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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부터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8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가 되었습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말
 
소백산 연화봉에서 바라본 비로봉의 설경 사진. 충북 제천에 사는 이병일 선생님은 군산 한길문고로 전화해서 내 책 아홉 권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이 아름다운 사진도 카톡으로 보내주셨다.
 소백산 연화봉에서 바라본 비로봉의 설경 사진. 충북 제천에 사는 이병일 선생님은 군산 한길문고로 전화해서 내 책 아홉 권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이 아름다운 사진도 카톡으로 보내주셨다.
ⓒ 이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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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눈 왔어."

열 살 먹은 꽃차남을 아침에 깨우는 방법 중 하나다.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아이는 일어난다. 비칠비칠 걸어서 거실로 나간다. 아무것도 내리지 않은 바깥을 확인하고는 소파로 가서 모로 눕는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짜증을 낸다.

"거짓말! 엄마는 이러는 게 재밌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뒤로 속아온 꽃차남. 엄마가 제 형에게 장풍을 쏘아서 침대로 날려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부정했다. "거짓말!" 보고도 믿지 못하는 꽃차남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서 꽃차남 어깨에 두르고, 왼손으로는 꽃차남 왼손을 잡았다. 내가 생각한 진중한 자세였다.

"꽃차남아, 엄마 한길문고에 취직했어. 너 학교 갔다 오면 집에 아무도 없을 거야."
"거짓말! 내가 엄마한테 또 속을 줄 알아?"


믿을 수 없겠지. 꽃차남이 평생을 봐온 엄마라는 사람은 방문을 닫고서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어딘가로 출근해서 일하는 엄마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점은 나도 동감! 이번 생애에 내가 근로계약서를 쓰고 출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는 작은서점인 예스트서점과 우리문고에 문학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리고 한길문고에서는 글쓰기 고민상담소, 독서클럽, 에세이 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는 작은서점인 예스트서점과 우리문고에 문학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리고 한길문고에서는 글쓰기 고민상담소, 독서클럽, 에세이 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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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의 서점 상주작가는 주 5일 근무를 한다. 시간과 요일은 선택사항. 남들 일할 때 쉬는 쾌락을 포기할 수 없는 나는 평일 중 하루를 휴일로 삼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진행하는 예스트서점과 우리문고 작가 강연회는 토요일에 몰려 있으니까 수요일과 일요일에 쉬겠다는 근로계약서를 썼다.

한길문고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8분 거리다. 돈 맥클린이 부른 '빈센트'를 두 번 듣거나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를 한 번 듣고 다시 절반쯤 들으면 서점에 도착한다. 한길문고는 2층, 가끔은 바깥 계단에 서서 노래를 한 곡 더 듣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밖에는 한 발짝도 못 나갔던 삶의 자세는 출근한다고 확 바뀌지 않았다. 쨍한 10월 뒤에 맞은 11월은 말도 안 되게 우중충했다.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위기가 찾아오고 말았다. 움직이기가 싫었다. 나보다는 출근 스펙을 잘 쌓아온 남편을 잡고 하소연할 수밖에.

"여보, 어떻게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도 출근하지?"
"그냥 일어나면 직장에 가는 거야. 날씨 따지면서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나도 4대 보험 되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 날씨는 수요일에만 따지기로 마음먹었다. '수요일엔 빨간 장미'보다 흐린 날씨가 잘 어울린다고 혼자 정했다. 함부로 부는 바람이 낙엽을 쓸고 다니는 주차장을 보며 생각했다. 아파트가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을 날씨에 출근 안 하니까 좋군!

11월 21일 수요일. 그날도 하늘은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았다. 당연하게도 비가 내렸다. 나는 집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4시 10분,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한길문고 문지영 대표님이 "회현중 2학년 학생들이 상주작가를 찾아왔어. 배지영 책 <소년의 레시피> 읽고 왔대"라고 했다.

"나 쉬는 날이잖아요."

나는 공과 사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미 스마트폰의 스피커폰을 켰다. 스타킹을 찾아 신으면서 전화 통화를 이어갔다. 서점 직원에게 학생들 중 한 명을 바꿔 달랬더니 "내가 받을래!"라는 누군가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코트를 입으면서 물었다.

"학생들은 언제까지 시간 나세요?"
"(웃음) 작가님 오실 때까지요. 우리 시간 많아요."
 

그 말을 듣고는 도저히 굼뜨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말랑말랑해진 나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숨이 차서 입은 벌어지고, 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와서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신기록 달성! 평소보다 1분 30초를 단축한 6분 30초 만에 도착했다.
 
