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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량진에서 바라본 한강인도교
▲ 한강인도교 입구 노량진에서 바라본 한강인도교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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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인도교의 흑역사

한강인도교(한강대교)는 1917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인도교다. 1900년 한강철교가 만들어진 이후 17년 만에 사람이 물 위를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한강인도교의 수난사에는 을축년 대홍수(1925)와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 유명하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도 가장 큰 홍수로 기록되고 있는 을축년 대홍수는 청파동까지 물에 잠기게 했을 정도였고, 중지도(지금의 노들섬)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한강인도교 북면의 다리를 떠내려가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한강인도교의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인 28일 새벽 2시 30분에 벌어진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미 서울시민을 내팽개친 채 기차를 타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뒤늦게 피난 중이던 서울시민 500~800명이 죽음을 맞게 됐다.

한강인도교의 흑역사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쿠데타군이 육군본부와 중앙청 등을 장악할 때 공수특전단을 내세워 헌병대의 저지를 뚫고 한강을 건넌 곳이 바로 한강인도교였다.

반면, 한강인도교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꿋꿋하게 지켜보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들, 한강인도교에서 3.1만세운동을 준비하다

한강인도교는 1919년 3.1혁명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비밀리에 회합한 장소였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주축이었다.

이때 전국을 돌며 만세운동의 준비상황을 점검하던 기독교계 인사인 이인환, 박희도, 오화영, 이필주, 함태영, 안세환, 최성모, 이갑성 등 8명이 거사 3일 전인 2월 26일에 한강인도교 위에서 만났다.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이면에서 활약한 15인을 합쳐 원래는 48인이었지만, 33인 중 김병조가 해외로 탈출한 관계로 47인이 재판을 받았다.
▲ 민족대표 47인 예심결정서를 담은 동아일보 기사(1920. 4. 8)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이면에서 활약한 15인을 합쳐 원래는 48인이었지만, 33인 중 김병조가 해외로 탈출한 관계로 47인이 재판을 받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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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3.1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기독교계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한강인도교 위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갈 기독교계 인사를 전형하는 일과 함께 안세환을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파견하기로 하는 결정도 했다.

당시 한강인도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기도 했는데, 이들의 한강인도교 회합은 일제의 허를 뚫고 이뤄낸 쾌거였다.

한강인도교에서 만난 8명의 기독교계 인사 중 '이인환'은 이승훈(1864~1930)의 본명이다. 이승훈은 기독교 장로였는데,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좌장으로 천도교 측과 교섭 창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승훈은 이미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는데, 3.1만세운동으로 다시 3년형을 선고받는다. 석방된 이후에도 이승훈은 오산학교 경영에 힘쓰면서 민립대학건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벌이고, <동아일보>가 위기에 몰릴 때는 <동아일보> 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갑성(1889-1981)은 당시 세브란스의전부속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의 조직과 연락을 맡았다. 이갑성은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마산 등지를 돌면서 조직과 연락관계를 정비하고 막 올라온 상황이었다. 이갑성은 3월 1일 당일까지도 김창준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부하는 역할을 맡았고, 김원벽(연희전문), 강기덕(보성법상), 한위건(경성의전) 등 학생과 연계망을 가지고 있던 박희도와 함께 학생들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이갑성에게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 조경한, 이강훈 등에 의해 일제에 전향해 밀정까지 했다는 의혹이 한동안 제기됐으나, 구체적인 행적을 조사한 결과 문제제기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1940년대 상하이에 나타났던 비슷한 이름의 밀정에 대한 소문이 와전되면서 발생한 오해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3.1절 특집, 누가 변절자인가>, 2005. 3. 1, SBS).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를 맡고 있던 박희도(1889~1952)는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박희도는 정춘수, 최린과 더불어 변절자의 길을 걷는다. 더군다나 자신이 경영하던 중앙보육학교에서 기숙사 여학생들을 상대로 한 '위계에 의한 성폭력' 의혹에 휩싸이는 등 변절자 중에서도 '가장 타락한 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강진과 이종림, 한강인도교 아래에서 보트를 타고

일제강점기 한강인도교 아래에는 한강에서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보트장이 있었다. 1930년 이곳 보트장에서 만난 두 명의 젊은이도 함께 보트를 타며 한강인도교 아래로 진출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들의 움직임은 여느 유람객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왠지 주위를 살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 두 명의 젊은이는 단순히 한강 유람차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가운데 강진(김와시리, 1905~?)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입국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던 인물이었고, 이종림(1900~1977) 역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입국해 영등포 외곽에 아지트를 두고 경성제대 반제동맹단 등을 이끌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람객인 양 보트를 탄 채 한강인도교 아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급사 등을 조직하여 적우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삐라살포는 물론 경성방직 노동자 파업지원 등의 활동을 펼치다 1931년 성대반제동맹 사건 등으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경찰의 추적을 받다 강진은 결국 체포되고 이종림은 해외로 탈출한다.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내서 이종림과 강진(김와시리)이 관여한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과 성대반제동맹 사건을 2면에 걸쳐 다뤘다.
▲ 성대반제동맹 사건과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호외(1931. 11. 4)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내서 이종림과 강진(김와시리)이 관여한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과 성대반제동맹 사건을 2면에 걸쳐 다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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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강진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학교를 다니고 1922년에는 러시아공산청년동맹(콤소몰)에 가입했다가 조선공산주의자의 단일대오를 형성한다는 명분으로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종파분자로 몰려 제명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후 만주로 넘어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ML계)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붕괴하자 1930년 1월에는 조선으로 들어와 노동자-농민에 기반한 재건을 목표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강진은 해방이후에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박헌영과 대립적인 위치에서 활동했는데, 3당합당(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통한 남로당 결성에 반대해 사회노동당을 결성한 사로계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3남매 독립운동가 김형선과 통한의 한강인도교

한강인도교 남단은 1933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형선(1904~1950)이 일경에 체포된 곳이다. 상하이에 있던 박헌영, 김단야 등과 연계해 조선의 독립과 공산당 재건을 도모하며 중국과 조선을 넘나들던 김형선은 1933년 7월 15일 자신의 인천 아지트가 발각되자 체포망을 피해 인구가 많은 서울로 잠입을 시도한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의 경비가 삼엄하자 김형선은 김포에서 장을 보고 오는 사람으로 변장해 재차 진입을 시도하지만, 일제 경찰의 한강인도교 입구 봉쇄를 뚫지 못한 채 검문에 걸려 끝내 잡히고 만다.

