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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흑석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흑석동에 있는 공립 은로초등학교의 전신은 1908년에 세워진 사립 은로학교다. 흔히 대한제국기 유길준(1854~1914)이 지은 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유길준이 중심이 돼 과천군 하북면(1914년 이후 시흥군 북면)의 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면립학교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면장이 설립자 또는 교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은로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노량진 본동에 있었는데, 1940년 흑석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현재의 은로초등학교 은로초등학교는 1908년에 세워져 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 현재의 은로초등학교 은로초등학교는 1908년에 세워져 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 은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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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유길준과 은로학교

은로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유길준은 대표적인 개화론자였다. 유길준은 개화파의 아버지격인 박규수의 문하에서 신학문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떴고, 김옥균과 김홍집, 박영효와 홍영식 같은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박규수가 죽은 후에는 실학자이자 시인인 강위의 문하에 들어가는데, 이때 온건 개화파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김윤식과 어울리면서 급진 개화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유길준은 1881년 조사 시찰단 단장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 의숙에 머물면서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유길준은 1882년 일본에 온 박영효의 통역을 담당하다 함께 조선에 돌아오고, 이번에는 민영익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간다. 이때도 유길준은 임무를 마친 후 귀국하지 않고 보스턴대학에 들어가 두 번째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유길준의 학비를 조선 정부가 냈으니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유길준의 유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고종이 개화파와 결별하게 됐고, 그 여파로 유길준의 유학비용 지원이 중단된 것이다. 유길준은 유럽을 돌면서 견문을 넓히고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에 귀국한다. 유길준은 갑신정변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했다는 이유로 귀국 직후 체포돼 1892년까지 7년간 연금 당한다. 이때 유길준은 자신의 유학생활과 유럽탐방 경험을 살려 자신의 경세관을 담은 <서유견문>을 집필하면서 울분을 달랜다.

유길준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연금에서 풀려나 2년이 지난 1894년 갑오내각이 들어섰을 때다. 그는 군국기무처의 구성원이자 의정부 도원으로서 각종 개혁안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데 주력했다. 이어 을미사변으로 만들어진 을미내각에서는 내부대신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개화사상을 펼쳐나간다.

이때 서재필과 협의한 끝에 독립신문의 창간을 정부예산으로 지원한 것도 유길준이었다. 단발령이 선포될 때는 고종과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는 역할을 맡기도 하고,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익현과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 유길준이었지만,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다시 위기에 몰린다. 내각을 이끌던 김홍집은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성난 군중에게 던져져 난도질당하는데, 유길준은 체포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조선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까지 꾸미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의 한 섬에 4년간 유배당하기도 하는 유길준은 1907년에야 다시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 위기에 몰렸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총리대신에게 정미7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일본 신문에도 특별 기고를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것을 순종이 높이 산 덕분이었다.

이렇게 귀국한 유길준은 이제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포기하고, 노량진 본동에 있는 용양봉저정을 하사받아 살면서 은로학교를 비롯하여 계산학교, 노동야학회 등 교육기관을 세우는가 하면 실력양성론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아 흥사단도 설립한다.
 
유길준과 은로학교 전경(1926. 10. 4, 동아일보) 동아일보가 보도한 기사에 유길준의 얼굴 사진과 은로학교의 전경이 담긴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 유길준과 은로학교 전경(1926. 10. 4, 동아일보) 동아일보가 보도한 기사에 유길준의 얼굴 사진과 은로학교의 전경이 담긴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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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과 하북면 주민들, 은로학교를 함께 세우다

이제 유길준은 '대한제국이 개혁에 실패하게 된 것은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였으니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한 애국계몽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면내 각 리(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를 지역 유지인 유상준 등과 함께 매일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한다. 유길준은 은로학교를 설립할 때 용양봉저정의 부속 건물 일부를 허물어 건자재를 대기도 한다.

하북면 주민들은 의연금을 내기도 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 과정에 부역으로 참여하기도 하면서 은로학교 건립의 한 주체로 참여한다. 이렇게 해서 은로학교는 800여 평 대지에 40여 간의 교실을 갖춘 명실상부한 면립학교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4월 15일 정식 인가를 받을 때의 설립자는 면장 박교원, 초대 교장은 유길준, 총무와 회계는 배선영과 이원시였다.
 
은로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사진 중앙에 앉은 사람이 유길준인 것으로 보여 사진에 1915년이라 찍혀 있음에도 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이 사망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은로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사진 중앙에 앉은 사람이 유길준인 것으로 보여 사진에 1915년이라 찍혀 있음에도 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이 사망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은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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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로학교, 위기에 빠지다

은로학교는 초창기에는 주민들의 갹출과 노들나루 도선료 수익금의 1/3을 학교운영비로 투입하면서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1917년 한강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재정상 어려움에 빠지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보다 앞선 1914년에 2대 설립자로 있던 유길준이 사망한 것도 은로학교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정미7적의 한 명인 조중응(1860~1919)이 3대 설립자로 취임한 것이다. 여기에 유길준과의 갈등으로 총무직에서 물러났던 배선영이 1918년 교장에 취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결국 은로학교는 1920년에 이르면 제8회 졸업식을 그해 6월에야 가까스로 치르고 9월에는 학교 문을 닫고 만다.

은로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학교 교육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열기가 고조된 1922년의 일이다. 처음에는 대종교를 내세워 다시 열기 위한 시도도 하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지역주민의 힘으로 만든 노량진교육회(회장 이석진, 총무 이원시)가 은로학교를 후원하는 중심 역할을 하면서 다시 열게 된 것이다. 이후 은로학교는 꾸준히 300여 명의 학생수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1934년의 학생수는 363명(남-269, 여-94)에 이르렀다.