<소년의 레시피>를 읽고서 군산 한길문고로 갑자기 찾아온 학생들. 웃음소리도 예쁘고, 표정도 보들보들하고, 모든 것이 근사한 중2 학생들이었다.
 <소년의 레시피>를 읽고서 군산 한길문고로 갑자기 찾아온 학생들. 웃음소리도 예쁘고, 표정도 보들보들하고, 모든 것이 근사한 중2 학생들이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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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웃음소리와 보들보들한 표정을 가진 학생들은 "작가님 자리는 상석이에요"라면서 미리 만들어놓은 자리에 나를 안내했다. 그러나 맨 뒤에 앉은 학생들하고 눈 맞춤이 안 되니까 나중에는 가운데 자리에 껴서 앉았다.

"<무한도전> 끝났는데 이제 무슨 프로그램 보세요?"
"<소년의 레시피> 주인공은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아들이 해준 음식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있었어요?"
 

학생들은 책 바깥의 얘기를 물어봤다. 독자들은 소중하니까 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뭐 먹을 때마다 "형형이 한 건 맛없어"라고 말하는 꽃차남을 궁금해 하길래 사진을 보여줬다. "꺄아!"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도대체 누가 '중2 무서워서 북한군이 못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나. 회현중 2학년 학생들은 참말이지 예뻤다.

생애 처음 저자가 사인한 책을 갖게 된 학생들과 같이 사진 찍고, 전화번호를 땄다. 학원을 '째고' 온 학생들은 저녁밥 먹으러 뷔페 가기 전에 먼저 서점으로 왔다고 했다. "작가님 휴일인 줄 몰랐어요. 쉬는 날에 불러서 죄송해요"라고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갔다.
  
학원을 '째고' 온 학생들. 저녁밥 먹으러 가기 전에 한길문고 상주작가를 보러 왔다. 내가 쓴 책<소년의 레시피>를 읽고 온 학생들은 책 바깥에 있는 내용을 질문했다.
 학원을 "째고" 온 학생들. 저녁밥 먹으러 가기 전에 한길문고 상주작가를 보러 왔다. 내가 쓴 책<소년의 레시피>를 읽고 온 학생들은 책 바깥에 있는 내용을 질문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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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시간 뒤. 학생들은 먹기 대회를 열었다면서 사진을 보내왔다. 한 사람 당 여섯 접시를 먹었다는 자랑스러운 소식이었다. 아! 서점에는 상주작가가 있고, 책을 읽고 나서는 식욕이라는 게 폭발하는 학생들이 있는 이 도시는 근사하구나.

휴일의 경계를 허물고 나니 수요일에 가끔 출근하는 것도 괜찮았다. 날씨 따위는 따지지 않았다. 12월 5일 수요일 아침에도 나는 한길문고로 갔다. 전날 서점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덕분이었다. "배지영 작가 책을 사면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서점 직원은 나를 바꿔주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한길문고로 오시면 돼요."
"여기는 충북 제천입니다."


내가 출간한 책 아홉 권을 주문한 이병일 선생님. "배지영 작가가 쓴, 군산의 청년들 이야기를 읽고는 뭉클했어요"라고 했다. 덩달아서 나도 울컥했다. 작은 도시에 사는 무명의 작가를 인터넷으로 검색한 이병일 선생님. 한길문고를 알아낸 그 정성이 고마웠다.
 
충북 제천에 사는 이병일 선생님이 산책하다가 강둑에서 우연히 만난 고라니.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충북 제천에 사는 이병일 선생님이 산책하다가 강둑에서 우연히 만난 고라니.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 이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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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택배로 보내기 위해서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이병일 선생님은 그날 오후에 강둑에서 마주친 고라니 사진을 내게 카톡으로 보내줬다. 가만히 마주보면서 얼굴 익히기를 했다는 그 장면이 그려졌다. 선생님이 해준 말은 한없이 다정하게 다가왔다.

"배 작가님과 통화해서 기억에 담아두는 날입니다."

쉬는 날에 출근한 나는 책에 사인할 글을 먼저 노트북에 써봤다. 200자도 안 되는 글을 몇 번이나 고쳐 쓰고 나서야 완성했다. 불 꺼진 방 안에서도 반듯하게 글씨를 쓴 한석봉처럼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서 책의 앞면에 썼다.

"이병일 선생님이 군산 한길문고로 전화 걸어주신 어제는 저한테도 '기억에 담아두는 날'입니다. 군산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준 것도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사는 곳은 여기서 약 250km. 저보다 먼저 선생님을 만나 뵙는 제 책들의 뒤를 따라서 언젠가는 가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보다 먼저 충북 제천으로 가서 이병일 선생님을 만나뵙게 되는 책들. 언젠가는 책이 간 길을 따라서 선생님을 만나뵐 수 있겠지. 고맙습니다.
 나보다 먼저 충북 제천으로 가서 이병일 선생님을 만나뵙게 되는 책들. 언젠가는 책이 간 길을 따라서 선생님을 만나뵐 수 있겠지. 고맙습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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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충북 제천 이병일 선생님,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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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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