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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에 이어, 이번에는 '신대방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신대방동은 보라매공원을 동북서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동네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시흥군 하북면 우와피리(牛臥陂里)로 불렸다. 시흥군수를 비롯한 관공리의 가렴주구와 일제의 경부철도공사 강제동원에 맞서 온 군민이 함께 일어난 반제반봉건투쟁의 역사에 빛나는 시흥농민봉기(1차 1898년, 2차 1904년)에도 집강(執綱) 이용을 중심으로 적극 참여한 동네였다. 
 
신대방동 우성아파트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가 있던 자리에는 1985년 우성아파트가 들어섰다.
▲ 신대방동 우성아파트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가 있던 자리에는 1985년 우성아파트가 들어섰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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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 노동자들, 민주노조를 건설하다

신대방동 대림삼거리 인근에 우성아파트가 있다. 이 우성아파트 자리는 1985년까지 양복원단 킹텍스로 유명한 섬유업체 ㈜원풍모방이 있던 곳이자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 원풍모방노조(섬유노조 원풍지부)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곳이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삶이보이는창 펴냄) 등에는 '대림동에 있는 원풍모방'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림동은 신대방동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영등포구에 속한 동네다.

원풍모방의 모태는 1953년 6.25 한국전쟁 직후 세워진 한국견방이다. 이후 한국모방(1963)을 거쳐 1975년부터 원풍모방이 됐다. 원풍모방에는 한국모방 시절인 1963년부터 전국섬유노조 서울지역본부 한국모방분회로 시작한 노동조합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노조는 회사 측의 농간으로 설립 준비를 이끌던 이응준과 노덕규가 배재되면서 회사의 입맛에 맞는 손후기 분회장 체제로 출범한 어용노조였다. 지부로 승격한 1967년 이후에도 정영오를 지부장으로 했는데, 변함없이 어용노조였다. 

원풍모방에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은 1972년 '퇴직금받기투쟁위원회'(위원장 박용온)가 결성된 것이 계기가 됐다. 1971년 1월 이후 퇴사한 261명의 노동자들이 합계 1518만 원의 퇴직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용노조는 이미 퇴사한 사람들 문제라며 퇴직금 문제 해결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에 당사자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의 지원을 받아 농성투쟁과 함께 사회 각계의 연대까지 이끌어내면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가 하면, 각계 인사 1000여 명을 초청하는 대규모 대책회의를 추진하는 등 조직적 대응 끝에 퇴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한국모방노동조합 정상화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파업 투쟁까지 벌이고, 마침내 지동진을 지부장으로 하는 민주노조를 탄생시킨다. 이때 무려 1400여 명이 농성에 참여해 승리하는데, 당시 원풍모방의 파업은 놀랍게도 박정희 독재정권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발동해 모든 파업을 '불법화'한 상태에서 벌어진 최초의 사건이었다.

원풍모방에서 아래로부터의 힘이 폭발해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데에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배경이 됐다. 1966년 827명이었던 원풍모방의 노동자 수는 1967년에는 1418명으로 급속히 늘어난다. 이는 1960, 197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섬유산업의 급성장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총 수출 중 섬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2년 14.2%에서 1970년 40.8%로 급증하고, 이에 따라 같은 기간 노동자 수도 10만9000여 명에서 20만5000여 명으로 거의 2배 증가했다. 이들 섬유 노동자의 대부분은 농촌 출신의 여성이었고, 차언년과 같이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에 타인 명의로 원풍모방에 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소모임 활동의 성과가 쌓이면서 노조 민주화라는 커다란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원풍모방노동운동사발간위원회는 2010년에 <원풍모방 노동운동사>를 발간하였다.
▲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원풍모방노동운동사발간위원회는 2010년에 <원풍모방 노동운동사>를 발간하였다.
ⓒ 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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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 노조, 1970년대 민주노조를 선도하다

하지만 원풍모방노조가 민주노조로 자리를 잡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회사는 정상화투쟁위원회를 이끌던 지동진을 노조가 없는 노량진공장(제2공장)으로 전출조치 하는가 하면, 노조가 민주노조로 거듭난 이후에는 조합원 41명에 대해 해고 등 부당한 징계 조치는 물론 노동조합 탈퇴 강요와 같은 보복조치를 단행했다.

결국 조합원들이 삼삼오오 시내로 진출하여 600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기까지 한 끝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중재에 나서면서 해고자 복직과 보복조치 중단 등을 관철시키고 노조를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상범 총무와 방용석 교선부장이 파업과 농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되는 일도 벌어진다.

