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4 14:08최종 업데이트 18.11.24 14:08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살시킨 의열단 박재혁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 초입(초량교회와 초량초등학교 사이)에 의열단 박재혁 열사에 대한 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일경에 체포 직후 중상을 입었음에도 일제가 주는 음식과 물을 일절 거부한 채 곡기를 끊고 순국한다.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였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제까지 변변치 못하지만 인물평전 30여 권을 썼다. 대부분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주름잡은 인물이거나 독립운동가 또는 민주화운동가와 비판적인 정도의 지식인(언론인)이다. 예외라면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하수인 안두희가 들어있을 뿐이다. 그 자는 이승만 정권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포함시켰다.

그런 중에 이번에 쓴 박재혁 의사의 평전이 가장 힘들었다. 110년 만의 폭염 속에서 땀 깨나 흘리고 마무리 단계에서 병원의 신세를 져야 했다.


대부분 평전의 대상은 자료와 증언이 넘치고 쌓였다. 
하지만 박재혁 의사의 경우는 스토리가 지극히 짧고 단순했다. 상업고등학교→비밀항일운동→상업종사→의열단 가입→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 처단→사형선고와 27세의 순국으로 진행된 스토리는 논문 한 편을 쓰기에도 자료가 턱없이 모자랐다. 증언이나 문헌도 드물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일어난 거사인 관계로, 그동안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단 몇 행(行)으로 박 의사의 의거를 처리하거나 아예 제외시켜 버린 경우가 많았다.

박 의사는 단신으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라 "왜 의열단이 하시모토 서장을 처단하는가"를 본인에게 직접 설명한 연후에 그에게 민족적인 응보의 폭탄을 던졌다. 그것이 의열단의 지침이었다. 적장의 면전에서 투탄행위는 곧 자폭을 의미한다. 

해방 후 환국하여 부산의 박 의사 묘소를 찾은 김원봉은 "살아서 돌아 올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시모토에게 죽이는 이유를 설명해주라"는 의열단의 지침으로 소중한 동지를 잃게 되었다고 통탄한 바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기록과 자료를 뒤졌지만 박 의사 관련 내용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본인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일제 법정의 사형선고 며칠 후 단식으로 순국하였으므로 옥중 '동기생'들의 증언도 없었다. 그래서 '토막 자료'도 찾기 어려웠다.

하여, 박 의사의 짧은 생애 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한 당시의 사력(史歷)을 배경으로 설치하고, 주인공을 대입시키는 방식을 취하였음을 밝힌다. 그러다 보니 다소 현실감이 미치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읽는 분들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박 의사의 행적이 단순하다고 해서 그의 업적이 단순하거나, 의거 자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 의사는 의병부대나 독립군단이 하기 어려운 일을 단신으로 수행하였다. 앞에서도 썼지만 하시모토 처단 후 국내외에서 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항일전에 다시 불이 붙었다. 
  

박재혁의사. 박재혁의사 생가 부근 독립운동가 골목 모습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더욱이 박 의사의 의거는 역대 의열사 중에서 가장 연소한 나이의 거사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거사과정이나 재판 중에 의연한 처신 등은 식민지 시절 한국 청년의 기상을 보여주었다. 우리 의열사의 전(傳)에서 손색이 없는 분이다. 

나라의 사정이 정상적이었다면, 해방 후 정국은 애국자와 친일파로 구분되고, 이들에 대한 선양과 처벌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미군정에 이어 등장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을 중용하면서 애국자와 순국선열들은 설 땅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의열단의 성망을 차용하려는 정치사회 단체가 몇 개 나타났으나 막상 의열단의 순국지사들을 기리는 사업은 전개되지 않았다. 

해방 후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격동기여서 그 역시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고향을 찾고 부산에서는 대규모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하여 강연을 하였다. 그 무렵 김원봉의 명성과 함께 의열단의 명칭을 이용하려는 단체가 생겨났다. 이와 관련 김원봉의 성명이다.

