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7 09:23최종 업데이트 18.11.27 13:41
날카로운 통찰과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는 2030 칼럼 '해시태그 #청년'이 매주 화요일 <오마이뉴스> 독자를 찾아갑니다. 박정훈님은 배달노동자로 배달하는 사람들의 노동조합 '라이더 유니온'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피자가게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다친 라이더(오토바이 배달원)가 상담을 해왔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산재지정병원을 검색해서 거기서 치료를 받으라 했다. 라이더 대부분이 아파도 참고 일하기 때문이다. 산재지정병원에 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일하다 다쳤다", 이 한마디다.

산재지정병원이 아니더라도 진료기록을 가지고 근로복지공단을 따로 방문해서 산재신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절차가 생각보다 귀찮기 때문에 산재지정병원을 가는 게 낫다.

엉뚱한 병원을 '산재 병원'으로 안내한 근로복지공단

그렇게 해서 치료를 받은 라이더는 며칠 후 병원으로부터 황당한 말을 들었다. 알고 보니, 그 병원은 산재지정병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종전 산재지정병원이던 병원이 폐업하고 그 자리에 다른 병원이 들어왔는데, 홈페이지에는 업데이트가 안 되었던 거다. 병원도 공단도 몰랐다.


할 수 없이 서류를 준비해서 근로복지공단을 찾았지만, 공단 측은 진단서(초진소견서)가 잘못됐다며 다른 산재지정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서를 떼오라고 했다. 마침 병원들은 예약들이 꽉 차있었고 몇 군데를 더 돌다가 중형 규모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진단서 떼는 데만 2만원 더 들었다. 그런데 이 병원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첫 번째 병원 치료가 잘못돼 신경이 손상될 수 있으니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는 거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손상보다 신경을 긁는 일은 사라진 통장잔고였다. 공단의 잘못된 안내로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산재처리도 늦어졌다. 당장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지인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카드값은 밀려 매일 아침 카드사의 전화를 받았고 즉석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게다가 매장에서 산재처리를 해주겠다고 나섰으나, 피자가게 본사의 산재 담당자가 서류를 늦게 보내서 처리가 안 됐다. 결국 11월 22일 라이더유니온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복지공단 서부지사 지사장과의 면담 이후에야 산재승인이 떨어졌다.

공단의 잘못된 안내, 어느 회사의 서류 한 장, 어느 병원의 진단서 한 장은, 붕 뜬 50일의 시간을 만들며 재해 노동자의 생계와 정신을 무너뜨렸다.
    

맥도날드 라이더(자료사진) ⓒ 선대식

   
보이지 않는 산재절차 

문제는 50일의 물리적 시간만이 아니다. 산재를 당한 순간, 노동자들은 하루를 남들보다 길게 산다. '일하다 다쳐서 아파서 출근을 못하는데, 무단결근 처리한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다른 상담사례다. 일하다 다치면 당연히 산재처리를 해야 하지만 이 노동자는 그냥 집에서 쉬는 것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산재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노동자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장님이 싫어한다고 생각해서다. 

함께 소주 먹기를 좋아하는 매장의 40대 동료는 일하다 사고가 났는데 산재처리하고 쉬라는 말에 "내가 산재처리하고 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힘들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 자기 부주의로 회사와 동료에게 피해를 줬다는 죄책감은 통과하기 힘든 산재처리의 중요한 과정이다. 그가 산재처리를 포기하게 만든 건 나였다.

"병원 가서 일하다 다쳤다는 진단서 떼시고요, 매장 가서 최근 4개월간의 임금대장, 사업장관리번호 알아 오시고, 사고 당시를 입증할 수 있는 CCTV 자료나 증언자만 있으면 돼요."

그는 "에이 귀찮아, 안 할래"라고 답했다. 산재처리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고민인데, 임금대장이나 사업장관리번호 물어보면서 사장을 귀찮게 하는 일은 더 두렵고 귀찮은 일이다. CCTV를 도대체 어떻게 구하란 말인가.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증언자는 또 어디서 구하나?

다친 사람이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재해를 입증하기 위해 발로 뛰어야 한다. 게다가 산재처리를 노동청이 하는지 근로복지공단이 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은 산재처리 과정 자체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11년 8개월 만에 지켜진 약속, 교훈 얻어야

가장 대표적인 산재였던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가 드디어 해결됐다. 고 황유미씨가 산재를 인정받고 사과를 받는 데 11년 8개월이 걸렸다. 그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유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재보험제도와 근로복지공단 개혁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국민들은 이미 안다. 산재보험은 내더라도 타기 어렵다는 걸. 가끔은 인생을 걸어야 한다. 타지도 못할 보험을 강제로 들게 하니, 사람들은 보험을 '세금'이라 부른다. 심지어는 개인사업자 소득세 3.3%를 떼는 게 4대 보험을 내야 하는 직장보다 좋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국민들의 무지가 아니라 국가의 '무능'이 만든 결과이다.

여기 또 하나의 약속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공단의 실무인력으로는 감당하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사 된다고 해도 타먹기 어려운 보험에 가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공단 직원들을 대폭 늘리고, 산재처리를 도와주는 국선노무사제도를 도입할 필요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과 한 약속은 11년 8개월보다 일찍 이루어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근로복지공단에 가면 받을 수 있는 안내책자에는 양준혁 선수가 방망이를 휘두르며 '부정수급자'를 날려버리겠다고 하고 있다. 부정수급자는 조사하면 그만이지, 재해자에게 나눠주는 홍보물로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팬으로서, 그의 방망이 위에 산재은폐 날려버리겠다는 문구가 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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