1971년 12월 일체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금지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진 이후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은 이들 두 명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명도 조합원들의 끈질긴 노력과 남북대화 분위기 속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곧바로 원직 복직됐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화된 원풍모방노조는 전태일의 혼이 담겨 있는 청계피복노조와 주길자를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한 동일방직노조 등과 함께 어느덧 노조 민주화운동의 선봉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후 원풍모방노조는 조합원이 최대 2300여 명에 달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원풍모방노조는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노조로 유명했다. 이는 노조 간부와 대의원은 물론 중간간부와 일반조합원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한 결과였으며, 함석헌·고은·김동길·이문영·문익환·문동환 등 당시 저명한 민주인사들의 강연을 접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든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아울러 영등포 산선과 가톨릭노동청년회와 연계된 소모임 활동도 큰 역할을 했는데, 탈춤반(회장 장남수)을 비롯해 그 숫자가 전성기에는 무려 80개에 달했다.

1970년대 내내 노동조합 위원장은 지동진과 방용석으로 이어지는 남성이 맡았지만, 박순희 수석부지부장 등 여성들이 주요간부를 맡으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활동의 중심에 섰던 것도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조직력이 있었기 때문에 조합비의 일부로 파업투쟁기금을 지속적으로 적립할 수 있었으며, 1973년 회사가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는 노조 대표(지동진)를 내세워 공동 경영에 참여해 회사를 살려내는 진기록을 세우는 힘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원풍모방노조,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함께 나누다

원풍모방 노조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광주에서 수난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470만 원을 모아 전달하는 연대정신을 보여준 유일한 노동조합이기도 했다.

1980년 당시에는 '광주시민들이 경상도 출신 계엄군을 집단으로 폭행했다'는 악의적인 보도가 쏟아져 나오면서 원풍모방노조 안에서도 두 지역 조합원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때 노조가 나섰다.

"노조는 이런 내부 갈등을 막고자 20일 동안 2300여 명의 조합원들에게 '5.18은 전두환 신군부에 맞선 의로운 투쟁'이라는 내용의 역사교육을 했다. 이런 가운데 광주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일신방직, 기아자동차, 로케트전자 등의 노조원들이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조는 회의를 거쳐 회사 식당에 모금함을 설치했고 1700여 명의 조합원들이 5월 말까지 470만 원의 '거금'을 모금했다. 민간 차원에서 모금한 사실상 최초의 '5.18' 성금이었지만, 계엄령 치하에서는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었다."(<계엄상황서 1700명 성금 모은 원풍노조 부지부장>, 한겨레신문)


이 일을 주도한 인물은 방용석 지부장을 대신한 박순희 수석부지부장(현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었다. 6월 초 비밀리에 광주로 내려간 박순희는 가톨릭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에게 모금한 성금을 전달했다. 이 성금은 당시 광주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활동했고 광주민주화운동에 함께 했던 정향자에 의해 5.18 피해자들의 생계비와 수배자들의 도피자금, 유족 위로금 등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이 일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한다. 박순희는 성금을 윤 주교에게 전하며 기부금 영수증을 부탁했다. 윤 주교는 "엉뚱하다"라며 한바탕 웃고는 장난처럼 영수증을 써줬다. 박순희가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영수증에 관한 한 대단히 엄격했던 방용석 지부장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영수증이 뜻하지 않게 훗날 방용석과 박순희를 위기에서 구하는 역할을 한다. 보안사와 안기부는 당시 모은 성금을 근거로 원풍모방노조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엮으려고 한다든지, 심지어는 "그 돈으로 북한과 접촉한 것 아니냐"고 몰아갔다.

이때 윤공희 주교가 써준 영수증을 제시하고 당시 언론에 "불순세력 때문에 무고한 시민이 다쳤다고, 국민들이 도와야 한다고 나와서 노동자들이 없는 돈에 애국하는 마음으로 모금을 했다"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원풍모방 노조 수석부지부장을 지낸 박순희(현 민주노총 지도위원) 지난 5월 5.18기념재단과 동작FM, 좋은세상을만드는사람들이 주최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원풍모방노동자들의 연대'라는 제목의 토크쇼에서 박순희 80년 당시 당시 원풍모방 노조 수석부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사진 왼쪽 사회자는 김도은 좋은세상을만드는사람들 대표, 오른쪽은 필자)
▲ 원풍모방 노조 수석부지부장을 지낸 박순희(현 민주노총 지도위원) 지난 5월 5.18기념재단과 동작FM, 좋은세상을만드는사람들이 주최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원풍모방노동자들의 연대"라는 제목의 토크쇼에서 박순희 80년 당시 당시 원풍모방 노조 수석부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사진 왼쪽 사회자는 김도은 좋은세상을만드는사람들 대표, 오른쪽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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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노조,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에 끝내 무너지다

그런 원풍모방노조였건만, 1982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끝내 쓰러지고 만다. 때는 추석을 며칠 앞둔 9월 27일이었다.

