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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흑석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학도의용병 현충비 6.25한국전쟁 초기에 있었던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병 48명을 기리는  <학도의용병 현충비>가 흑석동 한강변에 세워져 있다.
▲ 학도의용병 현충비 6.25한국전쟁 초기에 있었던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병 48명을 기리는 <학도의용병 현충비>가 흑석동 한강변에 세워져 있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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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병 현충비'는 흑석고개 정상부에 있는 '효사정문학공원' 입구에 있다. 이 비는 6.25 한국전쟁 초창기 포항지구 전투에 참전한 대학생과 중학생 등으로 구성된 71명의 학도의용병 중 전사한 48명을 추모하기 위한 비다.

당시 제3사단 사단장으로 포항지구 방어전투를 이끌었던 김석원 장군의 주도로 1955년에 건립됐다.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울 당시 김석원은 성남고 교장을 맡고 있었다.

김석원이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운 이유는?

김석원 장군은 일본 육국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한 일본군 대좌 출신이다. 1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남북간 비공식 물물거래 과정에서 발생한 '북어 사건'으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의 불화 끝에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수도사단장으로 복귀했고 이어 포항전투 직전인 8월 7일 제3사단 사단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김석원은 당시 상황을 그가 쓴 <노병의 한>(1977)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당시 제3사단은 포항여중에 후방지휘소를 두고 있었는데, 그 주력부대는 포항북방 강구(江口)에서 전투 중이었다. ...(중략)... 그런데 내가 강구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동안에 평생을 두고, 아니 죽어 저승에 가서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가장 가슴 아픈 죽엄과 접촉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1950년 8월 11일 새벽, 우회하여 포항을 공격한 공산군의 기습을 받아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그야말로 호국의 꽃으로 산화한 어린 학도병 48명의 죽음이다. 그들은 6·25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자기 스스로 책가방을 내던지고 맨주먹으로 용약 일선에 달려 나온 애국의 화신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나와 함께 싸우기 위하여 내가 속해있던 수도사단으로 갔다가 제3사단으로 전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포항까지 도보로 강행군해 온 조국의 꽃들이었던 것이다."(341~342쪽)
 

김석원도 자신의 휘하에 있던 48명 어린 학도의용병의 죽음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김석원은 1955년 흑석동 한강변에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울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 비를 세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교 재건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고 생각될 무렵인 1955년 5월 나는 6·25동란 전 개성의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의 토치카를 파괴, 아군에게 승리의 길을 터주고 산화한 육탄10용사의 조국애에 넘친 감투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육탄10용사 현충비'를,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6·25동란 시 어린 학생의 몸으로 조국의 위난을 구하려고 총을 들어 기억에도 새로운 포항전투에서 애처롭게 죽어간 어린 넋들을 달래기 위해 '학도의용군 현충비'를 흑석동 한강 가에 세웠다. 조국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조국을 구하기 위해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다는 것은 애국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애국이며 인간의 행동치고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나는 언제나 확신하고 있다."(389-390P)

한마디로 말하면 어린 학생들의 조국애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1955년 6월 21일에 열린 '학도의용병 현충비' 제막식에는 함태영 당시 부통령, 이선근 당시 문교부장관, 김태선 당시 서울시장, 신익희, 정일형 당시 국회의원 등도 참석하였다.   

궁금해하는 독자를 위해 한 가지 덧붙이면 위 글에 등장하는 '육탄10용사 현충비'는  1977년 한강대교와 현충원을 잇는 동작대로 확장공사로 서울현충원 안 현충문 오른편으로 옮겨져 있다. 이때 '학도의용병 현충비'도 시내 삼청공원으로 옮길 계획이었으나 극적으로 이곳에 살아남았다. 

영화 <포화 속으로> 속의 학도의용병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48명을 포함한 71명의 학도의용병 이야기는 영화 <포화 속으로>(2010)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배우 권상우가 학도의용병 구갑조 역을, 가수 T.O.P 최승현이 학도의용병 중대장 오장범 역을, 배우 차승원이 북한군 766부대 진격대장 박무랑 역을 연기했다.
 
