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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 때의 피델 카스트로. 쿠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지 3개월 뒤인 1959년 4월에 찍은 사진.
 33세 때의 피델 카스트로. 쿠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지 3개월 뒤인 1959년 4월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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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이 세상을 떠난 지 2주기를 맞은 피델 카스트로(1926~2016)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못지않게 미국에 근심을 안겼던 반미 진영 지도자다. 미국이 싫어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미국 코앞에서 유지했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미국에 대해 도전적이고 대결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쿠바·미국 관계 그 자체와 마찬가지였다. 그가 체 게바라와 함께 풀헨시오 바티스타 친미 정권을 무너트린 지 2년 뒤인 1961년, 쿠바와 미국의 국교는 단절됐다. 뒤이어 미국의 오랜 압박이 이어졌다. 경제제재도 그중 하나였다. 이로 인한 적대적이고 불편한 관계가 2014년 12월 17일의 국교정상화 선언 및 2015년 7월의 대사관 교환으로 극적으로 해소됐다. 이렇게 대미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본 지 1년 뒤에 카스트로는 눈을 감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을 연상케 한다.

카스트로가 미국에 눈 돌린 계기

미국에 적대적이었던 카스트로의 태도 변화를 추동한 가장 큰 계기는 독일 통일(1990) 및 소련 붕괴(1991)로 가속화된 탈냉전이다. 이로 인한 공산주의 진영의 결속력 약화가 쿠바 경제에 직접적 타격을 줬다. 쿠바 경제는 공산권에 대한 설탕 수출에 크게 의존했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등장하자, 당장 설탕 수출이 어려워졌다. 러시아가 거래처를 바꿨기 때문이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예전처럼 쿠바의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카스트로의 마음을 열었다. 미국에 대해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도록 만든 것. 1993년부터 쿠바는 외국인의 달러 사용을 허용하고, 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로 여겨왔던 국제통화기금(IMF)과도 과감하게 접촉했다.

1999년까지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낸 페데리코 마요르 사라고사가 2000년 1월 28일 카스트로와 대담을 가졌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를 위한 거대한 움직임의 관점에서 보면, 쿠바 경제를 세계를 향해 좀더 개방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라고 사라고사가 묻자 카스트로는 "우리는 가능하고 필요한 만큼 경제를 개방해 왔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1990년대 초반 이후의 개방정책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문호 개방을 위해 카스트로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하는 데도 열의를 보였다. 2002년 5월 12일 지미 카터의 쿠바 방문은 그렇게 성사된 작품이다.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 1943~) 프랑스 드니 디드로 대학 교수와의 대담집인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에, 카스트로가 그 일을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트뤼도'는 저스틴 트뤼도(트루도) 현 캐나다 총리의 아버지이자 '현대 캐나다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에르 트뤼도(1919~2000) 전 캐나다 총리를 지칭한다.
 
"나는 트뤼도의 장례식 때문에 오타와에 가게 됐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죠. 그게 교회 안인지 교회에 들어가기 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카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이 방문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러자 그는 '알았습니다. 곧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쿠바 방문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심지어 조지 부시 대통령의 쿠바 방문까지 추진했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그런 일까지 시도했다. 카스트로는 조지 부시를 수도 아바나에 불러 대규모 군중 연설회까지 열어주려 했었다. 위 책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그가 원한다면 스피커를 설치하고 그가 원하는 시간만큼 우리 민중에게 설명하고 토론하도록 해줄 겁니다. 그렇게 쿠바 민중은 독단적 주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논거를 바탕으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쿠바 국민들이 공산주의에 세뇌당하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조지 부시를 위한 대규모 연설회도 열어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말을 했을 정도로, 피델 카스트로는 대미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인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쿠바를 탈출해 미국 남부 플로리다를 거점으로 반(反)카스트로 운동을 벌이는 쿠바계 미국인들이 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쿠바와의 냉전을 끝내는 것이 계속하는 것보다 이익이 될 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던 미국의 문, 하지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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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두 나라 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인 이때부터는 미국이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게 된 미국 기업들이 쿠바시장 진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점,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화력이 중동에 집중한 뒤로 베네수엘라·브라질·볼리비아·아르헨티나 등에서 좌파가 강해진 점, 이런 분위기를 활용해 남미 대륙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강해진 점 등이 원인이 됐다.

