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3 18:43최종 업데이트 18.11.13 18:43
 

당시 부산경찰서 사진. 박재혁 의사 의거당시 부산경찰서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성공이다. 대성공이었다. 
의열단이 창단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성공한 의거였다. 

그것도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수준이 아니라 서장실에 들어가서 그의 면전에 폭탄을 던진, 대범함과 의기를 함께 보여준 쾌거였다. 일찍이 독립운동사에 적의 소굴에서 적장을 처단한 사례가 없었다.


두 발의 폭탄 터지는 소리에 부산경찰서는 혼비백산이 되고 초비상이 걸렸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이래 그들 요인을 노리는 일은 더러 있었으나 경찰서에서 폭탄을 폭파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그것도 경찰서장실이라는 겹겹의 요새에서 일이 벌어졌다. 언론인 송건호의 기록이다.

바로 이때였다. 박재혁은 책 밑에 감추어 두었던 폭탄 두 개를 꺼내어 한 손에 한 개씩 들고 외치듯 말했다.

"나는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의 소행으로 이번에 우리 동지들이 모두 구속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네놈들은 우리의 원수다. 죽어 마땅한 줄을 네놈들도 알고 있겠지" 라고 유창한 일본말로 준엄히 꾸짖었다. 
  

1920년대의 부산경찰서 모습 왼쪽 건물은 일본거류민사무소, 가운데 건물은 부산이사청, 오른쪽 건물이부산경찰서.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서장은 새파랗게 질려서 말도 못하고 다른 졸도 중 하나가 달아나려 했다.

그때 박재혁은 들었던 폭탄을 서장 앞 책상 위에다 내리쳤다. 두 개 다 계속 내리쳤다. 폭탄은 다행히 두 개 다 폭발되었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책이며 책상 할 것 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창문과 마룻바닥도 출입문도 벽도 부서졌다. 물론 서장과 두 졸도들도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이 폭음에 놀라 바로 옆방과 아래층에서 많은 졸도들이 뛰어올라왔다. 박재혁도 물론 크게 부상당해 쓰러졌다. 9월 14일이었다. (주석 1)

박재혁이 김원봉에게서 폭탄 2개를 받아온 것은, 하나는 적의 처단용이고 나머지는 자폭용이었다. 그러나 자폭용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박재혁은 폭탄 2개를 연달아 폭파시켜 적을 죽이고 자신도 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어떠한 의거 못지않은 장렬한 모습이었다. 

하시모토는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절명하고 두 일인 경찰은 오랫동안 입원치료 후에 살아나기는 했으나 불구가 되었다.

박재혁은 현장에서 하시모토가 쓰러지고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신도 오른쪽 무릎을 크게 다쳐 피신하려도 온 몸에 파편이 터져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2층의 서장실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지만 처음부터 피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악귀들처럼 달려드는 일본경찰에 당당하게 피체되었다.  

부산경찰서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최천택은 폭탄이 터진 후 10여 분이 지나도 박재혁이 뛰쳐나오지 않자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황급히 좌천동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폭탄을 던진 후 혼란 틈에 박재혁이 나오면 함께 피신하기로 약조했던 터였다.
  

박재혁 의사의 친구 최천택 사진. 박재혁 의사 비 옆에 앉아있는 최천택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최천택이 자기 집에 돌아와 40여 분이 지난 후 부산경찰서 형사들이 몰려와 그도 피체되고, 같은 시각 오탁과 김영주도 붙잡혔다. 일경은 이들 외에도 경찰서 부근을 지나던 부산시민 다수를 혐의를 씌워 구속하였다. 

살기등등한 이들은 경찰서 부근을 지나던 행인ㆍ상인 등 젊은이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반항을 하면 구둣발로 차고 총검으로 위협하여 유치장에 몰아넣었다. 유치장은 영문을 모르고 붙잡힌 사람의 신음소리와 통곡소리가 범벅이 돼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2층 사무실에는 급보를 받고 달려온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의 오무라 검사장ㆍ호리다 검사 등 판ㆍ검사와 경찰 수뇌가 모여 밤늦도록 무엇인가 대책을 의논했다.

이 회의에서 어떤 중대 결정이 내려졌는지 알 수 없으나 15일 아침부터 형사들의 취조가 시작됐다. 

전날 붙잡은 수많은 청년들은 성명ㆍ주소 인상착의 등을 일일이 기록하고 석방됐다. 

부산진 출신의 5~6명만 별도로 구분하여 다시 유치장에 수감했다. 형사들은 3~4일 동안 이들을 추궁했으나 혐의가 없자 이들도 석방되고 최천택ㆍ김영주ㆍ오택만 남아 본격적인 심문을 받게 되었다. (주석 2)


주석
1> 송건호, 앞의 책, 54쪽.
2> 부산일보사, 앞의 책, 17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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