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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흑석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뒤로하고 봉우리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심훈(1901~1936)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이 새겨진 심훈 문학비가 나타난다. 2014년 처음 심훈문학비가 들어설 때는 봉우리 반대편(흑석역 방면)에 있었는데, 지난해 말부터 이곳을 '효사정문학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놨다.
 
<효사정문학공원>에 설치된 심훈 좌상 이곳에 <효사정문학공원>이 조성되면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심훈의 좌상이 등장했다.
▲ <효사정문학공원>에 설치된 심훈 좌상 이곳에 <효사정문학공원>이 조성되면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심훈의 좌상이 등장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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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정근린공원의 일부를 '효사정문학공원'이라 새롭게 이름붙이면서 나타난 변화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은 물론 <첫 눈> <밤> <기적> 등 총 4편의 시를 각각 새긴 시비가 주변에 들어섰고, 한강이 잘 보이는 경관이 좋은 자리에는 심훈이 벤치에 앉아있는 형상이 설치됐다. 심훈과 나란히 앉아 한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마침내 심훈이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흑석 사람 심훈,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심훈은 이곳 흑석동에서 1901년에 태어났고, 인생의 상당부분을 이곳 흑석동에서 살았다. 심훈이 태어난 곳은 '효사정문학공원' 정상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있는 천주교 흑석동성당 자리다. 흑석동성당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있다.
  
<심훈생가 터> 표석 심훈이 나고 자란 흑석동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천주교 흑석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 <심훈생가 터> 표석 심훈이 나고 자란 흑석동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천주교 흑석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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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은 1920년 1월, 꽁꽁 얼어붙은 한강에서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 밑을 넘나들면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던 일을 일기에 남겨놓기도 했다. 지금은 지구온난화와 1980년대 한강 정비 과정에서 한강 하구에 설치한 수중보 때문에 겨울에도 일정 수위를 유지하면서 한강이 좀처럼 얼지 않지만, 한강변에 백사장이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한강은 여름에는 수영장이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었다.

그런데도 심훈을 기리는 일은 심훈의 고향인 동작구가 아니라 충남 당진에서 주로 이뤄졌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근대화의 와중에 주변을 챙기는 일을 외면하던 동작구를 대신해 소설 <상록수>를 쓴 필경사가 있는 당진(송악읍)에서 심훈을 기리는 사업을 벌였던 것. 지금도 당진에는 '심훈문학관'을 운영하고 있고 심훈문학상 시상과 심훈문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심훈을 기리는 일을 한 곳은 당진 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안산시도 심훈을 기리는 일을 했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야학을 하던 샘골이 안산에 있었고, 최용신의 무덤이 있는 안산시 본오동에는 '상록수공원'이 있다. 그곳에는 '최용신기념관'과 함께 '심훈문학기념비'도 있다. '상록수공원'에 가장 가까운 지하철 4호선 전철역 이름 상록수역도 심훈의 <상록수>에서 따왔다.

동작구가 뒤늦게라도 동작이 낳은 최고의 인물 심훈을 기리는 일을 시작한 것은 비록 겸연쩍은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훈, 독립운동에 나서다

심훈은 소설 <상록수>로 유명하다보니 소설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나서 감옥살이도 하고 중국 망명생활도 했다.

심훈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면서 퇴학당하지만, 심훈의 경기고보 동창의 면면은 참으로 화려했다.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은 심훈의 동기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일왕(일본 천황) 폭살계획 모의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해방된 이후인 1945년 10월까지 무려 26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은 심훈의 경기고보 1년 후배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3월 5일의 남대문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심훈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되어 있는 심훈과 심훈의 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는 독립운동가 심훈이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되어 있는 심훈과 심훈의 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는 독립운동가 심훈이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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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심훈은 서대문감옥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양한묵(천도교, 1862~1919)과 천도교경성교구장 장기렴의 순국을 목도하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불태우게 된다.

감옥에서 나와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던 심훈은 얼마 안 있어 중국으로 망명한다.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하고 만주 봉천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한 심훈은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우당 이회영(1867~1932)과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난다.

이회영과 신채호는 일제와의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절대독립론을 제창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무장투쟁론을 펼친 인물이었다. 이회영, 신채호와의 만남은 심훈의 사상 형성, 항일 문학작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심훈이 프랑스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중국 항주에 있는 지장대학에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는 엄항섭 등과 함께 공부하게 된 것도 두 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훈은 신채호 선생이 일제경찰에 잡혀 여순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 생각>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고, 단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6년 전 만났던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단재와 우당>이라는 수필을 남기기도 한다.

