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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흑석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황태성의 일제강점기 수형인 카드 황태성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황태성은 일제에 세 차례 수감되기도 하는데, 사진은 광주학생운동을 경성으로 확산시키는 활동을 이끌다 1930년 1월 체포된 이후 서대문형문소에서 만들어진 수형인카드이다.
▲ 황태성의 일제강점기 수형인 카드 황태성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황태성은 일제에 세 차례 수감되기도 하는데, 사진은 광주학생운동을 경성으로 확산시키는 활동을 이끌다 1930년 1월 체포된 이후 서대문형문소에서 만들어진 수형인카드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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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뉴지엄을 끝으로 흑석길 아홉 개 코스에 대한 탐방을 마쳤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인지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흑석길을 걸으며 황태성(1906~1963)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만들지 못해서이리라. 황태성이 살았던 흑석동 산88-5번지는 현재 지번에서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조선일보 뉴지엄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을 곳에 있었을 것이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친형 박상희보다 더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으면서도 바로 그 박정희에게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인물이다. 아울러 지난 6월 사망한 김종필의 <김종필 증언록>과 김학민·이창훈의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등을 통해 최근까지도 '김일성의 밀사'인가, 아니면 단순한 '간첩'인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조만간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하면 그를 간첩으로 사형시킨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그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크게 불거질지도 모를 일이다.

황태성, 흑석동에 나타나다

그런 황태성이 처음 흑석동에 나타난 때는 1961년 9월 1일. 당시 흑석동에는 3일 째 폭우가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나 심했는지 이날 오전에는 흑석동 뒷산인 서달산 자락 언덕이 무너져 일가족 6명이 압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그날 북한에서 1950년대 무역성 부상까지 지낸 황태성이 중앙대학교 정문에 나타났다.

황태성이 휴전선을 넘어 우이동에 도착한 것은 하루 전인 8월 31일이었다. 그가 9월 1일 처음 찾은 곳은 남로당 출신으로 과거 친분관계가 있던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1913~1975)이 사장으로 있던 동양통신사였다. 그런데 마침 김성곤은 국제언론인협회 회의 관계로 외국에 나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대 강사로 있던 고향(경북 상주) 친구 김원출의 아들 김민하를 만나기 위해 흑석동을 찾은 것이다. 더군나다 김민하의 부인은 황태성이 앞으로 활동과정에서 큰 도움을 기대하고 있던 조카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김민하는 당시 중앙대 강사로 있었는데, 나중에는 중앙대 총장과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지냈고 지금은 <세계일보> 회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중앙대 경비실에 고향 아버지 친구가 찾아왔다고 해 김민하를 만난 황태성은 김민하의 집에 도착해 자신이 '김일성의 밀사로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왔다'고 설명한 후 조카 임미정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이렇게 해서 황태성은 1961년 10월 20일 갓 출범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될 때까지 50일 간 흑석동 산88-5번지 김민하의 집에 머물게 됐다.

황태성, 박정희·김종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흑석동에서 연행되다

황태성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날 수 있는 선을 찾아 나선다. 그는 우선 임미정-권상능 부부를 만나고, 그들 부부를 통해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인 왕학수 당시 고려대 교수와 죽은 옛 친구이자 동지였던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에게 연락을 취한다. 박상희와 조귀분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도 황태성의 소개가 결정적이었다. 조귀분은 박정희의 형수였을 뿐만 아니라, 김종필의 장모이기도 했다.

연락을 받은 왕학수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귀분이 어떻게 했는지는 2년 후 나온 '황태성 사건 진상 발표'와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진상 발표 자료는 김종필을 보호하기 위해 조귀분이 사위 김종필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중앙정보부장 경호관 이아무개 중위에게 신고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김종필 증언록>에는 김종필이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961년 10월 15일 오전 3시쯤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단 말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보통 일이 아닐 거란 생각과 함께 수화기를 들었다.

"큰일 났어예." 경북 구미에 계신 장모님의 다급한 사투리 목소리였다. "아니, 뭐가 큰일 났습니까." 한참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던 장모가 입을 열었다. "예리 아빠(JP)는 모를 텐데… 옛날 장인 친구인 황태성이라는 사람이 이북으로 넘어갔는데 이 사람이 내려왔어예. 나한테 박정희 의장하고 예리 아빠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네예." 장모는 조귀분(趙貴粉)이고 그분의 시동생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다.

장모의 목소리는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렸다. 듣고 보니 장모가 당황하실 만도 했다. 나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모는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못 만날 거라예"라고 답했다고 했다.

장모는 밤중에 구미경찰서로 가서 경비전화를 이용해 내게 전화를 거셨다. 아마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라서 경비전화를 빌려 준 모양이다. 나는 "장모님, 염려 마세요.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김일성이 내려보낸 황태성, "나는 밀사, 박정희 의장·김종필 만나게 해달라", 중앙일보)

 

그로부터 5일 후인 1961년 10월 20일, 황태성은 흑석동 김민하의 집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된다.
 
