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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흑석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마치 거대한 성채 같은 <조선일보> 사장 저택
 
조선일보 뉴지엄 입구 조선일보 뉴지엄은 2003년에 흑석동에 들어섰다. 뉴지엄 뒤편에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저택이 있다.
▲ 조선일보 뉴지엄 입구 조선일보 뉴지엄은 2003년에 흑석동에 들어섰다. 뉴지엄 뒤편에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저택이 있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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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역에서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현충원 방면으로 가다 보면 고개(비계)를 넘기 직전, 붉은 벽돌의 조선일보 뉴지엄이 기다리고 있다.

뉴지엄 뒤편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이태원 저택을 물리치고 한때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으로 발표된 적이 있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저택도 있다. 높은 벽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도심 속 거대한 성채를 보는 듯하다.

원래는 지금의 조선일보 뉴지엄 자리도 방상훈 사장 저택의 일부였다. 오른편에 새로 만들어진 아파트(흑석한강 센트레빌)를 자세히 보면 방향이 정남향이 아니고 45° 정도 틀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건립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에 대한 소송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사장 저택은 2명의 전직 대통령이 방문해 만찬을 즐긴 곳이기도 하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 첫 유세를 마치고 긴장을 풀려고 했는지 이곳에 와서 방일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과 술판을 벌였다. 1992년 대선 다음날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손명숙 여사와 함께 방우영 회장 부부의 초청으로 방문해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뉴스박물관, 조선일보 뉴지엄

조선일보 뉴지엄이 이곳 흑석동에 개관한 것은 2003년 3월이다. 뉴스박물관이라는 뜻을 담아 미디어체험관과 조선일보역사기념관으로 구성돼 있다. 미디어체험관은 초·중학생들의 기자체험, 방송체험 코스로 인기가 높다.

조선일보역사기념관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조선일보의 자취를 통해 신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학습하는 교육의 장"이자, "조선일보가 이겨냈던 수많은 시련과 발전과정을 음미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전시 공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기념관은 <고난과 극복> <혁신> <스페셜코너> <활자시대> <조선일보 사람들> <역사적 보도> <조선일보 캠페인> 등 6개 코너로 구성돼 있다.
조선일보역사기념관 내부 전시도 조선일보역사기념관은 <고난과 극복>, <혁신>, <스페셜코너>, <활자시대>, <조선일보 사람들>, <역사적 보도>, <조선일보 캠페인> 등 6개 코너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 조선일보역사기념관 내부 전시도 조선일보역사기념관은 <고난과 극복>, <혁신>, <스페셜코너>, <활자시대>, <조선일보 사람들>, <역사적 보도>, <조선일보 캠페인> 등 6개 코너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 조선일보 뉴지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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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이 <조선일보>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돼 있는지에 대해선 비판적인 의견이 많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역사에서 끊이지 않는 친일논란과 독재에 부역했다는 논란을 교묘히 회피하고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는 지적까지 있는 실정이다.

친일 논란, <조선일보>는 이렇게 회피하고 있다

우선,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의 친일논란에 대한 역사는 아예 다루지 않고 있다.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해 중흥을 이끈 방응모의 친일논란에 대해서는 '은유법'을 활용하여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로 처리하고 만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현 사주인 방씨 집안과 전혀 관련이 없는 대정실업친목회(아래 대정친목회)의 기관지로 출발했다. 일제는 1919년 3.1혁명 이후 무단통치만으로는 식민지 지배가 쉽지 않다고 보고, 민족분열통치의 일환으로 3개 신문사(<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발간을 허용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사람들>에서는 대정친목회와 사장단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만, 대정친목회가 어떤 단체인지, 사장 조진태와 발행인 예종석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있다.

대정친목회는 당시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대정이라는 말 자체가 1912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연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1916년에 생긴 대정친목회는 일제 무단통치기 유일한 조선인 단체로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참여해 조선 민중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잘 순응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단체였다. 초대회장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정미7적의 한 명인 조중응이었고, <조선일보>의 초대 사장인 조진태나 발행인 예종석 역시 대정친목회의 핵심 멤버였다.

<조선일보>는 초기에 반일적 논조 때문에 1920년대만 네 차례 정간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조선일보>가 마치 민족 정론지였던 것처럼 호도하는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초기에 민족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3.1혁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초대 사장인 조진태를 강제 퇴진시킬 정도로 반일적이었던 기자들 때문이었지 설립자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조선일보>가 민족적인 성격을 크게 강화하는 것은 1924년 민족주의자 신석우가 두 번째 사주 친일파 송병준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월남 이상재 선생이 사장을 하면서부터다. 이때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사회주의자 박헌영과 김단야 등이 기자로 대거 참여하고, 민족주의자 안재홍은 조선일보 주필로 활약한다.

그 결과 1927년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할 때 <조선일보> 관계자들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32년에는 조만식 선생이 사장을 맡는 등 <조선일보>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한동안 지속됐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은 1933년이다. 방응모는 금광에서 번 돈으로 신문을 인수했는데, 광산에 뛰어들기 전에도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역임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언론에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응모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인면맹 발기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도 역임하고 자신이 발간한 잡지 <조광>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글도 많이 냈다. 그뿐만 아니라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33년부터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기관총 구입비 명목으로 1600원을 기부한 사실도 있어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인물이다.

