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9 13:28최종 업데이트 18.10.09 13:29
 

2015년 만해문예대상 시상식에 참석한 고 신영복 교수. ⓒ 성공회대 제공

 신영복은 1956년 봄에 이 학교에 진학하였다. 

인문계에 관심과 소양이 많았던 그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자형이 이 학교 교사여서 사택에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선거에서 낙선하여 가정 형편이 크게 어려워진데다 형이 서울에 유학중이어서 졸업하면 은행에 취직이 될 것이라는 부모의 뜻에 따른 것이다. 


한 동창생의 증언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1962년 모습. ⓒ 성공회대 제공

 고교 시절의 신영복을 회상하면 왠지 동자승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는 까까머리에 단아하고 동글동글한 느낌을 주는 외양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티없이 맑고 밝은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그가 교직원 사택에 유숙하고 있어 행동반경이 학교와 그 언저리로 매우 제한되었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동자승을 닮은 인상과 분위기에 걸맞게 순수하고 천진난만했던 그는 당차고 활달한 면모를 보인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말하자면 이성보다는 감성과 지성이 돋보였다고 할까."
(주석 1)

신영복은 가까운 학우 6명과 '은린(銀鱗)'이란 서클을 만들어 시ㆍ소설 등 습작 활동을 하고, 학업도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학업성적은 물론 예능과 스포츠까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전교 시(詩)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가 하면 글씨와 그림에서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특히 삽화와 만화는 재치있는 주제 설정이나 자유분방하면서도 섬세함을 잃지 않는 선이 움직임에서 그때 이미 기성 작가의 경지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는 또한 시 서화나 음률에 통한 사람들이 흔히 결하기 쉬운 운동에도 능하여, 축구에서 씨름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어서 공부만 잘하는 백면서생들의 부러움을 사곤 하였다.
(주석 2)

신영복은 매달 실시하는 대입 모의고사에서 항상 전교 수석을 차지하고, 한글날 부산시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도 차상(次賞)을 차지할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 성공회대 제공

 
졸업을 앞두고 신영복과 '은린' 멤버들은 울산ㆍ방어진ㆍ밀양 등 회원 각자의 고향을 함께 여행하는 등 즐거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신영복은 졸업때까지 부산에 있는 매형의 학교사택에서 지내다 주말이면 본가로 돌아가 부모와 함께 보내었다. 신영복은 1959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들 외에 신상우ㆍ이기택ㆍ김승목ㆍ오위영ㆍ정해영 등 다수의 국회의원과 관료ㆍ법조인ㆍ체육인, 우리나라 민속학의 선구자 송석하, 경제부총리 김학렬,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다가 5ㆍ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김지태, 작곡가 금수현 등이 꼽힌다.

주석
1> <신영복 함께 읽기>, 268~269쪽, 돌베개, 2006.
2> 앞의 책, 269~27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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