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국내 여러 대학에 문화예술경영학과가 만들어지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은 고(故) 강준혁 선생이 이끌었던 '다움문화예술기획'이었다. 미국 예일대나 UCLA처럼 문화예술경영에 관한 내용을 가르친다는 목적으로 설계된 이 교육과정은 고 강준혁 선생이 국내 문화예술계에 반드시 필요한 커리큘럼이라는 신념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문화예술계에는 다시금 '문화매개행정'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문화예술에 경영적 관점을 도입해 이른바 전문 예술을 효율적으로 기획, 제작, 홍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예술인을 무대 바깥으로 불러내어 시민과 함께 하는 매개자로 양성해야 하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한 새로운 교육과정이 탄생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 아래 '문화예술경영을 넘어 문화매개행정으로'라는 대담 기사를 기획·연재한다. 경희사이버대 문화매개행정 전공 강윤주 교수가 만난 세 번째 주자는 문화 매개자의 길을 처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영화 전공자 고찬호·이원준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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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사이버대 문화매개행정 전공 강윤주 교수가 만난 세 번째 주자는 문화 매개자의 길을 처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영화 전공자 고찬호(사진)·이원준 감독이다.

경희사이버대 문화매개행정 전공 강윤주 교수가 만난 세 번째 주자는 문화 매개자의 길을 처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영화 전공자 고찬호(사진)·이원준 감독이다. ⓒ 강윤주


강윤주 "영화제 제목이 특이하다. 왜 '은근슬쩍' 영화제인가?"

고찬호 "먼저 이 영화제가 어떻게 기획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제를 함께 만드는 직장인 연출가, 직장인 배우들을 만나게 된 것은 서울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지역특성화 예술교육지원사업'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구로디지털밸리 지역에서 일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영화 교육을 하자는 게 우리 단체의 취지였고 다행히 제안서가 채택돼 올 초부터 이 분들을 만나게 됐다." 

강윤주 "구로디지털밸리라면... 야근도 많고 일하느라 바쁘신 분들일 것 같은데 회원 모집은 어렵지 않았는지?"

이원준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 예산 지원을 하는 서울문화재단에는 15명에서 20명 가까이 모집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정작 모인 분들은 10여 명 남짓이었고 그나마도 오다 말다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 분들을 데리고 예정된 교육 프로그램을 계속 운영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다."

강윤주 "영화 교육 프로그램의 내용은 어떤 것들인가."

이원준 "처음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의 교육에 집중하고자 했다. 대본 쓰는 법, 콘티 짜는 법, 카메라 사용법 등 일반인들이 영화를 만들고자 하면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든 영화를 갖고 '직장인 영화제'를 만들자"

강윤주 "그런데?"

이원준 "서울문화재단의 '지역특성화 예술교육지원사업' 프로그램에서는 지원을 받는 단체들에게 컨설팅을 제공한다. 우리 단체에는 과거 영화제도 해 보시고 직접 영화 교육을 받기도 했던 컨설턴트 분이 오셨는데, 그 분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콘티 짜는 법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콘티북까지 따로 만들었는데, 컨설턴트 분 말씀이 오히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강조했다." 

강윤주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나?"

고찬호 "왜 영화를 만드는지에 대한 개인적 이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고 영화에 중요한 요소들인 빛과 움직임 등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글을 미리 공유해서 참석자들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얘기였다. 

사실 이전까지 우리 단체 '두번째 페이지'에서 진행한 공모 사업들에서는 대개 양적 성과나 홍보영상 등의 결과물을 중시했었기 때문에 영화 교육상의 과정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많지 않았는데 이런 컨설팅을 받고 나니 우리가 먼저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강윤주 "영화제에 대한 아이디어도 그럼 그런 논의 과정에서 나온 것인가."

