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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여생을 손주들 돌보는 데에 쓰고 싶진 않다. 부디 서운해 하지 말거라."

결혼식도 올리기 전인데,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땐 단 1초도 주저함 없이 그럴 일 없을 거라면서 '절대'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단호히 대답했다. 마흔도 넘어 낳고 길러주신 당신께 손주까지 부탁하는 건 차마 막내아들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여겼다.

몇 해 뒤 아들을 낳았다. 이내 공식처럼 아내는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사회생활 8년여 만에 6개월 동안 전업주부가 되었다. 아내는 전업주부라는 바뀐 환경에다 생전 처음 엄마 노릇이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다. 30대 후반의 노산이었던 탓인지 밤마다 시름시름 앓곤 했다.

더욱이 아이는 '천형'이라는 아토피를 앓고 있었다. 태어날 때 단순한 태열처럼 보였던 피부는 날이 갈수록 붉어졌고, 긁을 때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온갖 좋다는 약을 구해다 먹이고 발라봤지만, 그때뿐 차도는 없었다.

긁지 못하도록 손싸개를 씌우고, 풍욕을 시키고, 수시로 보습제를 바르는 등 아내는 종일 아이 곁을 지켜야 했다. 격일제로 소아과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녔고, 처방받은 약을 삼시 세끼 밥처럼 아이에게 먹였다. 그것이 당시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내의 휴직 기간이 끝났다. 요즘 같으면 이어서 아빠가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테지만, 그땐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내가 기간을 연장하는 방법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조차 마땅치 않았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보다 제때 식사도 거를 만큼 종일 아이를 챙겨야 하는 아내의 고통이 더 커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픈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주변에 없었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집마다 제때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는다거나 끼니를 챙겨주지 않는다, 열이 펄펄 나도 애먼 공갈 젖꼭지만 물려놓는다는 흉흉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아토피를 앓는 아이인 터라 그런 괴소문들이 더욱 크게 들렸다.

아무리 웃돈을 얹어준다 해도, 아토피가 낫기 전엔 아이가 지낼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위로부터 아이가 갈 곳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조롱 섞인 말까지 들어야 했다. 결국에 당시 팔순을 앞둔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고, 얼마 동안 아이는 할머니 손을 탔다.

천만다행으로 아이의 아토피는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다섯 살 즈음부터 아빠와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일곱 살 때는 사흘간 지리산 능선을 종주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근본적 치료법이라는 걸 깨닫고 난 뒤, 먹거나 바르는 약을 모두 끊었다.

확답이 무색하게도 연로하신 어머니께 손을 내밀 땐 아토피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네 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난 뒤로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절한 바람대로 아토피 없이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믿고 맡길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대한 고민은 네 해가 지나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왜 중고등학교에는 병설 유치원이 없을까?"
 
충남 아산신광초등학교병설유치원(원장 오임석)의 아침 풍경은 조금 색다르다. 모든 유아들이 등원하고 아침 책 읽기를 마친 오전 9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안전교육이 시작된다.
 충남 아산신광초등학교병설유치원(원장 오임석)의 아침 풍경은 조금 색다르다. 모든 유아들이 등원하고 아침 책 읽기를 마친 오전 9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안전교육이 시작된다.
ⓒ 정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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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이고 주말이고 담임교사가 가정 방문하듯 직접 찾아가 묻고 또 살폈다. 집과 가까운 곳은 썩 내키지 않았고, 괜찮은 곳이다 싶으면 집에서 너무 멀었다. 이른 출근 시간에 맞춰 문을 여는 곳도 많지 않았고, 퇴근 시간이 늦다고 하면 이내 표정이 어두워지며 손사래를 쳤다.

고백하건대, '적어도 둘은 낳아야 본전'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따랐던 걸 후회했던 적도 있다. 아침마다 첫째를 차에 태워 초등학교에 등교시키고, 둘째를 유치원에 실어 보내야 하는 일상은 맞벌이 부부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딸린 병설 유치원이 있었지만, 거긴 누구 말마따나 '3대가 덕을 쌓아야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왜 초등학교엔 있는데, 중고등학교에는 병설 유치원이 없을까?"

등하교와 등하원을 책임지다시피 한 아내의 독백 같은 푸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학교마다 유치원에 자녀를 맡겨야 하는 젊은 교사들은 있고, 남는 교실 또한 적지 않을 텐데, 왜 유치원으로 개조해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직장 내에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현실성을 타진하기 위해 구청과 교육청, 유아교육과가 설치된 지역 소재 대학을 차례로 찾아갔다. 민원인의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으로 여겼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나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말했다. 전체 교직원의 동의와 학교장의 결단만 있으면, 일정 부분 예산 지원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답변도 들었다.

