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3 09:35최종 업데이트 18.11.13 12:01
나는 한 달에 한 번씩은 술 기행을 떠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로 술 기행을 떠난다. 그렇게 해오기를 10년이 되었다.

올해 기억나는 여행은 제주 고소리술익는집, 제주맥주, 한라산소주, 제주샘주로 이어지는 1박2일 술 기행,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가는 울진술도가와 포항 동해명주와 울산 복순도가와 울산 트레비어로 이어지는 1박 2일 술 기행, 일본 니이가타 사케노진 축제 3박4일 술 기행, 중국 황주의 고장인 소흥으로 떠난 5박6일 인문 기행이었다.


글감을 찾고 싶어 낯선 풍경 속을 떠돌다 여행기를 쓰게 되고, 여행 길에 우연히 들어간 양조장에서 술 향기에 취해 술 전문가가 된 게 지금의 나의 처지다. 이제 나의 대부분의 여행은 술 기행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술 기행이 물리지 않으니,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인지 술이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당일 술 기행의 경우는 서울에서 출발하다보니 대전 아래로 내려가기 어렵다. 경상도나 전라도를 가려면 1박2일로 술 기행을 기획한다.

1박2일로 가게 되면 하루에 두 곳씩, 이틀에 네 곳의 양조장을 찾아가서 시음한다. 첫날 점심과 저녁, 다음날 아침과 점심까지 네 끼 식사를 하는데, 그때도 반주로 술을 마신다. 밥맛보다는 술맛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여행이라 반주는 반드시 식전에 나온다.

첫날 여행을 마친 저녁에도 함께 모여 술을 마신다. 그래서 1박2일 동안 모두 아홉 번의 술을 마실 기회가 생긴다. 술자리는 의무는 아니고 선택이며, 술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때 내가 제시하는 특별한 조건은, 아홉 번째로 술을 맛보게 되는 마지막 양조장을 찾아갔을 때까지 미각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미각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잃게 되니, 절대 취하지 않을 만큼 마시라는 게, 내가 이끄는 술 기행의 조건이다. 이것을 어기면 다시는 함께 여행할 수 없다는 것도 제시한다.

술 기행은 참 기이하다. 술만 마시러 다니다니. 그런 여행이 어딨고, 그런 삶이 어딨나 싶다. 이태백도 김삿갓도 그러진 않았으리라. 이태백은 시를 얻기 위해서 술잔을 들었을 테고, 김삿갓은 세상을 버렸기 때문에 술잔을 들었을 것이다. 세상을 버린 것도, 시를 짓는 것도 아니면서 술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얼까? 내게 다시 물어본다. 술 기행은 다닐 만한 것인가라고.

술 기행의 매력
 

경북 영천 고도리와이너리를 찾아가서 포도주 빚기 체험을 하다. ⓒ 권나경

 
술 기행은 사람 기행이다. 술을 마시는 동안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일본 니이가타로 술 기행을 갔을 때 예정했던 인원 15명을 훌쩍 넘어 25명이 되고 말았다. 통솔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했는데 돌아오는 날에는 25명이 어찌나 친해져 한 덩어리가 되었는지 마치 5명 정도가 함께 여행한 느낌을 받았다.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스스럼없이 친해진다. 술 자리가 길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게, 술 기행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양조장엘 들어서면 술을 빚는 장인을 만나게 된다. 자기만의 술을 만들고, 그 술로 이름을 얻기까지 긴 시간이 걸려서일까. 술 빚는 장인들은 고집스럽다. 그들만의 기술과 습관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묵묵히 제 길을 걸어온 장인을 이해하게 된다.

양조장이 들어선 마을과 양조장 건물을 보는 것도 술 기행의 묘미다. 주전자 들고 술을 받으러갔던 시절의 막걸리 양조장들은, 마을 중심지인 면사무소나 보건소 옆에 있다. 양조업은 한번 이름을 얻으면 대를 이어간다. 외국 양조장의 경우에서도 100년 이상 된 곳을 흔히 보게 된다. 성당처럼 오래도록 그 기능이 달라지지 않은 양조장 건물들이 제법 눈에 띈다.
 

울산 복순도가를 찾아간 외국인들 ⓒ 권나경

 
술 기행의 최고가는 기쁨은 역시 술맛을 보는 것이다. 술이 태어나는 곳에서 술을 만든 사람의 눈빛을 보며 술을 맛보는 즐거움이라니! 음식도 요리사가 직접 내오고 설명까지 해주면 두 배는 더 맛있다. 그런데 양조한 사람이 직접 술을 건네주고 질문까지 받아주면 세 배는 맛있다.

음식은 눈으로 먼저 들어와 맛을 감지할 수 있지만, 술은 액체라 가늠되는 게 별로 없다. 직접 만든 사람의 설명이나 전문가의 소개를 받으면 맛은 앰프를 거치는 것처럼 증폭된다. 증폭된 술맛은 내 몸과 미각과 후각을 울리는 현이나 다름없다. 코로 향을 맡고 입으로 맛을 받아들이면 내 몸이 술로 채색된다. 술은 마음을 움직이는 기묘한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양조장들은 술을 사러오는 사람은 환대하지만, 양조장을 구경하고 견학하겠다는 사람은 환대하지 않는다. 술은 어두운 곳에서 혼자 익어가는데 발효실이 오염될 수 있고, 흠이 잡히거나 기술이 노출될지 몰라서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손님을 맞이하려면 시음장, 견학로, 판매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이 제조 공간만을 가지고 있다.

기꺼이 문을 열어준 양조장 사람들이 고맙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행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술 기행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술맛이 좋으면 만족도가 급상승하고 모든 불만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옹색하고 누추하더라도, 어수선하고 복잡하더라도, 하물며 환대하지 않더라도 그 맛을 향해 양조장을 찾아간다.

찾아가는 양조장

내가 술 기행을 처음 기획하여 진행하였을 때는 알음알음으로 양조장 대표를 소개받아 양조장을 보여 달라고 읍소를 해야 했다. 시음비도 내겠다고 먼저 말해야 했다. 하지만 요사이는 사뭇 달라졌다. 스스로 문을 열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고, 기꺼이 무료 시음 술을 내놓으며 홍보에 적극성을 보이는 양조장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선정한 '찾아가는 양조장'이 34개나 생겨, 시음장과 견학로를 갖춘 양조장들이 더해지고 있다.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된 34개의 양조장 지도 ⓒ 막걸리학교

 
여행은 건강해야 다닐 수 있다. 술 또한 건강해야 즐길 수 있다. 젊은 날은 호기로 술을 마실 수 있지만, 나이 들수록 체력이 더 우선한다. 마음이 편해야 여행을 떠나듯이, 술 또한 여유가 있어야 맛을 즐길 수 있다. 오늘 술 기행을 떠날 수 있다면, 당신은 편안하고 건강하다는 징표다.

술에는 많은 것이 녹아있다. 술을 잉태한 자연이 있고, 장인이 있고, 전통이 있고, 무엇보다 맛과 향이 있다. 술 속에 세월이 녹아있고, 한 시대의 표정이 녹아있다는 것까지 눈치챈다면, 술 기행을 즐길 만하다. 무엇보다도 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어디에든 있어서 좋다. 술은 유일신을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면 어디든지, 돌아앉은 신처럼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술 기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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