고찬호 "맞다. 수강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역시 고민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수강생 모집이 어렵다는 점을 이야기하다 보니 홍보를 위해서라도 우리 단체의 활동을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툴고 거칠지만 우리가 만든 영화를 갖고 직장인 영화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은근슬쩍'이라는 말은 이 논의 과정에서 수강생 중 한 사람이 제안한 것으로, 기존의 영화제와 달리 우수한 작품들을 선정해서 상영하는 행사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만들고 어쩌다 보니 상영까지 이르게 된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서 '은근슬쩍'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이원준 감독은 "중요한 것은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어나가면서 수강생들이 변화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은근슬쩍 영화제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이원준 감독은 "중요한 것은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어나가면서 수강생들이 변화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은근슬쩍 영화제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 강윤주

 
강윤주 "영화제 트레일러에도 '은근슬쩍' 촬영과 편집에 끼어드는 직장인 남성 하나가 나온다. 재미있는 컨셉이다." 

고찬호 "수강생들과 영화제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했다. 생업이 따로 있으신 분들이니만큼 시간을 내는 일이 쉽지 않아서 지속적으로, 집중적으로 함께 논의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동을 받았고, 감동 받은 만큼 우리도 수강생들이 도저히 메울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채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강윤주 "한편으로, 영화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완성도로만 따지자면 크게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영화 교육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궁금하다." 

이원준 "처음에는 솔직히 '어떡해든 영화를 잘 만들게 해야지...' 하는 마음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제작 자체에 집중하는 커리큘럼을 짜기도 했고. 하지만 컨설팅을 받고 실제로 수강생들을 대하면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어 나가면서 수강생들이 변화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들은 자기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울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얘기를 이렇게 해 보는 게 처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2기를 운영하고 있는데, 1기 분들 중 반 정도 되는 분이 계속하겠다고 2기에도 합류를 하셨다. 2기에 합류하신 분들은 아마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뿌듯함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 중에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러면서 느낀 즐거움 때문에 계속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2기에 합류하신 분들이 자연스럽게 2기에 처음 오신 분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신다. 멘토 역할뿐 아니라 우리 단체를 위해서 수업 장소를 빌려주시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알아서 사오기도 하신다. 하나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나도 졸업영화를 찍거나 상업영화의 연출부 등에서 일하면서 영화 현장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 분들의 제작 과정은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도 어려울 것을 알았지만, 그리고 영화제 기획 경험이 한 번도 없지만 영화제를 기획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 분들이 만든, 비록 결과만으로 볼 때는 대단하다고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 과정을 함께 하신 분들이 보면 뿌듯하고 행간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같이 보면서 말 그대로 우리만의 영화 '축제'로 우리의 과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은근슬쩍 영화제,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작품들"

강윤주 "상영작 소개를 부탁한다." 

고찬호 "<사과가 좋아>라는 작품은 직장에서 계속 사과만 하게 되는 주인공이 작은 반란을 해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고, <누구에게나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는 매일 같은 분식점에서 식사하면서 만난 두 남녀의 썸 타는 이야기이다. <SHIT>은 늦은 귀가길에 매일 불안감을 느끼는 여주인공이 겪는 사건이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쉽게 공감할 일상적 내용들이다." 

강윤주 "본인들이 하는 일이 '매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지?" 

이원준 "어찌 보면 서울문화재단이 '지역특성화 예술교육지원사업'을 벌인 것 자체가 일종의 매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본다. 재단이 우리와 구로 지역 직장인을 처음 엮어준 것이라면 우리는 구로 지역의 직장인을 영화라는 매체와 연결시켜 주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포지션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영화를 공부한 나의 예술가적 정체성과 예술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예술강사 혹은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이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다 보면 다른 한쪽에는 반드시 결핍감이 찾아온다. 지난 1년간을 되돌이켜 보면 그 균형감을 찾지 못해 쏠림 현상이 있었고 그 현상의 끝에 꼭 회의감이 찾아왔는데, 내년에는 이 균형 잡기를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강윤주 "12월 21일 저녁과 22일 오후에 가리봉 도시재생센터에서 열린다고 들었다. 도시재생센터에서 열리는 국내 첫번째 영화제가 아닐까 싶다. 구로 직장인들 삶의 재생 열기가 넘치는 영화제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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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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