대학의 담당자는 설치 후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자상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중고등학교의 학사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어 가급적이면 독립적인 건물이어야 하고, 급식소의 운영 방식에도 융통성일 필요할 것이라는 등의 조언을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원아들이 지속적으로 확보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거라며 꼼꼼한 준비를 당부했다.

반색까지는 아니어도, 동료 교사들은 대체로 제안에 호응했다. 개중에는 실현될 수만 있다면 결혼과 출산을 앞둔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최고의 복지 제도가 될 거라며 반기는 이도 있었다. 한 학교만으로 수지타산 맞추기가 어렵다면, 인근의 학교들과 묶어 운영할 수도 있을 거라는 현실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기도 했다.

학교장의 결단만 남은 상태였다. 지금껏 운영 사례들을 모으고,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던 조언들을 자료로 묶어 학교장의 최종 승인을 얻기 위해 결재라인을 밟기로 했다. 우선 교감 선생님을 만나 구두로 취지와 기대 효과 등을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설명했다.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뿔싸. 연세가 지긋하신 교감 선생님은 '간절함'에 공감하지 못하셨다. 한 달 가까이 짬을 내 어렵사리 챙겼던 자료는 애초 꺼내 보여드리지도 못했다. 그에게 실현 가능한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거다. 외려 짧은 외마디 말로 간청을 무질러버리셨다.

"우리 때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같은 돌봄 시설 하나 없이도 아들 딸 네다섯씩 낳아 잘만 키웠네."

학교장의 결단은커녕 교감 선생님의 벽조차 넘지 못하고 야심찬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혼이라도 난 것처럼 풀이 죽어 나오는데, 동료 교사들이 다가와 시기상조라거나, 잡무가 늘어나게 될 거라는 등의 위로의 말을 한 마디씩 건넸다.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따금 '힘들게 아이들을 키워봐야 어른이 된다'는 충고도 들었고, 심지어 '자기 좋자고 학교에 부담을 준다'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술자리에서 오간 뒷담화라 정년을 앞둔 선배교사들의 반응이었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어느덧 두 아이는 '혼자서도 잘 하는' 나이가 됐다.

세월이 흘러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한 후배 교사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다. 학교 내에 어린이집을 마련하자는 요청도, 구청과 교육청의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도, 인근 학교와 묶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한결같았다. 그 역시 어린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애를 태웠고, 나름의 대안을 찾아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절박한 입장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선뜻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 커버린 마당에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과거 교감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무릎 꿇었을 때 애써 모른 척했던 후배 교사들에 대한 보복 심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지질함'은 당시 교감 선생님이 나의 '간절함'에 공감하지 못하고 요청을 무질러버렸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당장의 이해관계를 떠나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면, 먼저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어야 옳다. 아무튼 방관했고, 그의 바람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박용진 3법'을 가능케 하기 위한 방법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3일 국회에서 이른바 '유치원3법' 논의 등을 위해 열린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3일 국회에서 이른바 "유치원3법" 논의 등을 위해 열린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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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 관한 오래 전의 쓰라린 기억을 굳이 꺼낸 이유는, '박용진 3법'이 정기국회 내 처리가 무산됐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누가 뭐래도 '잿밥에만 관심을 둔'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책임이지만, 덧붙이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한유총이 국민정서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몰상식한 요구를 하는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싶다.

'표를 먹고 산다'는 자유한국당의 국회의원들이 국민정서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이번 사안을 지금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젊은 부모들만의 문제로 좁혀 인식한 탓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한유총의 행태에도 광장은 조용하기만 하다.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정치하는 엄마들'만 텅 빈 광장을 덥히고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박용진 3법'의 통과 여부는 지리멸렬한 국회가 아니라 광장의 '촛불'에 달린 성싶다. 한유총과 자유한국당을 어르고 달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여론을 환기시키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치하는 엄마들'의 손을 맞잡을 때라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박용진 3법'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시지탄이지만, 그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외면하지 않고 후배 교사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었더라면, 지금쯤 학교에 번듯한 어린이집이 마련돼 운영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나와 그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지라도 앞으로의 후배들을 위해서 선배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 글을 빌어 그 후배 교사에게 용서를 구한다.

태그:#박용진 3법, #육아, #한유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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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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