심훈, 연극과 영화에 빠져들다

심훈은 중국에서 3년간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23년에 귀국한다. 심훈이 비록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혁명가로서의 삶은 유보했을지 몰라도 이후 활동을 보면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 선생들에게 배운 비타협 정신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심훈은 중국 망명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국과 함께 '극문회'라는 연극연구단체를 결성해 활동한다. 심훈이 초기 연극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대중적 호소력'에 매료됐던 게 아닌가 한다.

이후 영화에 출연도 하고, 영화감독도 하고, 영화평론도 한다. 1925년에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장한몽>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이때 심훈은 직접 이수일 역으로 출연한다.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연재소설은 일반적으로 중요 장면에 삽화가 등장하는데, 영화소설은 진짜 영화배우들이 출연해서 연출한 사진이 나온다.

심훈은 <탈춤>을 완성하고 나서 영화 제작에 돌입하는데, 시나리오까지 완성했음에도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제작비에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결국 포기한다. 대신 신문기사에서 힌트를 얻어 하룻밤 만에 새로운 시나리오를 쓴다. 심훈의 감독 데뷔작인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홍식, 한병룡, 김정숙, 신일선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었다.

심훈의 <먼동이 틀 때>는 1927년에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원래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으로 추진했는데, 일제의 검열로 제목부터 바꾸게 됐다고 한다. 심훈의 <먼동이 틀 때>는 1938년에 <조선일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금까지의 무성영화 부문에서 5위(1위-나운규의 <아리랑>, 2위-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뽑히기도 할 정도로 두고두고 호평을 받았다.

소설 <상록수> 역시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직접 영화로 만들고자 뛰어다니던 중 1936년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심훈은 소설가보다는 영화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심훈이 만들지 못한 영화 <상록수>는 이후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1961년 작품은 신상옥 감독이 만들고, 최은희, 신영균, 허장강 등이 출연한다. 1978년 작품은 임권택 감독이 만드는데, 이때는 한혜숙, 김희라, 이일웅 등이 출연한다.
  
1961년 작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1961년 작 영화 <상록수>는 배우 신영균이 박동혁 역을, 배우 최은희가 채영신 역을 맡았다.
▲ 1961년 작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1961년 작 영화 <상록수>는 배우 신영균이 박동혁 역을, 배우 최은희가 채영신 역을 맡았다.
ⓒ 신상옥 감독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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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은 언론인이자 연극영화인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와중에 1926년 8월에 만들어진 '라디오드라마연구회'에도 참여한다. 1927년 5월에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극작가 입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입센의 <인형의 집> <유령>이 라디오드라마로 방송되는데, 심훈은 이때 입센의 생애를 드라마 시작 전에 발표하는 역할을 맡는다.

심훈은 라디오 강연도 많이 했다. 주로 여성들을 상대로 <부인과 독서> <영화와 여성> <예술가가 되려는 젊은 여성에게> 등의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인육재판>이라는 이름의 라디오드라마용 희곡으로 번안해 방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심훈은 방송인이기도 했다.

심훈, 소설 <상록수>로 이름을 날리다

심훈하면 누구나 쉽게 소설 <상록수>를 떠올리게 되지만, 앞서 몇 편의 소설을 더 쓴다. 영화소설 <탈춤>도 있었지만, 1930년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한 것이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일제의 검열로 연재가 중단된다.

<동방의 애인>은 심훈 자신의 중국 망명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썼는데, 경성, 상해, 모스크바, 동경 등을 무대로 하는 스케일이 제법 큰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김동렬-강세정)이 유명한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심훈의 친구였던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서 <불사조>를 새로 연재하지만, 이것 역시 일제의 검열에 걸린다. <불사조>는 일제에 맞선 옥중투쟁 장면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1933년에는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 1934년에는 장편소설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특히 <직녀성>은 심훈 자신의 아픈 경험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심훈이 처음 결혼하는 건 1917년 경성고보 3학년 시절이었는데, 결혼 상대자는 철종의 후손인 조선 왕족 이해영이었다. 심훈은 봉건적인 인습에 얽매여 자신과 결혼한 부인 이해영에 대해 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소설 <직녀성>은 바로 이 봉건적 인습에 얽매여 결혼한 여성의 아픔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심훈은 이 작품에서 결혼,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억압과 차별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남녀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심훈의 대표작인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은 실제로 안산 샘골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1935년 1월에 과로로 죽은 인물이다. 남자 주인공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로 당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심재영이 모델이었다는 설도 있고, 최용신의 실제 약혼자였던 김학준이 모델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는 그 둘을 합친 게 박동혁일 것이다.

