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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생 김지영'으로 본 나의 가족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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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생 김순희

우리 엄마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이다. 집에서 일이나 하라는 외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다니던 국민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시골 깡촌에서 10대 시절을 집안일과 농사일을 하며 보내다 중매쟁이의 거짓 정보에 속아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10마지기의 논은 온데간데 없고 봄이 되면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중매쟁이가 말한 번듯한 집은 시부모님과 시동생들, 신혼부부였던 아버지, 엄마가 겨우 테트리스 퍼즐 맞추듯 잠을 청해야 하는 방 2개가 있는 초가집이었다.

신혼시절 밤이면 막막함에 소리 없이 숨죽여 아궁이 앞에 쪼그려앉아 울었고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때마침 생긴 큰누나로 인해 탈출은 감행되지 못하고 오히려 농사일과 집안일은 처녀 시절의 몇 곱절이 더해졌다.

큰누나를 낳고 2년 뒤 또 다시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하는 성별의 작은누나가 태어났다. 엄마는 죄책감과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산후조리 없이 출산 후 이틀 뒤 모내기를 위해 아버지가 소작하던 논으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2년 뒤 드디어 우리 집 대문에는 빨간 고추가 달린 금줄이 걸렸다. 남자인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그렇게 먹고 싶었던 미역국을 보름 넘게 질리도록 먹었다. 할머니의 산후조리를 받으면서.

70년생 조호경

큰누나는 작은누나와 나에게 항상 양보를 하며 살았다. 생존본능이 강했던 작은누나에겐 성질에서 밀렸고, 아들인 나에겐 너무도 당연히 맛있는 반찬과 과자를 양보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양보하며 동생들을 살뜰하게 보살피며 정신없이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시골이었지만 공부도 곧잘 해서 중고등학교 내내 전교 3등 아래로는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다음의 대학교 공부는 여자인 큰누나에게 꿈꾸면 안 되는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고등학교 마치기 전 내쫓기듯 대구 시내에 있는 월급 18만 원의 백화점 판매원으로 취업을 나갔다. 큰누나가 그렇게 집을 떠나고 엄마는 매일 아침 부엌에서 그렇게 울었다. 듣기 싫었지만 알 듯 모를 듯한 미안함과 조금의 죄책감에 감히 엄마에게 뭐라 항의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중학생이던 날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야! 공부 열심히 해라. 커서 누나한테 잘 해레이. 큰누나 생각하면 아부지가 많이 부끄럽고 미안타!"

난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큰누나는 열심히 일했고 매달 월급의 절반 이상을 집으로 보냈다. 큰누나는 집안에 하나뿐인 아들인 내가 대학생이 되자 자기가 일하던 백화점으로 날 불러 양복과 넥타이를 사주었다. 그 양복값은 그 당시 큰누나 월급보다 분명 많았다. 그리고 내 손에 용돈 5만 원을 쥐여 주었다.

77년생 문성원

대기업을 다니다 힘에 부쳐 퇴사하고 서울에 있는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후배로부터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다. 아내는 부산에서 잘 나가는 학원 원장이었다. 아내는 당당했고 돈도 나보다 훨씬 더 잘 벌었다. 서울과 부산 사이의 장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 아내는 나에게 비싼 선물도 많이 했고 밥도 아내가 많이 샀다.

부산에서 신혼집을 차렸다. 아내는 부산에서 일을 하고 난 계속해서 서울에서 일을 했다. 첫째가 태어났지만 장모님의 도움으로 아내는 계속해서 일을 했고 돈을 벌었다. 아내의 경제 활동에 일 년 만에 7천만 원 가까운 전세자금 대출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주말이면 서울로 돌아가는 내 주머니에 5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몰래 찔러주기도 했다.

그리고 신혼집 2년 전세기간이 끝나가던 때에 둘째를 가졌고 우린 경기도 수원으로 살림을 합쳤다. 남자가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남편 뒷바라지하며 아이들 잘 키워야 한다는 나와 양가의 묵시적 합의에 아내는 전업 가정주부가 되었다.

연애시절 백화점 옷에 백화점 화장품이 주 소비패턴이던 아내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백화점에서 옷과 화장품을 사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옷장에는 처녀 시절 옷밖에 없고 사소한 인터넷 쇼핑도 나에게 허락을 구한다. 얼마 전 아내는 한 달에 50만 원 받는 문화센터 강의 자리가 났다면서 흥분을 하다가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는 내 질문 한방에 그만 한숨을 쉬며 포기해 버렸다.

82년생 김지영
  
이 책을 읽었다고 한 걸그룹 멤버는 SNS에서 사진이 불태워지고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인 김지영 역을 맡은 배우는 폭탄처럼 쏟아진 악플과 비난에 감당이 힘들 지경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이 책이 페미니즘이 만든 베스트셀러라고 하며 은근히 남녀를 갈라놓는다.

내가 읽은 '김지영'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앞서 말한 우리 엄마, 큰누나, 내 아내 모두 이 책에 나오는 김지영보다 훨씬 더 비합리가 당연시되는 시대를 살아 왔다. 굳이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자'이기 전에 그들 모두 내 옆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해 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 군대에 관한 기사, 특정 여자 직업군에 관한 이야기, 여성 치어리더, 페미니스트 등에 관한 내용이 인터넷 기사로 올라오면 그 밑에 달리는 댓글은 너무나 뻔해 식상하기까지 하다. 식상하지만 댓글의 내용은 남녀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의 날카롭고 거친 표현이 오고 간다.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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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엄마와 누나들이 생각나 한참을 울었다. 그녀들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 이해의 수준은 그녀들이 지낸 삶의 무게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김지영씨의 외삼촌처럼 여자 형제의 희생 속에 삼 남매 가운데서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김지영씨의 남동생처럼 10개의 과자가 있으면 나이순에 상관없이 누나들이 3개씩 가지고 난 4개를 갖는 특혜를 누려온 평범한 '남자'이다. 기껏해야 김지영씨의 남편처럼 보통의 대한민국 남성보다 아주 조금 더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분명 여성들은 억압과 차별을 받아 왔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왔다. 남녀평등이 강조되고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가자 반대의 생각을 가진 일부 남성들이 반발하고 때론 사회적으로 위험한 일탈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와 함께 이러한 여성 혐오에 남성 혐오가 대응하면 양측 모두 극단으로 치닫는다. 

페미니즘적 인식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평등'과 '차이'의 대립이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평등의 본질적인 개념은 페미니즘에서 또 다른 논쟁거리만 제공할 뿐이다.

아직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을 생물학적인 성(sex)의 개념에서 바라보고, 일부 여성들은 지나치게 사회적인 성(gender)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논쟁을 낳고 지나침은 사회적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페미니즘과 성 평등에서 가장 중요한 타협의 열쇠인 '이해'와 '배려'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느낌이다. 

2014년생 조유나

내 딸이 태어난 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49, 72, 77, 82라는 십 단위 숫자 말고 14에 2000이라는 수를 더해야 한다. 그만큼 세대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분명 일부 사회적 영역에서 여전히 차별이 존재할 것이고 많은 논쟁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의 강도는 약해질 것이다.

그래서 내 딸이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는 페미니즘과 성 평등이라는 말이 역사적으로만 남아 있길 바라본다. 이렇게 말하면 난 어느 쪽에서 비판과 비난 댓글을 받게 될까?

82년생 김지영 (인터파크 리커버 특별판)

조남주 지음, 민음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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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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