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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버스가 북방의 나라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창문을 뚫고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이미 수명을 다해 사망 선고가 내려졌을 버스다. 이곳에서 환생해 한국 말로 쓴 학원 광고를 그대로 단 채 패어진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낯설다. 국경을 통과하고 끝없이 펼쳐진 갈대 벌판을 달릴 때 버스 안에서 러시아 음악이 감미롭게 흘러나왔다. 영혼의 끝자락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듯했다.

타국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  
  
블라디보스코크 항구에서 한국에서 나를 마중하러 여기까지 오신 강은도 교무님과 대륙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오신 황광석 회장, 이곳에 어학연수차 왔다는 이황휘씨 등과
▲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거리에서 블라디보스코크 항구에서 한국에서 나를 마중하러 여기까지 오신 강은도 교무님과 대륙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오신 황광석 회장, 이곳에 어학연수차 왔다는 이황휘씨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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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마음이 착잡하다. 분단의 나라에서 태어나 그곳의 뒤틀린 환경에서 자라고 나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슬픔과 허망함은 오히려 친숙한 것이다.

나는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길이라고 했고, 할아버지 성묫길이라 했고, 아버지와 화해의 길이라고 했고, 고행의 수도 길이라고 표현했다. 또 세상을 만나보는 여행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의 기가 흐르고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인 만주벌판을 순례하고 다시 연해주로 넘어가면서 내 몸 깊은 곳에서 끊는 혁명가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가족사와 국가의 역사는 언제나 얽히고설키기 마련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핏속에 흐르는 GPS 자동항법장치에 따라 모강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알 수 없는 힘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군인이었던 증조부가 김옥균 등의 갑신혁명에 실패하자 망명해있던 곳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가 가는 길에 황해도의 송림에서 할머니를 만나 정착하고 그곳에서 해방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 후 할머니가 시집간 딸 하나 남겨두고 아들 다섯 형제를 손 잡고 등에 업어 내려오셨다. 그리고 영영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채 통한의 세월을 살다 돌아가셨다. 남북한과 러시아의 삼각협력을 통해서 동북아 공동번영의 전진기지가 될 연해주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옮겨 오면서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여 항일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우수리스크는 내가 유라시아 마라톤을 시작한 이준열사 기념관과 관계가 있다.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이자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 이상설이 활동한 무대이기도 했다. 안중근은 현재의 크라스노스트에서 12명의 비밀 결사체 '동의 단지회'를 조직하여 왼손 무명지를 끊고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썼다.
  
1891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Nikolai) 2세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대표유적이다
▲ 블라디보스토크 개선문 앞에서 1891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Nikolai) 2세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대표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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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에서 연길까지는 고속열차를 타고 연길에서 하룻밤을 잔 후 아침 7시에 우수리스크 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약 20여 명이 탔다. 훈춘에서 한 번 멈췄다. 옛날에는 러시아 보따리 장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고 한다. 바로 옆 건너편에는 아까 버스표를 살 때 도움을 준 중국동포 여자가 앉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듬성듬성 앉았다. 중국 국경을 넘을 때 버스에서 각자 자기 짐을 가지고 내려서 검사를 받았지만 간단한 수속으로 끝났다.

러시아 국경에 들어가서 입국카드를 적고 있는데 북한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영어 글자를 모르는데 대신 적어달라고 한다. 내 손에는 북한 여권이 들려져 있었다. '19XX년 생, 김아무개' 여권번호 등을 적고 국가이름을 적는 란에서 여권에 새겨진 국가명을 바로 찾지 못하고 "국가 이름이 뭐죠?"하고 묻는 촌극을 벌였다. 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선이요"하고 대답하고 난 "그것 말고요" 하며 내 여권의 'Republic of Korea' 글자를 보여줬다. 곧 그의 여권에서 국가명을 발견하였다. 'DPR Korea'.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단체여행객으로 보이는 일행과 러시아인 몇 명이 내리고 나니 버스엔 한민족 혈통의 사람만 6명이 남았다. 나와 중국에서 청바지 공장을 한다는 젊은 사람이 남쪽이고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북쪽 사람, 우수리스크에 사업차 자주 간다는 중국 동포 한 명이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준비해간 초코파이 한 상자를 열어서 "이것 좀 드세요!"하고 두 개씩 나누어 줬다. 다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거 남쪽 과자니 맛 좀 보세요!"하고 말하니 마지못한 척 받아든다.

버스 안의 작은 3.8선 있었지만... "꼭 평양 거쳐서 가길"
  
우수리스크 고려인인 옥산나는 전국노래자랑 대상을 받을 정도로 노래실력이 출중하여 이곳 교민사회에서는 유명하다.
▲ 옥산나와 그녀의 딸과 함께 우수리스크 고려인인 옥산나는 전국노래자랑 대상을 받을 정도로 노래실력이 출중하여 이곳 교민사회에서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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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 정도 가는 좁은 버스 안에도 알 수 없는 3.8선은 있는지, 6명은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면서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을 설명했다. 남쪽 청년이 금방 인터넷으로 나를 검색하더니 "와 대단하세요!" 한다.

조금 전 내가 입국카드를 대신 작성해주었던 김아무개씨가 "정말입네까? 그걸 어떻게 증명합네까?"하고 묻는다. 나는 손목에 찬 GPS시계를 보여주며 이것을 스마트 폰에 연결하면 지도에 내가 뛴 거리, 시간 날씨 등 모든 정보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도 사고 용변도 볼 수 있게 작은 마을에서 버스가 멈췄다. 화장실을 찾아갔다가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15루블을 내야하는데 환전을 못해 러시아 돈이 하나도 없다. 다시 나오면서 "화장실에 돈을 받네요. 어디 으슥한 곳이라도 찾아야겠어요"하며 투덜거렸더니 지금껏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북쪽 사람이 "이리 따라오시라요!"하며 돈을 대신 내줬다. 용변을 아주 시원하게 보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 북쪽 여성은 내게 "꼭 평양을 거쳐서 서울로 달려가시길 빌겠습네다"하며 응원을 말을 남겼다. 이렇게 남과 북이 만나 많은 작은 통일을 이루어내어 큰 통일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어쩌면 나는 돈키호테보다도 더 무모하게 뚜벅뚜벅 달리면서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동맥경화에 걸린 어혈을 풀어주고 평화의 시대, 상생 공영의 혁명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넘어지고, 깨지고,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더 결기를 다진다.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다. 새 세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함께해주고 마음을 모아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묵묵히 달려갈 것이다. 언제나 슬픔과 허망함에서 더 큰 희망과 용기가 나온다.

태그:#우수리스크, #작은 통일, #블라디보스토크, #유라시아 마라톤, #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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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온몸의 근육을 이용하여 달리며 여행한다. 달리며 자연과 소통하고 자신과 허심탄회한대화를 나누며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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