최근 조선의열단이니 의열청년회니 의열동지회니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는 옛 조선의열단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열단은 1919년 해외에 있는 대한독립단, 조선혁명단, 신한독립단 등 여러 단체가 조직한 것으로 그후 조선민족혁명당이 되었다가 다시 1945년에 발전적으로 해소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새의 것은 그때의 것과 성질도 다르며, 그 당시의 관계자들은 이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주석 1)

박재혁 의사는 사형 집행일을 앞두고 단식으로 스스로의 명을 마감하면서, 조국 아일랜드를 점령중인 영국 정부에 맞서 싸우다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한 로버트 에밋(1778~1803)의 심중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에밋은 압제자들에게 감형을 사정하거나 주장하기는커녕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믿으면서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남겼다.

나는 이제 춥고 쓸쓸한 내 무덤으로 가렵니다. 무덤이 나를 받아들이려고 열리는 순간 미련없이 그 품에 뛰어들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침묵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른 시대와 사람들이 나의 인격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나의 동기와 내가 망각과 평화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의 조국이 지상의 다른 나라들 틈에서 제 자리를 찾을 때, 그 때는 나의 비문을 써도 좋습니다. (주석 2)
 

박재혁 의사 동상 부산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다.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순절하게 살다가 곱디고운 스물일곱살 청춘을 조국해방전선에서 바친 박재혁 의사. 

"조국이 제 자리를 찾은" 지도 어언 70여 년이 지나고 순국한 세월도 1세기가 되는 지금,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맑은 이슬로 먹을 갈아 비문을 새로 쓰고, 이를 바탕으로 추모가를 짓고, 각종 기념사업을 벌였으면 한다. 

하루 속히 생가를 복원하여 시민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이와 함께 생가 부근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박 의사를 비롯 부산ㆍ경남지역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만들고, 애국혼이 깃든 모교나 부산시내 중심가에 우뚝한 동상을 세우고, 의거 현장에는 포효하는 박 의사의 입상(立像)을 세우며, 부산시는 의사의 순국일을 '박재혁 의사 추념일'로 지정하고, 부산교육청은 '박재혁 의거 문예상'(가칭)을 제정하여 청소년들의 애국심을 키웠으면 한다. 

뜻있는 분들이 3ㆍ1절이나 광복절을 계기로 박 의사의 투쟁을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하고, 10월 상달 맑은 날을 택해 중앙정부 주도로 박재혁 의사를 비롯, 의열사들의 영원한 안식과 유업을 기리는 추모제전을 열었으면 한다.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을 때에 생명을 바쳐 싸우다 가신 의열사의 정신은 아무리 기려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박 의사가 생전에 즐겨했던 격언에서 거듭 그의 인격을 살피게 한다. 몇 대목을 소개한다.

 大丈夫義氣相許 小嬚不足介
 대장부 의기는 서로 믿음에 있으니, 작은 거리낌도 끼어들 수 없다. 

一葉落而 知天下寒
잎새가 하나 지니 천하가 추워짐을 알겠다.

世間好物堅牢 彩雲易散琉璃碎
세상 인심은 굳고 단단함을 좋아하나, 색깔구름은 쉬 흩어지고 유리는 쉬 부서진다. (주석 3)

박재혁 의사의 평전을 집필하는데 지원해주신 '개성고(부산상고)총동창회 재단법인 백양장학회'와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노상만 관장님, 유족 김경은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새로 입수한 자료(사료)는 단행본으로 엮을 때 첨가할 예정이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주석
1> <임정 군무부장 김원봉, 의열단의 성격 천명>, <자유신문>, 1945년 12월 20일. 
2> 제임스 잉글리스 지음, 김미경 옮김,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말ㆍ말ㆍ말>, 142쪽, 작가정신, 2011.
3> 송건호, 앞의 책, 56~5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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