사실 원풍모방 노조는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노동계 순화 조치' 당시 노조간부들에 대한 구속과 수배, 해고는 물론 4명의 간부를 삼청교육대에 보내면서 자행한 민주노조 파괴 책동에도 버텨낸 조직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선순 조합장 체제하에서 소외감을 느낀 남성 조합원들을 부추겨 노노갈등을 유도하는 한편, 노조가 도시산업선교회의 지령으로 움직이는 양 호도했다. 이들은 "일부 도산 세력에 의하여 노동조합이 정상화되지 않고 있기에 남자들이 노동조합 정상화를 위하여 발 벗고 나섰으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조합사무실을 강제로 점거한 후, 정선순 조합장을 감금하고 심지어는 물고문까지 하면서 사퇴를 강요한다. 이들은 정선순이 끝내 거부해 실패하자 부대에 담아 외부로 옮겨 간 후 쓰레기 더미에 버리기까지 한다.

조합원들은 퇴근도 중지하고 3개 반이 돌아가면서 농성을 하고 추석 휴무 기간 귀향 활동도 중지하면서 싸웠지만, 폭력배와 경찰을 동원한 회사의 탄압으로 끝내 농성 4일 만인 10월 1일 추석날 새벽에 마지막 대오마저 회사에서 쫓겨난다.

이후 원풍모방 노조는 '민주노동조합 생존권 수호를 위한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며 10월 7일부터 27일까지 출근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추석 휴무를 연장하는가 하면 언론을 동원한 대대적인 왜곡보도, 폭력경찰과 구사대를 동원한 대대적 탄압으로 일관한 전두환 군사정권과 회사측의 폭압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풍모방 노조 파괴를 목적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이 전 역량을 동원한 '9.27사태'는 무려 559명의 강제 해고를 낳았다. 원풍모방 앞의 대림삼거리 일대를 전경과 폭력배를 한편으로 하고 원풍모방 노동자를 다른 한편으로 한 쫓고 쫓기는 일대 전쟁터로 만들었다.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원풍모방 노조 노동자들 1982년 추석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9.27사태'에 맞서 원풍모받 노조 노동자들이 정사과 기계 사이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원풍모방 노동운동사> 561 쪽)
▲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원풍모방 노조 노동자들 1982년 추석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9.27사태"에 맞서 원풍모받 노조 노동자들이 정사과 기계 사이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원풍모방 노동운동사> 561 쪽)
ⓒ 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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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 노조 파괴에 가담한 동작구청의 숨겨진 '흑역사'

이때 동작구청(당시 구청장 이원택)도 부끄러운 역사를 남긴다. 관악구에서 분구한 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1982년 4월 동작구청은 원풍모방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검찰, 안기부, 보안사, 경찰, 노동부 간부, 구청 등이 참석하는 '동작구 지역공동대책위원회'에 함께했고, 그해 7월 '확대 지역노동대책회의'(동작구, 영등포구)가 소집될 때는 동작구청장실까지 제공하면서 이원택 구청장이 이종석 노량진경찰서장과 함께 직접 참석했다.

여기에 '9·27 사태' 이후인 10월 30일 자 경찰의 <원품모방 정상화를 위한 특별지시>라는 제목의 '전언통신문'에는 "본 건은 사회 안정을 위한 중요 사안으로 가히 유관기관 산하에도 지시가 전달되어 각 구청장 주관으로 실시하니 경찰, 노동부, 지방사무소, 안기부, 보안사 지역 담당 등과 총력 협조하여 본 건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돼 있고, '순화대상'에 대한 결과 보고를 요구하면서 "구청장, 서장, 노동부 지방사무소장 등 관내 기관장이 직접 방문순화를 원칙"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원택 당시 동작구청장은 가장 바쁘게 '순화대상'을 만나고 다닌 인물의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민조노조의 상징 원풍모방노조, 명예회복하다

원풍모방노조는 이렇게 무너졌지만, 1984년 1월에는 특별기금으로 신길동에 연립주택을 마련해 '원풍의 집'이라고 이름 짓고, 원풍모방노조를 사실상 법외노조로 유지했다. 이어 원풍모방 조합원들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결성(1984)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우리 사회 민주화에 지속적으로 기여한다.

세월이 흘러 2001년 4월에는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원풍모방 노조의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고, 2007년까지는 조합원들은 156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는다. 안기부, 보안사, 검찰, 경찰, 동작구청 등의 노조 파괴 개입 사실이 확인된 것도 이 과정에서였다. 이로써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 역할을 했던 지위를 국가기관으로부터도 인정받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5월에는 원풍모방노조가 (사)오월어머니집이 주는 '제1회 오월어머니상'도 수상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광주에서 수난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470만 원을 모아 전달한 연대정신을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리라.

원풍모방 노조 노동자들의 위대한 정신을 기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표석'이나 '동판'이라도 설치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간직한 채 이제 대학생 박종철의 꿈을 더듬어볼 수 있는 '세왕전기 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이 글은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와 박순희 원풍모방 노조 당시 수석부지부장의 인터뷰에 기반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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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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