종전과 달리 미국이 적극성을 보이는 가운데, 2013년부터 양국간 접촉이 비밀리에 개시됐다. 하지만, 협상이 생각처럼 속도를 내지는 못했다. 50여 년간 누적된 상호 불신의 벽이 쉽게 허물어질 리 없었다.

바로 이때, 중재자로 부각된 인물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교황의 중재 역할을 원했던 것이다. 2014년 3월부터의 일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을 요청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현상이 이때부터 백악관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이 상황을 조한승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논문 '건설적 관여의 역동적 시스템 모델을 통한 미국-쿠바 관계 개선 분석: 교황의 중개외교를 중심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당 하원의원 딕 더빈(Dick Durbin)이 수잔 라이스(Susan Rice)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쿠바와의 협상에 교황청을 관여시키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하였고..." - -2016년 한국평화연구학회가 발행한 <평화학 연구> 제17권 제4호에 실린 논문.
 
이 작업은 은밀히 시작됐다. 비밀 작업에는 미국 정계뿐 아니라 쿠바 및 미국의 가톨릭도 가세했다. 위 인용문의 "아이디어를 제안하였고"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어 패트릭 레히(Patrick Leahy) 민주당 상원의원이 하이메 오르테가(Jaime Ortega) 아바나 추기경, 시어도어 맥캐릭(Theodore McCarrick) 워싱턴 대주교, 숀 오말리(Sean O'Malley) 보스턴 대주교와 접촉하여 미국·쿠바 문제에 교황이 관여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직후, 오바마가 교황청을 방문해 중재를 요청하는 성의를 보이면서부터 교황의 개입이 본격화됐다. 물론 오바마가 교황청에 가서 중재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공개되지 않았다. 양국 간의 관계정상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비공개로 진행됐다. 오바마의 교황청 방문 이후의 상황은 이랬다.
 
"오바마 대통령이 2014년 3월 24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과 면담하였고, 교황은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에게 양국간 협상에서의 교황청의 중개 역할을 지시하였다.

그해 8월 교황은 오르테가 추기경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오바마와 라울 카스트로에게 서한을 전달하였으며, 교황은 서한에서 '양국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미국과 쿠바가 간첩 혐의로 장기간 수감하고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는 것이 공통의 이해관계인 동시에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내용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간첩 석방 같은 인도적 문제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라고 교황이 주문했다는 것이다. 이런 교황의 의사가 2014년 8월 양국 정상에게 전달됐다. 2014년 8월 14일,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 시기에 교황의 머릿속에서는 쿠바·미국 관계정상화가 중대 현안이었던 것이다.

교화의 말 한 마디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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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의 쿠바·미국 중재는 북미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보여주는 중재만큼 덜 절실할 수도 있었다. 전 세계를 염려하는 마음은 더할 수 있지만, 문제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므로 절실함이 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한 마디에는 웬만한 강대국 정상의 몇 마디보다 무게가 더 실릴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권위는 쿠바와 미국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2014년 여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을 때 교황의 특사가 중개자 역할로 협상에 관여해 돌파구를 열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위 논문은 말한다.

양국은 캐나다에서도 비밀 협상을 벌였지만, 교황청 건물에서도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2014년 10월과 11월에는 양국 대표가 파롤린 국무원장의 주재 하에 교황청에서 회담을 갖기도 했다.

이처럼 회담 분위기가 깨지지 않도록 교황청이 막아주는 가운데, 2014년 12월 17일 아바나 국가평의회 집무실과 워싱턴 백악관에서 양국관계 회복이 동시에 발표됐고, 이듬해인 2015년 7월 아바나와 워싱턴에서 미국대사관과 쿠바대사관의 문이 각각 열렸다. 아메리카대륙에서 동서 냉전이 최종적으로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아메리카판이라 할 수 있는 대형 사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복원되고 경제적 활로가 활짝 열리는 것을 목격한 이듬해에 피델 카스트로는 만 90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대미관계 개선으로 경제·외교 환경이 개선된 뒤였으니, 조금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을 법하다. 그의 나라가 미국과 손을 잡도록 하는 데 교황청과 쿠바·미국 가톨릭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선언 기자회견을 생중계하는 백악관 공식 누리집 갈무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선언 기자회견을 생중계하는 백악관 공식 누리집 갈무리.
ⓒ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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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피델 카스트로, #프란치스코 교황, #쿠바 미국 관계정상황, #버락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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