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0 19:08최종 업데이트 18.11.20 19:08
 

박재혁 의사 동상. 불꽃같이 살다간 박재혁 의사의 27년.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박재혁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의 날을 기다리고 있던 5월 초 어느 날, 절친이면서 오랜 동지인 최천택이 대구감옥으로 찾아왔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부산경찰서 투탄사건 이후 8개월 만이다. 

만감이 교차되는 만남이었다. 
최천택은 삶은 달걀꾸러미를 친구의 영양보충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당시 달걀은 최고의 보양선물이었다. 그러나 고문과 부상으로 피골이 상접한 박재혁은 달걀을 받지 않았다. 여러 날째 단식 중이었기 때문이다.


"왜놈들의 손으로 목이 졸리기 싫어 며칠째 단식 중이라네. 이제 내 사명은 다하였으니 여한이 없네. 어머님과 동생을 부탁하네."

박재혁은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또렷하게 친구의 음식을 거절하면서 단식→순국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의열단원으로서의 사명, 아니 한국청년의 소명을 다했으니 이제 당당하게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최천택은 더 이상 준비해 간 달걀을 권하지 않았다. 권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박재혁이 성자처럼 보였다. 단신으로 서장실에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터뜨린 것이나, 그토록 참혹한 고문에도 끝내 동지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이나, 며칠씩이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까지 단식을 결행하는 개결찬 모습은 바로 성자의 모습이었다. 

최천택은 간수에게 떠밀려 다시 면회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대구감옥을 나왔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새벽, 좌천동 자택에서 자고 있는데, 박재혁 노모의 숨넘어가는 듯한 목소리에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 내민 것은 한통의 전보였다. 박재혁이 11일 새벽 5시 경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최천택은 서둘러 박재혁 어머니를 모시고 대구감옥으로 갔다. 동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시체라도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노모는 이미 실신상태여서 간신히 인도하여 대구감옥에 이르렀다. 

56년 전인 1864년 3월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를 씌워 교살했던 곳이다. 최제우는 부패 타락한 조선왕조에 맞서 만민평등과 후천개벽을 내세우며 민족종교 동학을 창도했다가 주자학의 집권세력에 이단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곳에서 박재혁 의사는 27세의 젊음을 조국해방을 위해 불태우다가 순국한 것이다.

최천택이 박재혁의 노모를 모시고 시신을 인수하러 다시 대구감옥에 갔을 때 한 간수가 울음을 삼키면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고 기록에 남겼다.

박 선생님은 자기의 명을 알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실은 오늘 12시에 박 선생님을 사형하라는 일본 사법성의 전보가 왔습니다.(<노정 최천택선생 투쟁사>)

이같은 기록으로 보아 총독부는 본국 정부 사법성으로부터 사형 집행일까지 통고를 받을 만큼 박재혁 의사를 국사범으로 취급하고 극형을 집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박재혁 의사는 이런 정황을 예견하고 일제의 마수가 닥치기 전에 2주일 정도의 단식으로 자진 순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대구에 수감중인 박재혁은 병사"..박재혁 의사 순국 기사 박재혁 의사는 5월 11일 옥중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14일 부산진역에 도착한 박의사의 유해 앞에 최천택을 비롯한 동지들과 친척, 부산시민들이 애도를 표하였다. <동아일보>(1921년 5월 17일)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박 의사의 순국 소식은 신문에 보도되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5월 17일자에서 "대구에 수감 중인 박재혁은 병사"라는 제목으로 "폐병으로 11일에 사망"이라고 보도했다. 대구감옥 측에서 '폐병사망'이라는 보도자료나 설명을 했을 터이고, 신문이 그대로 받아 쓴 것이다.  박 의사가 이전이나 수감 중에 폐결핵을 앓았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의 옥사나 고문사 등을 이런 식으로 호도하였다. 

최천택과 박 의사의 노모는 대구감옥에서 유해를 인수하여 부산진역으로 운구해 왔다. 박  의사는 시신이 되고서야 정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 앞에는 의사의 순국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척ㆍ동지들 뿐만 아니라 친구들ㆍ동문ㆍ부산시민 다수가 나와 애도를 표하고 더러는 눈물을 뿌렸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대구감옥에서 오직 죽을 날을 기다리던 부산서 폭탄범인 박재혁은 지난 십일일에 그 감옥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시체는 십사일 오후에 고향인 고관(古館)정거장에 도착하였는데 정거장에는 그 친척과 친구가 다수히 나왔으며 부산경찰서에서는 경찰이 다수히 출장하여 두터운 폭탄범인의 시체까지 경계하였더라."

일제는 박재혁 의사의 장례식까지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부산진 좌천동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가족과 친지만 참여케 하고, 심지어 입관 때에도 인부 2명만 사용토록하고 유족의 참석까지 막았다. 일제가 박 의사를 얼마만큼 증오하고 그의 행적을 사후까지 두려워했던가를 보여준다. 

박 의사의 유해는 이날 좌천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신문의 보도대로 '경찰서 폭탄범인'의 죄목으로 공동묘지에 묻힌 채 긴 세월 방치되었다.

엄혹했던 시절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하는 일념으로 27세의 생을 불살랐던 박재혁 의사에게는 꽃 한 송이도 십자가도 없는 공동묘지의 초라한 무덤 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가 나치 점령하에 있을 때 지하 유인물인 <프랑스문학>을 발간하며 나치와 싸웠던 레지스탕스의 작가 끌로드 모르강(Claude Morgan)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을 지었다. 이 시를 박재혁 의사의 영전에 바친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몸짓도 없고, 꽃도 없고 
종소리도 없이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이 
사나이답게 
너의 옛 동지들 
너의 친척이 
너를 흙에 묻었다. 
순난자(殉難者)여. 

흙은 너의 영구대(靈柩臺)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다. 
너를 위해….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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