그런데 은로학교의 위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23년 교장 배선영이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학교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학교 대지와 건물을 담보로 일본인 삼정길(森政吉)에게 2000원의 빚을 진 사실이 밝혀지면서 은로학교는 풍파에 휩싸이게 된다. 1920년 학교가 폐교되면서 면민들의 관심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학교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교장 배선영이 몰래 자신의 명의로 바꿔 놨던 것이다. 

시흥군 북면 사람들, 면민대회를 개최해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다

이렇게 되자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면민대회를 소집해 면민들의 힘을 모으는 방식으로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선다. 우선 면민 공동으로 1000원을 모금하고 해동은행에서 1000원을 차입하여 2000원의 빚을 갚는다. 이어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학교 명의를 '면민 공동소유'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교장 배선영이 일방적으로 학교의 땅과 건물을 담보로 또다시 빚을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배선영은 '면민 공동소유'가 법적으로 불가능함을 내세워 명의이전 요구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면민들은 이번에는 소유권을 배선영 한 명이 아니라 공동설립자로 되어 있는 유억겸(유길준의 아들), 이응삼(본동리 대표), 차정환(노량진리 대표)을 포함한 4명이 분할 소유하게 해달라는 소송까지 걸었지만, '분할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역공한 배선영의 농간으로 이마저도 기각당하고 만다.

하지만 시흥군 북면 사람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면민들은 노량진교육회를 비롯한 지역의 8개 단체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다시 면민대회를 열어 배선영을 포함한 유억겸, 이응삼, 차정환 등 4명의 설립자가 동반 사퇴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믿을 수 없는 배선영을 몰아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뻔뻔한 배선영은 이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면민들은 다시 소송에 돌입하는데, 불안감을 느낀 배선영은 1928년에 이르면서 다시금 은로학교 대지와 건물을 일본인 사택(寺澤)에게 저당 잡혀 2000원을 빌린 다음, 용산에 사는 또 다른 일본인 금정(今井)에게 2500원에 몰래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다. 

이 사실을 안 면민들은 배선영을 '배임횡령죄'로, 금정을 '장물고매죄'로 고소한다. 그러나 면민 소유임에도 소유권이 배선영 개인 명의로 돼 있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배임횡령죄'나 '장물고매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다.
  
시흥군 북면 사람들의 면민대회 개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28. 10. 30)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면민들의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교장 배선영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 시흥군 북면 사람들의 면민대회 개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28. 10. 30)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면민들의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교장 배선영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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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늘의 뜻이었을까. 은로학교를 산 일본인 금정은 2주 만에 급사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배선영마저 갑자기 죽는다. 교장 배선영과 면민들 간에 벌어진 6년여의 갈등은 결국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이 과정에서 북면 사람들이 면민대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면서 은로학교를 살리기 위해 보여 준 모습은 요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마을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의 경험을 발판으로 은로학교를 실질적인 면민 공동소유로 만들어내고자 한 시도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은로학교는 지역주민들의 '복합 교육문화 공간'

사실 은로학교는 시흥군 북면 취학아동의 교육기관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은로학교는 노량진청년회·용흥청년회 같은 지역단체와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시흥지국 같은 언론단체들의 강연회, 주민 위안공연 등 각종 행사가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고, 노동야학-부녀야학을 비롯하여 정식 교육을 받기 힘든 노동청년이나 여성들의 야학공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북면 사람들의 '복합 교육문화 공간'이었다.

이때 저명 인사들이 강연을 위해 은로학교에 오기도 한다. 동아일보시흥지국에서 주최한 '독자위안대강연회'(1926. 2. 27)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한위건이,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시흥지국이 후원한 '하계남녀강연대회'(1926. 8. 14)에서는 경성청년연합회의 백신애(여성해방과 경제조건), 박원희(우리의 사명)가, 같은 해 '추계강연대회'(10.18)에서는 유각경(우리는 배움으로 나가자)과 홍병선(YMCA, 교육과 조선의 장래)이 은로학교를 방문한다.

용흥청년회가 주최한 '춘계강연회'(1928. 6. 2)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과 당시 최고의 인기 잡지였던 <개벽>(천도교 발행) 편집인 이돈화 등이 은로학교대강당에서 연사로 나선다.

은로학교에서는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문화프로그램도 여러 차례 개최됐다. 특히 '납량 활동사진 대회'(동아일보시흥지국 개최, 1927)라는 이름의 영화 상영회는 인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3일간의 상영을 마친 후 2일을 더 연장하여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때 상영한 영화가 조선영화라는 것 외에 구체적인 영화 제목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다. 1934년에는 극작가이자 영화인으로 만담가이기도 했던 윤백남을 초청하여 '독자위안 야담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납량 활동사진 대회'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7. 8. 8) 보도에 따르면 이때 시흥군 북면에서는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 "납량 활동사진 대회"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7. 8. 8) 보도에 따르면 이때 시흥군 북면에서는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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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은로로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았던 이경응씨는 노동야학을 창립하여 20여 명의 지원자를 확보, 야학을 시작했다. 1929년, 노동야학에 참여하는 아동 수가 무려 240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밖에 은로학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수해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분향소가 설치돼 추모객들의 통곡이 이어진 장소도 은로학교였다. 

이 정도면 은로학교는 지역사회에서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교육기관이었다고 할만 하다. 오늘날 지역사회 활성화를 위해 마을과 학교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확산되고 있는데, 그 고민을 푸는 열쇠를 바로 일제강점기 은로학교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아닐지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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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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