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3 20:05최종 업데이트 18.11.13 11:33
 

박재혁의사. 박재혁의사 생가 부근 독립운동가 골목 모습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박재혁 등이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기로한 <동국역사(東國歷史)>는 1899년 9월 대한제국 학부에서 한말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분인 현채(玄采)가 편저하여 소학교용 교과서로 간행한 2책이다. 

제1책은 단군조선에서 통일 신라까지, 제2책은 고려시대사를 수록하면서 앞부분에 단군과 기자ㆍ삼국ㆍ고려ㆍ조선의 역대 국왕일람표, 역대 왕도(王都)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실었다. 


당시 학부 편집국장 이규환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은 <동국역대사략>이 한문으로 중학교교과서로 간행되었는데, 소학교용으로 하기 위해 이를 다시 국한문으로 편집하였다."라고  의도를 밝혔듯이 학생용 교재였다. 

총독부는 <동국역사>를 비롯하여 <유년필독> 등 청소년용 역사교재들과 한글 관련 <국문과본>, 민족정신 관련 <애국정신>, 노래집 <찬미가> 등을 가리지 않고 압수ㆍ소각하였다. 
  

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네 명의 학생들은 최천택의 집에서 <동국역사>를 등사기로 한 장 한 장 밀어 1차로 110권을 찍었다. 1차분을 민족의식이 강한 동래고보ㆍ일신여고 등에 배포하고, 2차분 70권을 만들어 부산시내의 다른 학교에, 그리고 3차분 90권을 다시 만들어 최천택의 집에 보관했다가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보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최천택의 집이 일경에 수색당하면서 3차분은 압류되고 그는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최천택은 끝까지 '단독소행' 이라고 말하여 친구들을 보호하였다. 

1차 배본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한 일이 되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마침내 해내고 말았다는 큰 보람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들은 2차 배본을 위해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최천택의 사랑채에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학교를 상대로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사실 여러 학교의 대표를 만나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고 게다가 그 학교의 형편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각 학교의 대표를 이리로 오게 하자."
"연락 방법은?"
"각자 한 곳씩 맡아 발로 뛰어야지."
"그게 좋겠구만."

이렇게 해서 각 학교 대표 학생들을 하나 둘 불러서 2차분으로 70권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 탈 없이 2차 배본까지 무사히 끝냈습니다. 이제는 잡혀가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혹시나 비밀이 탄로나 잡히면 어쩌나 무척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3차분으로 또 90권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최천택이 보관해 있다가 희망하는 학생이 있으면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일제는 병탄 초기에 각종 사서를 수거하고 불태운데 이어 식민체제가 강고해지면서 더욱 야만적인 학술ㆍ언론탄압을 저질렀다.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된 학술과 언론탄압의 기저는 철저한 금서정책과 학술ㆍ언론ㆍ출판의 통제에 있었다. 일제의 반문명적인 금서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사상의 말살책동으로서 우리의 역사책이나 의사ㆍ열사ㆍ영웅들에 관한 전기류ㆍ족보ㆍ만세력까지 포함된다. 

둘째, 전통문화나 고유문화를 말살시키고자 하여 이에 대한 조선의 인문ㆍ지리ㆍ풍습에 관한 서적 

셋째 우리의 독립정신을 저해시키고자 하여 외국의 독립운동사나 망국사와 같은 외국 역사책

넷째, 민족혼을 일깨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무궁화나 태극기에 관한 책 

다섯째, 서양의 민주주의 사상이나 러시아의 사회주의 사상에 관한 일체의 문헌 

여섯째, 농민운동ㆍ청년운동ㆍ여성운동 또는 야학운동 같은 내용을 다룬 책 등이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에 어긋나는 내용이나 민족운동에 관계되는 모든 책을 압수하거나 불태웠다. 

이리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금서로 묶인 책들이 500종이 훨씬 넘는다. 처음부터 검열에 걸려 출판조차 되지 못한 것과 검열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출판을 포기한 것까지 포함하면 금서의 종류는 훨씬 많아진다.

박재혁을 비롯한 애국학생들은 일제의 야만성에 굴복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읽히도록 <동국역사>를 등사기로 한 장 한 장 찍어 책을 만들고, 일경 몰래 학교와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사건은 부산지역 학생ㆍ학교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최천택은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10일 만에 풀려나왔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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