영화 <포화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 오장범(최승현 분)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실제 학도의용병 이우근(당시 동성중 3년생)이 쓴 부치지 못한 편지이다.
▲ 영화 <포화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 오장범(최승현 분)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실제 학도의용병 이우근(당시 동성중 3년생)이 쓴 부치지 못한 편지이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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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1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기 직전인 9월 14일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동부지역 방어전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 스토리를 보면 실제 포항전투와는 상당히 다르다. 영화 <포화 속으로>가 3사단 주력이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포항여중에 학도의용병만 남겨놓고 떠났다는 설정과 달리 실제로는 3사단의 주력도 포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군 역시 아직 부산항에 도착하지 않고 있다는 영화 <포화 속으로>의 설정과 달리 이미 참전한 지 오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3사단의 병력이 고립될 위기에 처하면서 후퇴를 결정하게 되고, 이때 학도의용병들은 8월 9일 배치된 이후 8월 11일 새벽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전면 공격에 직면하여 포항여중에 있던 제3사단 후방지휘소의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하다 11시간의 사투 끝에 71명 중 48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됐으며 13명이 포로가 됐던 것이다.

이에 대해 포항전투 이후 학도의용병 중대가 재편되면서 부상당한 김용섭 중대장(당시 서울사대 2년)을 대신해 현역 장교로서 8월 20일부터 학도의용병 부대장을 맡아 희생된 이우근(동성중), 윤정한(성남중), 이상현(중앙대) 학생 등 학도의용병 유해 48구를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던 남상선(예비역 대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부닥쳤을 때 책과 펜을 총검으로 갈아 쥔 학도병들의 애국심은 비할 데 없이 굳은 것이었고 그러기에 정규군대로서도 어려웠던 그 전투를 훌륭히 치러내고 산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6·25는 살아있다②>, 1975. 6. 13, <경향신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사>(2004)에서는 학도의용병들의 포항전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도병들이 적의 포항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은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특히 병참부는 대부분의 군수품을 민간선박을 이용해 피해 없이 후송하였고, 병기부는 보유중인 노획무기 중 일부는 땅에 묻고 나머지는 휴대해 구룡포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군 보급품의 후송이 손실 없이 이루어져 아군의 차기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6·25전쟁사> 558p,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영화 <포화 속으로>는 영화답게 실제 사실과 다른 극적인 요소를 더 추가하여 국방부의 공식입장인 <6·25전쟁사> 이상으로 이들 학도의용병을 전쟁영웅화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도정에서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 지금우리가 이들 학도의용병이 죽음에 대한 접근법은 남과 북이 노골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 남한의 소년병만 무려 2만9603명

학도의용병이라는 말은 사실 참전 당시 학생 신분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학적을 불문하고 나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쟁 당시 만 17세 이하의 소년병의 숫자는 무려 2만9603명이었고, 그중 소녀병도 467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3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는 병력이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10% 가까운 2573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소년병 연구>,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한국전쟁 당시의 학도의용병 6.25한국전쟁 당시 18세 미만의 소년병은 남한만 총 29,603명이 참전하였고, 이중 약 10%에 가까운 2,573명이 전사하였다.
▲ 6.25한국전쟁 당시의 학도의용병 6.25한국전쟁 당시 18세 미만의 소년병은 남한만 총 29,603명이 참전하였고, 이중 약 10%에 가까운 2,573명이 전사하였다.
ⓒ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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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소년병이 있었을 것이고 비슷한 규모의 전사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면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어린 소년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도 모자라 끝내 목숨마저 빼앗았던 끔찍했던 전쟁으로 기록될만하다.

한국전쟁 당시 이우근 학생과 같이 자원입대한 경우도 있었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징집 당한 경우도 많았다. 많은 학생들이 길을 가다가 강제징집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형을 대신해서 징집당한 경우도 있었다. 학교에 등교했다가 단체로 징집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UN에서 2002년에 채택된 <아동의 무력충돌 참여에 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선택의정서> 제2조에 따르면 "당사국은 18세 미만인 자가 자국 군대에 징집되지 아니하도록 보장한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강제징집자 중에는 남한군이나 북한군 모두 심지어 13~14세의 어린 소년조차 있었다. 이렇게 징집된 소년병 중 수천 명이 전투 중에 사망하기까지 했다.

전쟁은 어린이, 여성들의 안전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은 여기에 더해 어린 소년들의 안전에도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학도의용병 이우근 학생의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시 소년병들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는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생(당시 동성중 3년)의끝내 어머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우리가 이들 학도의용병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이들의 희생을 단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6·25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학생들을 기리는 <학도의용병 현충비>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라면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어린 소년들마저 죽음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영구히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할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학도의용병 이우근의 부치지 못한 편지 전문을 싣는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아울러 이 편지가 '학도의용병 현충비' 앞에 함께 전시된다면 전쟁의 참상을 보다 더 생생히 전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배우는 명소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자의 바람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온전히 전해져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 곧 [동작 민주올레 20]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흑석길③)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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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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