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8 17:57최종 업데이트 18.10.08 17:58
 

2007년 4월 8일, 노무현 대통령 재임 때 모교인 개성고등학교 방문 모습 ⓒ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제공

 
해방 후에도 부산상고(현 개성고등학교)는 각계각층의 저명 인사를 다수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53회 졸업생 노무현 전 대통령과 46회 졸업생 신영복 전 성공회대학 교수이다.

1963년 2월 진영중학교를 졸업한 노무현은 그 해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목포상고 출신인 직전 대통령 김대중에 이어 상고 출신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노무현의 '부산상고'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그나마 고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학벌주의 질곡에 빠진 한국사회에서 '상고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첫 나들이로 출신모교 개성고(부산상고) 총동창회 정기총회 참석 방명록 ⓒ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제공

 
노무현은 "그렇게 인연을 맺은 부산상고는 내 삶의 '결정적 존재'가 되었다"고 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그 이름이 함께 있었다. 고시에 합격했을 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언제나 '부산상고가 최종 학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것은 또한 내 정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밑천이기도 했다. 부산상고는 역사가 깊은 학교이다. 구한말 '개성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래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지사를 숱하게 배출했다." (주석 1)

노무현의 부산상고 시절은 어려웠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이럭저럭 해결되었으나 부산에서의 숙식비용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고향의 두 형님은 실업자이고, 늙은 부모님이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거나 취로사업에 나가 번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곤궁한 살림인지라 막내아들의 생활비를 댈 형편이 되지 못했다. 동급생들도 대부분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다. 노무현은 두고두고 모교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2007년 4월 8일, 노무현 대통령 개성고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 참석 축사 ⓒ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제공

 
노무현과 관련 학창시절의 한 기록이다.

2학년 때는 6반이었는데 초량에 사는 양 모 급우의 집에 식사 신세를 지기도 하고, 가끔 기숙을 하기도 하였다. 또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인근에 있는 <아세아독서실>이라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 독서실은 목조건물이고, 빈대마저 있어서 대실료가 싸기 때문에 그곳을 택하였다. 바로 그 독서실에 알바로 총무를 지낸 학생이 54회 최도술 동문이었다. 그는 노무현이 대통령 시절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3학년 3반 취업반이었는데, 당시는 1반부터 4반까지 네 개 반은 취업반이고, 5반부터 8반까지 네 개 반은 진학반이었다. 두 코스에 있어서 교육과목과 담당교사가 달랐다. 키가 작은 편이라 출석번호가 앞에서 57번이었고, 제일 앞줄에서 수업을 받았다. 

당시 3학년은 취직시험을 대비하여 아침에 1시간씩 보충수업을 하였다. 그는 부기도 잘했고, 독서를 많이 하여 일반상식도 자신이 있었던지 보충수업은 거의 받지 않고 정시수업시간이 임박하여 교실에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얼핏 보면 제도에 반항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취직시험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7년 4월 8일 개성고총동창회체육대회 노무현 대통령 참석 ⓒ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제공

 
그러나 그 해에 농협의 신규 채용시험은 종전과 달랐다. 해마다 각 지부별로 6~7명, 모두 30여 명이나 되었는데 낭패가 난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가장 취약한 충청북도지부, 제주도지부, 전라남도지부 등 경쟁자가 약한 곳으로 학생들을 분산시켜 응시하게 하여 모두 6명의 합격자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한 사람만 뽑는 부산ㆍ경남지부에 당당하게 응시하여 억울하게 낙방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부암동에 있는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을 하였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게 되었다. 당시에 그는 부기를 잘하여 경리과에 근무하게 되었으므로 세무서와 은행에 자주 가는 일이 있었다. 외근 시에는 군화를 신거나 잠바를 입고 다니면 안 된다는 상관의 질책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되어 퇴사하고 말았다.
(주석 2)

주석
1> 노무현, <운명이다>, 53쪽, 돌베개, 2010.
2> 개성고등학교, <거룩한 백양발자취 3세기(Ⅲ)>, 21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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