소설 <상록수>를 쓴 곳은 당진 송악면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인데, 심훈이 당진으로 내려간 1932년에 쓴 소설 <직녀성>의 원고료로 본인이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고 한다. '붓으로 밭을 가는 집'이라는 뜻의 필경사는 지금도 부곡리에 남아 있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과 <고향은 그리워도>

심훈은 자신을 시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불후의 명작 <그날이 오면>을 남긴다. <그날이 오면>은 1930년 3.1만세운동 11주년을 기념해서 지은 항일 저항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과 원산노동자총파업, 용천소작쟁의 등도 <그날이 오면>을 짓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을 담은 심훈 문학비 <효사정문학공원>에는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 등 4개의 시비가 설치되어 있다.
▲ <그날이 오면>을 담은 심훈 문학비 <효사정문학공원>에는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 등 4개의 시비가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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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이 얼마나 조선의 독립, 민족의 해방을 절절히 열망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다. 심훈은 1932년도에 그동안 쓴 시를 모아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시집 출판을 시도한다.

그런데 일제의 검열이 또 말썽이었다. 이곳저곳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심훈은 차라리 출판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다. 결국 시집 <그날이 오면>은 심훈이 그렇게 열망했던 해방이 된 후인 1949년에야 출판된다. 시집 <그날이 오면>에는 심훈의 고향 흑석리를 그리워하는 시도 있다. <고향은 그리워도>가 대표적이다.

나는 내 고향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너머련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5대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이 든 그 산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잡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취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심훈의 흑석동 집 후원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나 보다. 손수 가꾸던 화단도 있었던 것 같다. 개나리 울타리에 꽃피던 뒷동산이 있던 흑석동은 1930년대 당시 신혼부부의 선망의 대상이던 문화주택도 등장하고, 지금의 효사정 자리에 있던 신사(한강신사 또는 웅진신사)도 등장하면서 변해간다.

고향에 대한 실망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고향은 그리워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해방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고향은 그리워도>는 역시 심훈다운 시라고 할 만하다. <고향은 그리워도>가 '효사정문학공원' 시비에 새겨지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효사정문학공원, '일색화'의 아쉬움

뒤늦게 심훈을 기리는 일을 하다보니 나타난 역편향일까. '효사정문학공원'에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그날이 오면> <첫 눈> <밤> <기적> 등 4개의 시비가 다 심훈의 시로 채워져 있다.

효사정문학공원이 심훈의 시로 '일색화'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운 대목이다. '일색화'는 아무래도 위험하다. 지난 회에 소개한 신석정 시인의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정주에게>도 이곳 '효사정문학공원'에 시비로 새겨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석정 만이 아니라 흑석동을 노래한 윤중호의 <흑석동 김씨>나 이시영의 <후꾸도> 같은 시도 좋다. 여기에 조선시대 이래 유명 문인들이 남긴 다양한 문학작품이 함께 어우러져 한강변을 따라 조성될 <시인의 길>과 결합할 수 있다면 보다 풍성한 <문학공원>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효사정이 있는 곳은 일본신사가 있던 곳
<효사정문학공원> 위에는 효사정(孝思亭)이 자리 잡고 있다. 효사정은 최고의 한강 조망명소 중 하나이다.
 
효사정은 조선 초기 인물 노한(1376~1443)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른 후 시묘한 자리에 처음 세웠는데, 성종 때 사라졌다가 500년 후인 1993년에 지금의 자리에 재현해 놓았다. 실제 효사정이 있던 자리가 이곳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효사정의 모양도 옛 사람들이 남긴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효사정이 있는 자리는 심훈의 시 <고향은 그리워도>에도 등장하듯이 일제강점기에는 한강신사(또는 웅진신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월파정, 용양봉저정 등 경관이 좋은 곳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이 곳 효사정 자리는 일본신사까지 들었던 것이다.
   
한편, 이곳에서는 1950년대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군의날 행사의 하나인 에어쇼를 관람하기도 했다.
 
한강신사 지금 효사정이 있는 곳은 일제 강점기 한강신사가 있던 곳이다.
▲ 한강신사 지금 효사정이 있는 곳은 일제 강점기 한강신사가 있던 곳이다.
ⓒ 일제강점기 당시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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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동작 민주올레 21]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흑석길④)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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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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