 지난 6월 사망한 김종필은 2015년 중앙일보를 통해 '소이부답'이라는 제목으로 증언을 연재하였다. 이 중 황태성 사건에 대한 증언도 있었지만, 세인의 궁금증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6월 사망한 김종필은 2015년 중앙일보를 통해 "소이부답"이라는 제목으로 증언을 연재하였다. 이 중 황태성 사건에 대한 증언도 있었지만, 세인의 궁금증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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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사건', 1963년 대선 최대 이슈로 부상하다

황태성이 50일간의 흑석동 생활을 마감하고 중앙정보부에 연행됐지만, 이 사실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다. 심지어는 재판도 비밀군사법정에서 이뤄졌다. 그런 '황태성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년 후인 19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삐라'(선전물)를 통해서였다. 박정희에 비판적이었던 미국 내 일파가 야당에게 몰래 정보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윤보선과 허정은 '황태성 사건'을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를 공격하는 호재로 삼는다. 이로써 5.16군사쿠데타 이후 처음 실시되는 1963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황태성 사건'은 가장 큰 선거 이슈로 부상한다.

나중에 야권단일후보가 되는 윤보선은 "여순반란사건에 관련한 사람이 지금 정부에 있다"느니, "공화당은 김종필이 북에서 파견된 황태성에게 받은 20만 달러의 공작금과 공산당의 조직방법을 배워서 만든 조직"이라느니 하면서 공격했다.

윤보선의 이러한 공격은 사실이었을까. 박정희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남로당 군사부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순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여순사건의 시발점이 됐던 14연대의 반란은 남로당 중앙이나 박정희가 속해 있던 남로당 군사부의 지시로 일어난 계획된 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14연대가 '제주 4·3사건' 진압부대로 결정돼 갑자기 출동 명령을 받게 되자 지창수 하사를 중심으로 이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자연발생적인 봉기였다. 박정희 후보 측이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중엔 박정희가 절대 없다"라고 반박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황태성의 20만 달러가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에서 파견된 황태성의 지령을 받거나 지도를 받아서 공화당을 창당했다는 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김종필은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황태성의 공작금을 포함한 간첩들에게서 몰수한 공작금으로 KBS TV방송 개국 관련 방송장비를 미국으로부터 구입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황태성 사건'을 활용한 윤보선의 박정희에 대한 공격은 전형적인 '색깔론'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1963년 대선에서는 그 '색깔론'을 사용한 게 반공주의의 대가 박정희가 아니라, 야당후보인 윤보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1963년 당시 야당은 반공을 최고의 가치로 내건 한민당의 후예들이었다. 대선후보 윤보선 역시 한민당 출신이었다. 그래서 윤보선은 남로당 경력이라는 '숨기고 싶은 과거를 가진 사나이' 박정희에게 색깔론을 적극적으로 들이미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박정희는 윤보선의 공격을 1950년대 미국에 횡행했던 '매카시즘의 한국판'(코카시즘)이라고 비판하면서 방어에 나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됐던 것이다.

황태성, 그는 '거물 간첩'인가 '김일성의 밀사'인가

'황태성 사건'의 주인공 황태성이 '김일성의 밀사'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간첩'이었는지는 앞으로도 한동안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김종필 증언록>에서 의외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연행된 황태성은 정보부 수사요원에게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박정희 의장과 김종필 정보부장,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만나서 얘기할 게 있다. 만나면 다 해결된다"는 소리만 했다. 왜 남쪽에 내려왔느냐, 어떤 지시를 받고 넘어왔느냐, 아무리 물어도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박정희 의장이나 김종필 부장을 만나서 말할 게 있지, 너희(신문관)한테는 말하지 않겠다"고 계속 버텼다. (중략)

황태성을 잡아서 가둬 놓고도 나는 박정희 의장에게 아무 보고도 하지 않았다. 박 의장은 과거 좌익 혐의 전력 때문에 사방에서 사상을 의심받던 차였다. 김창룡의 숙군(肅軍) 태풍에 휩쓸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늘 걱정하고 신경 쓴 문제가 그것이었다. 박 의장이 이 보고를 받으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할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 조용히 내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태성이 김일성 지시로 내려온 게 분명한 이상 박 의장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성을 체포한 지 며칠이 지나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공관으로 찾아갔다."(김일성이 내려보낸 황태성, "나는 밀사, 박정희 의장·김종필 만나게 해달라", 중앙일보)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황태성은 신문 과정에서 일관되게 '박정희나 김종필을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김종필은 황태성을 잡아놓고도 처음에는 박정희에게 보고하지 않았지만, 그가 "김일성의 지시로 내려온 게 분명한 이상 박정희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종필도 황태성이 단순한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연행 당시 김민하 집에 온 중앙정보부요원들이 황태성에게 절을 한 후 모시고 갔다'고 권상능이 증언했다"는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의 공동저자 이창훈의 말이나 황태성이 시내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장기간 투숙하며 조사를 받았다는 점도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을 단순한 '간첩'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의 공동저자 이창훈은 "'연행 당시 김민하 집에 온 중앙정보부요원들이 황태성에게 절을 한 후 모시고 갔다'고 권상능이 증언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의 공동저자 이창훈은 ""연행 당시 김민하 집에 온 중앙정보부요원들이 황태성에게 절을 한 후 모시고 갔다"고 권상능이 증언했다"라고 말했다.
ⓒ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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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이 김일성의 '밀사'로 내려온 이유는?