김현선에게 한강인도교는 '통한의 다리'였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지하운동의 중요인물 노량진과 인천서 체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형선을 "지하운동의 거두"로 묘사했다.
  
김형선이 한강인도교 앞에서 일경에 체포될 즈음 상하이에서는 박헌영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체포되었지만, 둘은 각각 별도로 체포되었다.
▲ 김형선과 박헌영의 검거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33. 8. 17) 김형선이 한강인도교 앞에서 일경에 체포될 즈음 상하이에서는 박헌영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체포되었지만, 둘은 각각 별도로 체포되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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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출신 김형선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든 3남매 독립운동가 중 장남이었다. 김형선은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마산청년회, 마산해륙운수노동조합 등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질 때는 12명의 발기인 중 가장 나이 어린 멤버였다. 그는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26년 8월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모면했다.

여동생 김명시(1907~1949)는 팔로군 포병대장을 지냈고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였던 무정장군의 비서도 지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말 서울에서 진행된 무정장군 환영회에서 무정장군과 함께 말을 타고 종로 일대를 행진하여 '백마 탄 여장군'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30년대 부산과 진해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헌신한 김형윤(1909~1973)은 김형선의 남동생이다.

김형선은 1933년 한강인도교 입구에서 검거돼 8년형을 언도받고도 1941년부터 시행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때문에 해방이 돼서야 겨우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서 해방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그런 김형선이었지만,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비극의 소용돌이는 피해가지는 못했다. 해방과 함께 재건된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핵심 멤버로 활동한 김형선은 1950년 9월 미군의 폭격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형선의 여동생 김명시의 죽음은 더 비극적이다. 1949년 4월 11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일제시 연안독립동맹원으로서 18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부녀동맹 간부로 있었으며 현재 북로당 정치위원인 김명시(43세)는 수일 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평경찰서에 구속되었었다 하는데, 유치된 지 이틀 만에 철장 속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은 김명시가 자살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3남매 중 김형윤이 그나마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기에는 한국현대사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선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과 <노들강변>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노들강변>은 1930년대 만들어진 신민요다. 문호월이 작곡하고 박부용이 처음 부른 이 <노들강변>의 작사자는 조선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1907~?)이다. 신불출과 문호월이 함께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던 중 한강인도교를 건너다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한강인도교 아래 선술집에서 작사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불출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맹활약한 연극인이자 만담의 개척자였다. 신불출은 <익살맞은 대머리> <말씀 아닌 말씀> 같은 만담을 레코드로 취입하기도 하고 조선 전역을 도는 공연도 하면서 최고의 만담가로 이름을 날렸다.

예명인 신불출이라는 이름 자체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렇게 일본 세상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신불출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1931)에 출연해 마지막 장면에서...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 삼천리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 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외쳤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함께 독립운동에 나섭시다!"

이렇게 외치다가 연행되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던 신불출은 해방정국에서도 만담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월북하여 '신불출만담연구소'까지 차리지만, 남한이나 북한이나 재기발랄한 그의 성향을 감당할 수 없었던 듯 북한에서도 끝내 숙청당하는 운명에 처한다. 아픈 역사다.
 
한강인도교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설치되어 있다.
▲ 동작구가 설치한 노들강변 노래 푯말 한강인도교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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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한강인도교

한강인도교는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중앙대·숭실대생이 이곳 한강인도교를 건너 국회(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 앞과 내무부, 중앙청으로 진출했다. 이때부터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생겨났다.

실제로 중앙대생들은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에도 '중지하라 매국외교 삼천만은 통곡한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한강을 건넜다. 또한 1980년 5월 15일에도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강인도교 위로 행진하여 서울역으로 진출했다.
  
중앙대생들은 4.19혁명 때 한강을 건너 행진한 이래 역사의 주요 분기점마다 수천의 대학생들이 대오를 형성하고 한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생겼다.
▲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 한강인도교를 건너는 중앙대학생들 중앙대생들은 4.19혁명 때 한강을 건너 행진한 이래 역사의 주요 분기점마다 수천의 대학생들이 대오를 형성하고 한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생겼다.
ⓒ 서울시 빅데이터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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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보라매공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가 끝난 후 시위대열이 시내로 진입하는 유력한 코스에 한강인도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90년 7월에는 보라매공원에서 50만 명이 모여 당시 집권 여당 민자당 규탄대회를 치르는데, 이중 3만 명이 한강인도교를 건너 시내로 진입하려다 용산 방면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1991년에는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장례행렬이 모교인 휘문고로 가기 위해 이곳 한강인도교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행진하기도 했다.

한강인도교는 생존권과 주거권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990년 12월 31일 노량진 재개발지역의 세입자 50여 명은 한강인도교를 막고 "겨울철 강제철거 중단!"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강제 해산당한 일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한강인도교는 100여 년의 세월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한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 곧 [동작 민주올레 18]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흑석길 편)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노량진길, #한강인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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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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