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포스터.

영화 <시> 포스터. ⓒ (주)NEW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첫 장면은 낮, 그것도 예쁜 풍경뿐인 강가다. 이 장면을 선택한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환한 대낮은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인다. 주변이 밝아 남의 눈을 사기에 좋으니 잘못된 짓을 하기도 어렵고, 사소한 것들조차 쉽게 눈에 띈다. 밝은 것은 죄가 없어 보인다. 거기다 강은 바다보단 범위가 좁고 냇가보단 품이 넓다. 모든 면에서 적절한, 예쁘다는 말을 남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들이다.

그곳에 소녀가 있다. 교복을 입은 시체로. 엄청난 균열일 수 있지만 영화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소녀의 시체 옆에 서서히 '시'라는 글자가 뜬다. 카메라의 움직임만 따라가다 보면 소녀의 죽음조차 그저 풍경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단번에 떠오른 것이 있다. 아, 시는 절대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는 말을 하겠구나.

영화 <시>는 미자(윤정희 분)의 시선으로 이루어진다. 미자는 노인 간병일을 하며 중학생 손자를 키운다. 손자는 이혼한 딸의 자식이며, 딸은 돈벌이 차 부산에 내려가 있는 상태다. 미자는 어느날 팔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황당하게도 '치매 초기 증세'라는 진단을 받고 나온다. 날이 갈수록 미자는 일상적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명사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동사도 잊어버린다.
 
 영화 <시> 스틸 컷.

영화 <시> 스틸 컷. ⓒ (주)NEW

 
돌아가는 길에 문화센터에서 주최하는 '김용탁 시인의 시쓰기 강좌'를 수강하게 된다(실제로 김용택 시인이 출연한다). 어렸을 때부터 감상적이고 순수한 내면을 유지해 온 미자는 시 쓰기 활동에 애정을 보인다. 첫 수업시간에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선 '본다'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 일상적으로 보던 사과 한 알을 열심히 뜯어보고 맛본다. 별다른 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저 깎아서 먹는 게 제 맛인 사과일 뿐이다.

그러던 중 미자는 자신의 손자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다는 걸 알게 된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해, 그 여학생이 강물에 투신자살했다는 얘기였다. 미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가해자들 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가해행위에 대해 무료하게 풀어낸다. 그 가운데서 미자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몰라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꽃을 본다. 그저, 꽃이나 보며 시 쓰기 강좌에서 들었던 '본다'의 학습을 열심히 수행한다. 이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미자는 사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나도 미자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정하기 힘든 사실 앞에서 주위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철저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말이다. 그곳이 내겐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이고, 시 쓰기 역할에 충실해지려는 미자도 나와 비슷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무서운 것들을 외면하고 싶은 상태. 어렵고 복잡한 것들을 밖으로 내몰고 나 혼자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려는 상태. 일단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든 펴든 해야 제대로 된 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저 무자비한 사실로부터 나를 숨겨야 한다. 그만큼 미자는 약한 존재다.

미자에게 시는 아름다운 것이고, 시로 담아낼 존재와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아름다운 건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건 고결한 것이다. 미자에겐 땅에 떨어진 살구도 아름답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제 몸을 던지는 살구의 고통조차 미자에겐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뿐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아름다울까. 예술은 아름다울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존재를 담으면 예술도 아름다워질 수 있고, 아름답지 않은 존재를 담으면 예술도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예술의 범위는 무한하니 말이다. 그래서 소재가 중요해진다. 소재는 곧 예술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준다.
 
 영화 <시> 스틸 컷.

영화 <시> 스틸 컷. ⓒ (주)NEW

 
미자는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잘못한 손자를 두둔하고 싶었던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 봤을까. 더럽지만 진짜 삶의 문제들을 말이다. 와중에 미자는 또 한 번의 삶에 부딪힌다. 손자의 합의금을 치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부모 한 사람당 500만 원이면 소녀의 죽음을 무마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손자의 죄를 무마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돈이지만, 미자는 그조차 없다.

미자는 간병하던 노인에게 간다. 무자비한 세상을 느껴서인지, 자신의 나약함을 느껴서인지, 외로워서인지, 이유를 찾을 필욘 없다. 미자는 노인과 잠자리를 갖는다. 몸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노인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남자 구실'이라는 걸 하길 원했다. 미자는 노인의 가족들에게 찾아가 500만 원을 요구한다. 

영화는 미자의 편견을 깨부수는 이야기들을 중점적으로 끌고 간다. 시쓰기 강좌 센터, 시 낭송 모임회, 손자의 범죄, 가해 부모들의 태연함, 노인과 잠자리, 소녀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미자의 어떤 '아름다움'에 위해를 가하는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그저 치매 증상을 완화하려, 학생 때 좋아했던 문학을 느끼려 시를 쓰려했다. 그만큼 시는 아름다운 것이고 예술이 그리는 세상은 꽤 진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술은 담아내는 것에 불과했다. 더러운 인물들의 모습, 더러운 세상의 논리, 자기 것을 지키고 싶은 더러운 욕구, 같은 것을 그리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부분도 있다. 그건 예술이 아름다운 것이라기보단 아름다운 것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미자는 이제야 제대로 '본다.'

영화 후반부, 위자료도 냈고 합의도 원만하게 마친 것 같았지만 영화는 상황을 한 번 더 비튼다. 결국 미자는 자신의 손자를 고발한다. 미자가 직접 고발한 것인지, 경찰들이 손자를 잡아갈 때 굳이 막으려 노력하지 않은 것인지 나오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미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자는 경찰에게 연행됐다는 것이다. 미자가 나무에 걸린 배드민턴 공을 빼내려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 옆에 있던 손자는 덤덤히 연행된다. 참 격정적이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은 마무리다. 
 
 영화 <시> 스틸 컷.

영화 <시> 스틸 컷. ⓒ (주)NEW

 
이후, 영화에선 시 한편이 등장한다. 미자는 결국 시 쓰기 강좌 과제였던 시를 써낸다. 시를 쓰는 게 그간 너무 어려웠던 미자는 진짜 삶의 모습을 '보고' 이제 제대로 쓸 수 있게 됐다. 미자의 시는 외면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택한다. 자칫 허무맹랑하게 예쁘기만 했을지도 모를 미자의 시는 진정으로, 아름다워졌다. 영화는 소녀를 등장시키기 위해 이 시를 활용한다. 마지막 부분에선 죽기 전 소녀가 나와 미자의 시를 낭송한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나의 오랜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영화 <시>,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감독이 직접 지은 시)


감독은 밝은 대낮에 강물 위로 시체를 들이밀었다. 아름답게 혹은 그렇지 않게 늙어갔을지도 모를 작은 소녀는 삶을 다 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죽음도, 충분히 낮에 일어날 수 있다. 안타깝고 슬픈 마음만 가지고는 죽어간 것들을 전부 위로할 수 없다.

영화 속 미자가 소녀의 사진을 훔쳐왔던 것처럼,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힘들어도 할 수만 있다면 제대로 보고, 제대로 느껴서, 그렇게 죽어갔을 소녀와 만나고 싶다. 성폭행 피해로 뜨거운 낮에 영혼부터 죽어갔을 소녀를 위로한다. 동시에 잘못을 저지른 놈은 제대로 처벌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나도 미자처럼, 아름다움을 꿈꾼다. 세상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처럼 조금만 더 아름답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제대로 '본' 이후에 만들어야 할 세상이 아닐까 싶다.
영화 이창동 예술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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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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