 끊어지거나 영구적으로 손상될 수 없다. 애초에 가슴을 지지하는 기관이 아니며, 쿠퍼 인대가 느슨해져서 가슴이 처지는 것도 아니다. 가슴은 얼굴이나 엉덩이와 마찬가지로 중력과 노화 때문에 자연스럽게 처질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한 스포츠 브랜드가 벌이는 대규모 러닝 이벤트를 앞두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10km를 달리기까지 하체 근력과 지구력은 충분하지만 숨쉬기가 문제였다. 나는 심폐력이 약한 편으로 다른 운동을 할 때도 쉽게 숨이 차곤 한다. 

하지만 달리기의 승패는 호흡에 달렸고 호흡이 가빠서 더이상 호흡할 수 없는 때야말로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고 내뱉어야 호흡이 돌아온다. 가슴을 압박하고 옥죄는 브라를 입고 호흡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또 막상 브라 없이 달리자니, 그 옛날의 원숭이 떼가 떠올랐고 쓸데없이 시선을 끌게 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숨쉬기와 안도감 사이에서 숨쉬기를 선택했다. 

자유롭게 숨 쉬며 더 멀리 달릴 때

난생처음 참가해본 대규모 러닝 이벤트의 묘미는 평소에는 달릴 수 없는 곳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거의 매일 차를 타고 지나던 양화대교를 달려서 건너는 즐거움과 잠시나마 통제를 벗어나는 일탈을 맛봤다.

스포츠 브라 없이 달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음껏 숨을 마시고 내뱉는, 그 별것 아닌 행위 하나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통제의 선을 넘어서는 기분이었다. 통증도 불편함도 없었다. 5km 달리기를 연습할 때처럼 km당 7분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1시간 11분으로 달리기를 마쳤다. 10km를 쉬지 않고 달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전히 '스포츠 브라 없이 운동하면 가슴에 통증이 온다', '가슴이 처진다'는 항설이 괴담 수준으로 부풀려져 있고 대다수 여성이 이 괴담을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여성의 가슴이 항상 이상적인 형태를 유지해야 하며 절대로 처져선 안된다는 신념은 그 자체로 여성 혐오다.

이 강력하고 그릇된 신념 덕분에 속옷 브랜드와 스포츠 브랜드는 엄청난 매출을 올렸고 성형산업도 함께 성장했다. 이제는, 여성들 스스로 편안함을 추구하고 자유롭게 숨을 쉬며, 더 멀리 달릴 때가 됐다.

태그:#페미니즘, #탈코르셋, #스포츠브라, #여성,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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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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