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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고기, 술, 건배사... 연말 하면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기름과 숙취에 찌들지 않고 한 해를 마무리할 순 없을까요? 좀 더 색다르고 재밌게 연말을 나는 법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투투'를 기억하는가? 만난 지 22일째 되는 날이 투투다. 내가 중학교 때는 투투를 챙기는 게 유행이었는데 요즘 애들은 유치하다며 그런 건 안 챙길지도 모르겠다. 투투가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200원씩 받아서(받은 건지 뜯은 건지) 남자친구와 떡볶이도 사 먹고 팥빙수도 먹었다.

생각해 보면 남들이 다 챙기는 100일 대신 투투를 챙긴 건 100일까지 갈 인내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길게 만나야 100일, 짧게 만나면 투투가 지나자마자 헤어지곤 했다. 내가 소위 '발랑 까진'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에 다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애들은 다 그런 건지.

'쓸모없는 선물대전'의 승자
 

어쨌거나 나는 기념일 챙기기를 참 좋아했다. 매년 생일을 워낙 화려하게 치러서 친구들이 혀를 내두르곤 했다. 서른 살 생일에는 아예 공간을 빌려서 공연도 하고 그림도 전시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다 불러 앉혀놓고 축사도 시켰다. 어우, 진상이다.

진상이라 자책해 놓고 또 파티를 연다. 남미여행을 다녀 왔으니까 웰컴파티(누가 열어준 게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같이 해 보고 싶으니까 어떻게 파티, 출판사 연 지 3주년 됐으니까 3주년 파티.

연말에는 꼭 친구들과 이벤트를 했다. 송년회라고 모임 날짜를 잡으면 그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뭔가 이벤트를 하고 싶어 머리를 짠다. 각자 1만 원 이내의 선물을 사 와서 만난다든가, 백 원부터 오만 원까지의 선물을 산 후에 무작위로 나누어 가진다든가, 동물 모양 털모자를 쓰고 만난다든가, 사놓고서는 절대 입지 않을 옷을 입고 만나는 식이다.
  
 연말엔 선물 교환 이벤트를
 연말엔 선물 교환 이벤트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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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쓸모없는 선물 대잔치'를 했다. 송년회 하기 전에 각자 선물을 마련해서 가져오는 이벤트였다. 중요한 것은 정말 쓸모가 없는 선물이어야 한다는 것. 사와도 상관없고 집에 있는 걸 가져와도 상관없었다. 그야말로 재치경쟁! 이 게임의 목표는 모두를 웃기고 나의 재치를 뽐내는 것이었기에 다들 고민을 열심히 했다(돈이 안 되는 일은 늘 이렇게 재밌다).

만나서 각자 가져온 선물을 풀어 놓았는데 얼마나 빵빵 터지던지. 선물들은 중요한 무언가 빠져 있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인데 충전기가 없다거나(잃어버렸다고 한다), 머리 이를 잡아준다는 참빗 같은 것이다. 심지어 참빗을 가져온 친구는 탈모인이었다. 그는 그런 걸 대체 어디서 왜 산 건지. 그때 모인 우리는 결혼한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솔로였는데 그 점을 공략했는지 성인용품을 가져온 친구도 있었다.

백미는 한 권의 책이었다. 그가 책을 가져왔다고 하자마자 포장지를 벗기기도 전에 우리 모두 쓸모가 없다고 타박하기 시작했다. (출판 편집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만만하게 이보다 더 쓸모없는 물건은 없을 거라며 포장을 뜯었다. 거기엔 우주의 기운을 믿으시는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이 있었다!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이 게임에서의 전의를 상실했다. 그것은 명백히 그의 승리였으니까! 다들 저것은 라면 받침으로도 무용하며, 너무 두꺼워서 베개로도 쓸 수가 없으니 네가 일등을 하라고 얌전히 왕좌를 내주었다. 그는 왕좌에 앉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면 주는 루돌프 머리띠를 쓰고 의기양양했다. 과연 온 우주가 나서서 그를 도와준 것 같았다.

내가 시간을 붙드는 방법
 
 연말에는 거리 풍경만 봐도 설렘
 연말에는 거리 풍경만 봐도 설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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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번은 '사 놓고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 입기' 이벤트를 했다. 이상하게도 누구나 그런 옷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나가 아니라 대여섯 벌은 됐다. 개화기 모단걸이나 입었을 법한 원피스를 입을지, 베트남에서 사온 아오자이를 입을지, 빨간 가죽치마에 초록색 니트를 입을지 고민했다(언니는 이 옷을 입은 내게 크리스마스트리 같다고 했다).

결국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 집을 나섰는데, 만나고 보니 친구들이 입은 옷이 워낙 괴상해서 내 몸에 오너먼트라도 달고 머리에 별 모양 모자라도 쓰지 않는 이상 나는 이 미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정상인 같았다.

다들 이상한 옷을 입고 왔지만 그중 우승자는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온 친구였다. 그는 당시 사두고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있느라 입지 못했던 것이 한이었노라며, 'Be the reds'라고 휘갈겨진 붉은악마 티셔츠 차림으로(심지어 춥다고 안에는 히트텍을 두 개나 입고) 나왔다. 그의 곁에서 걷느라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조명 켠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얼굴이 한없이 붉어졌던 내가 떠오른다.

이벤트를 챙기는 내게 엄마는 참 유별나다고 한다. 어차피 매년 돌아오는 생일, 오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도 또 돌아오는 연말, (엄마 말마따나 결국 또 헤어질) 연인과의 백일을 챙긴다. 동지에는 동짓날이라며 팥죽을 먹자고 하고, 밸런타인데이에는 천 원짜리 초콜릿이라도 입에 넣으려고 하니 동서양 짬뽕, 정체불명의 이벤트 애호가라 불릴 만하다.

물리학 박사인 친구는 시간은 연속적이며, 일 년을 열두 달로,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 것도 인간의 편의 때문이니 호들갑 떨 거 없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중간중간 축포를 터뜨리는 것이 좋다. 시간을 붙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일을 허겁지겁 해치우다 보면 언제 나이가 들었는지도 모르게 주름이 생기고 뱃살이 는다. 사랑은 식고 나는 천천히 죽음에 가까워진다. 그런 줄도 모르면서.

하여, '잠깐만!'을 외치고 쉬었다 가는 것이 좋다. 그래, 네가 졸업을 했지. 그래, 너는 한 살이 더 먹었구나. 어머, 우리 사랑이 이렇게 오래 됐구나. 아니, 그러고 보면 올 한 해 내가 어떻게 살았던가. 그렇게 쉼표를 찍어가면서. 아름다운 순간을 만난 파우스트의 마음으로. 도무지 속도를 늦춰주지 않는 시간을 붙들어가면서, 사진을 찍고 케이크를 자른다.

또 연말이다. 달력에는 덩그러니 12월 한 장이 남았다. 매서운 찬 바람을 뚫느라 가는 실눈을 뜨고 걸음을 재촉하다가도, 도심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트리를 보면 왠지 기분이 들뜬다. 한 살 더 먹는 이 차가운 겨울을 견디라고 송년회를 하고, 크리스마스를 챙기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걸까. 그렇다면 좋다. 춥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우리 만나자. 한 해를 잘 보내주자. 이번에는 어떤 이벤트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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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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