황태성은 신문 과정이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김일성의 지시로 남북통일의 방안과 타협을 모색하러 왔다"고 진술했고, 심지어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김일성의 '밀사'로 온 이유를 "남한에서 간 밀사에 대한 반찰(편지 답장을 보냄)"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5·16쿠데타 세력이 쿠데타 직후 '북한과 서해 무인도인 용매도에서 15차례 정도의 정치회담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 정치 담당관을 지낸 투가첸코 전 소련 공산당 국제부 부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회담은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승인을 받아 육군첩보부대가 주도했으나 북한 측이 대표 격상을 계속 요구해 결렬됐다"라고 한다. 당시 육군첩보부대의 부대장은 이철희였고, 용매도 회담에 나선 남한 측 대표는 강성국과 김석순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이 북한과 이런 비밀 정치회담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말이 '혁명주체세력'이지 명분이 아닌 이해관계로 모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논공행상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 혹시나 북한의 도발이 벌어진다면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북한과 비밀 정치회담을 통해 "서울과 평양에 비공식 대표부 설치"와 같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미끼로 지연작전을 쓰면서 혹시 발생할 수 있을 북한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남북 장교들의 접촉은 첩보부대에서 정보수집 차원에서 한 것"이라는 김종필의 회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반공(反共)을 국시의 제1의(第1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라고 하면서 '선건설 후통일' 입장에 서 있던 5.16쿠데타 세력이 북한과 비밀리에 정치회담을 개최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힘들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5.16쿠데타라는 남한의 새로운 변화에 직면해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대표 격상을 요구했을 것이고, 여의치 않자 박정희의 진의를 직접 파악하기 위하여 박정희와 인연이 있는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태성, 믿었던 박정희에게 간첩으로 처형되다
 
황태성의 묘(경북 상주) 1961년 '김일성의 밀사'를 자처하고 북에서 내려온 황태성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물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 황태성의 묘(경북 상주) 1961년 "김일성의 밀사"를 자처하고 북에서 내려온 황태성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물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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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북한에 대한 기만전술 차원에서 용매도 비밀정치회담을 벌였지만, 북한에서 황태성을 직접 '밀사'로 파견해 "남북통일의 방안과 타협을 모색하러 왔다"라고 하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호시탐탐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 '빨갱이'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종필은 황태성의 존재를 미국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결국 황태성의 존재를 알아냈고, 오히려 자신들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은 이유를 의심했다. 미국은 급기야 야당에 정보를 흘려 1963년 대선의 최대 이슈로 만들기까지 했다.

당시 대방동 미군 '502 군사정보단'에 근무하던 중 1주일간 황태성을 신문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CIA 요원 마이클 리에 따르면, 황태성의 존재를 파악하게 된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8군 G-2의 강력 반발로 시내 모처에서 황태성을 신문하며 상세한 공작임무 내용을 포함해 박정희·김종필과의 관계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는 끝내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1963년 대선 과정에서 이미 '황태성 사건'이 언제든지 미국과 야당에 의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확인한 박정희로서는 황태성을 그대로 살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일성의 밀사' 황태성은 대법원 확정판결(1963. 10. 22)에 불복해 취한 재심 청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을 불과 3일 앞둔 1963년 12월 14일 인천의 어느 산골짜기로 끌려가 처형당하고 만다.

'황태성 사건'의 진실, 이제라도 꼭 밝혀져야

박정희의 판단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음은 황태성의 사형을 집행한 바로 다음해인 1964년에 국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삼민회 소속 국회의원 서민호는 '재심 청구 기간에 사형을 집행한 건 법 위반 아닌가'라고 따졌다.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당 간부 출신이었으면서도 해방 이후 대표적인 반공주의 정치인으로 변신에 성공했던 김준연이 당시 국회공론사 사장 우인기의 주장을 받아 "황태성은 사형 집행된 게 아니라 빼돌려져서 지금 오키나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라면서 '황태성 생존설'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이어 국회에서는 '황태성 간첩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꾸리자는 안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결국 국회 법사위가 감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타협하면서 논란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박정희는 다시 한 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55년 전 황태성이 간첩으로 처형되면서 마무리된 것으로 보였던 '황태성 사건'이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반도가 냉전의 벽을 뚫고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는 남북 위정자들의 정략적 판단으로 희생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다.

최근 1969년에 '이중간첩'으로 처형된 이수근이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듯이 황태성의 한을 풀어주는 것도 평화와 통일의 새시대를 준비하는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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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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