하지만 기념관에서는 방응모의 친일 행위와 관련된 사실을 찾을 길이 없다. 1930년대 후반 일본천황의 사진을 1면 톱으로 대서특필했던 신문기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념관 입구에는 방응모가 함경도에서 조림사업을 하면서 "내가 지금 하는 이 사업은 내 개인의 이(利)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이 민족과 국가 전체를 위해서 벌이는 사업이다"라고 한 말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일보 사람들> 입구에는 시인 홍사성이 쓴 <방응모 편>을 발췌하여 크게 전시하고 있는데,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던 방응모를 욕하지 마라, 친일을 할 수밖에 없던 당시 시대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기념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홍사성의 글 <방응모>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역사기념관에서 방응모의 친일논란에 대해 '은유법'을 동원하여 회피하고 있다. 마치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한 불가피한 행위가 친일이었던 듯 묘사되고 있다.
▲ 기념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홍사성의 글 <방응모>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역사기념관에서 방응모의 친일논란에 대해 "은유법"을 동원하여 회피하고 있다. 마치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한 불가피한 행위가 친일이었던 듯 묘사되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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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에 부역, <조선일보>는 이렇게 회피하고 있다

기념관은 독재정권 시기 권력과 유착해 민주주의를 배반했던 역사 역시, 반성은커녕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조선일보>를 독재에 맞서 언론자유를 추구한 정론지로 부각시키고 있다. 기념관은 그 증거로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에 대해 당당하게 '쿠데타'로 표현했다면서 당시 신문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미국조차도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고, 쿠데타의 성공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일보가 '쿠데타'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반면, 기념관에서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매도했던 신문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광주학살을 제대로 보도하지도 않은 채, 전두환 일당을 찬양하기에 급급했던 1980년 당시의 신문기사는 아예 전시하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무정부 상태, 과격파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신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학살당한 광주의 진실을 호도하고 있고, '시위선동 남파간첩'이 배후에 있는 양 기사를 구성하고 있다.
▲ 1980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무정부 상태, 과격파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신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학살당한 광주의 진실을 호도하고 있고, "시위선동 남파간첩"이 배후에 있는 양 기사를 구성하고 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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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내내 전두환 군사정권과 유착해 있던 관계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조선일보>가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와 달리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사정도 기념관은 알려주지 않는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1991년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당시 앞장서서 사실인 양 권력자들을 비호하고 민족민주운동을 매도했던 기사 역시 전시돼 있지 않다.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강기훈에게 한마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김지하의 글을 실은 조선일보(1991. 5. 5) 조선일보는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젊은이들의 죽음을 왜곡하고 매도하는 기사를 연이어 실었다.
▲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김지하의 글을 실은 조선일보(1991. 5. 5) 조선일보는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젊은이들의 죽음을 왜곡하고 매도하는 기사를 연이어 실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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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다르게 말하는 것도 역사왜곡이지만, 중대한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도 역사왜곡의 한 형태다. 조선일보 뉴지엄의 조선일보역사기념관은 거대한 언론자본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고, 어떻게 사실과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역사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 장재성을 기억하다

그렇다고 조선일보역사기념관이 볼만한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념관에는 사당동 3.1공원과도 인연이 있는 조선 최초의 민간신문 여성 기자 최은희의 경성라디오 시험방송 장면과 <조선일보>가 1935년에 구입했다는 언론사 전용 취재비행기 모형도 전시돼 있다. <스페셜 코너>에 전시돼 있는 이승만에서부터 이명박으로 이어진 역대 대통령의 휘호도 볼만하다. 만해 한용운, 소설가 최인호 등 유명인사의 육필원고도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신문 기사 중 특기할 만한 부분도 있다. 1929년 당시 광주학생운동을 전하는 기사인데, 광주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장재성(1908~1950)의 사진이 크게 새겨져 있다. 장재성은 구속자 중 4년형을 언도받아 가장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한 것도 모자라 이후 소학교 교사를 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인물이다.
  
광주학생운동 재판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30. 2. 15) 가운데 둥그런 타원형 안이 장재성이다. 조선일보도 동아일보 못지 않게 당시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전했으며, 조선일보에도 장재성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기념관에는 그 기사가 담긴 신문이 크게 전시되어 있다.
▲ 광주학생운동 재판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30. 2. 15) 가운데 둥그런 타원형 안이 장재성이다. 조선일보도 동아일보 못지 않게 당시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전했으며, 조선일보에도 장재성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기념관에는 그 기사가 담긴 신문이 크게 전시되어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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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재성이었지만, 1962년 처음으로 독립유공자를 대규모로 선정할 때 선정 여부로 논란을 빚다가 결국 제외된다.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장석천(1903~1935), 조길룡(1909~1991) 등 다른 동료들은 이미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유독 장재성만은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장재성이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에 속해서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다 1948년 구속돼 7년형을 언도받고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 직후에 법적 절차도 없이 처형당한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장재성은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진 우리의 아픈 역사 때문에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더불어 독립운동 경력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한 죽음까지 감내해야 했던 인물이다. 조국의 해방과 통일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던 장재성의 신원은 언제나 이뤄질 수 있을지, 조선일보역사기념관에서 갖는 상념치고는 너무 고약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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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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