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8 17:30최종 업데이트 18.11.18 17:30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 모덕사










박재혁 의사는 일제의 재판을 받으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거듭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1833~1906)을 떠올렸을 것이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의 파기를 상소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고, 풀려나서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 즉 박재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창하였다.

친일세력에 장악된 조정이 이를 외면하자 면암은 74세의 고령으로 1906년 4월 전라북도 태안에서 '창의토적소'를 통해 백성들에게 궐기를 호소하고 직접 의병을 조직하였다.
 

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 ⓒ 눈빛출판사









의병 활동 중 최익현은 세불리하고 역부족하여 일본군에 피체되어 대마도로 끌려갔다.

이즈하라(厳原)에 소재한 일본군 위수영에 3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왜놈의 물 한잔도 마시지 않겠다는 결기로 오랫동안 단식 끝에 1907년 1월 1일 절명 순국하였다.   
조선의 국적 제1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취조를 받으면서 대한제국 시기의 주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다음은 면암에 관한 언급이다.

최 면암은 고명한 사인(士人), 격렬한 상소를 올리기 수 회, 도끼를 지니고 대궐에 엎드려 신(臣)의 목을 베라고 박(迫)한 것과 같은 일은 참으로 국가를 걱정하는 선비였다. 또 5조약에 반대하여 상소하고 뜻대로 되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킴에 이르렀다. 

왜병이 이를 체포하였어도 나라의 의사(義士)라 하여 대마도에 보내어 구수(拘囚)하였다. 그러나 그는 백이ㆍ숙제 이상의 인물이다. (그들은) 주나라의 채소도 불식(不食)한다 하였으나, 최 선생은 물도 불음(不飮)한다 하였으니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인물이다. (주석 1)
 

면암 최익현 유허비 면암 최익현 유허비 ⓒ 이수철


















다음은 노산 이은상의 찬시인 <면암 선생>의 뒷부분을 소개한다. 

 마지막 을사년에 나라가 망하는데
 판서(判書)는 무엇하며 찬정(贊政)은 그 무언가
 버리고 앞장 나설 제 누가 그 길 막으리

 가묘(家廟)에 하직하고 호남으로 내려가며
 맨손으로 나선 몸이 이루기야 바랐으랴
 충의로 솟는 의기라 억누를 길 없었네

 절사(節士)들 순국할 제, 피묻은 한 마디 말
 사람마다 다 죽으면 나랏일 누가 하랴
 포고문 매찬 글 속에 힘을 묶자 외치고

 다시 붓을 쥐고 왜의 정부에 글을 붙여
 신의를 배반하는 저들을 꾸짖으며
 동양의 큰 평화 위해 열여섯 죄를 헤니라

 의병을 거느리고 내장사로 구암사로
 순창 땅 애달파라 원수 손에 사로잡혀
 대마도 먼 감옥으로 어이 끌려 가신고
 차라리 죽을망정 왜의 쌀로 배 불리랴
 물인들 한 모금을 목 너머로 넘길소냐
 상소문 동지께 전하고 굶어 돌아가시니

 그 유해 바다 건너 고국땅에 대인 뒤로
 정산(定山) 길 열 닷새를 거리마다 통곡소리
 항쟁의 칠십 사 년을 원한 속에 마치니라

 노성(魯城) 땅 무등산(舞童山) 아래 몸은 고이 묻혔어도
 서원 영당(影堂)을 세운다 웃었으랴
 천고에 한 맺힌 넋은 달랠 길이 없었네

 잃었던 그 나라를 도로 찾은 오늘이외다
 이제는 웃으옵소서 임의 뜻을 이뤘소이다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 곕소서. (주석 2)


주석
1> <나라사랑ㅡ면암 최익현선생 특집호>, 제6집, 67쪽, 1972.
2> 앞의 책, 18~1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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