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25 15:49최종 업데이트 18.12.25 15:49
한 해를 보낸다. 보내야하니 뒤를 돌아본다. 올해도 술집보다는 양조장을 더 많이 찾아다녔다. 친구보다 양조장을 더 많이 만난 셈이다. 양조장을 찾아가면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귀하게 익어가는 술을 맛보게 되니 비록 말동무가 없더라도 위안이 된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 바라보는 양조장 대표의 눈빛이 아니라도, 자꾸 술이 말을 걸고, 내가 술에게 말을 걸게 되니 적막하지는 않다.

돌아보니 그리운 양조장이 있다. 논산에 있는 양촌양조장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923년 2월 이종진 대표가 가내양조로 술을 빚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좀더 분명한 기록은 양조장 대들보 상량문에 남아있다.

독특한 양조장 건물
 

양촌양조장 건물의 상량문 ⓒ 막걸리학교

 
상량문이 적힌 양촌양조장 건물은 독특하다. 한옥식 2층 목조로 지어졌다. 현재 나라 안에 1945년 이전에 지어진 양조장 건물이 더러 있다. 몇 채나 남아있는지 조사가 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목조식 일본 제조장을 본떠서 나무판을 덧댄 벽면과 높은 천정 밑으로 통풍구를 마련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양촌양조장은 서까래와 대들보가 있는 한옥 구조를 기본으로 삼아 발효에 적합한 구조물로 지어졌다. 발효실은 사계절 온도 변화를 줄이고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반 지하에 조성하였고, 그 위로 낮은 2층을 올렸다. 2층 천정 서까래가 얹힌 대들보에는 "昭和六年辛未六月初九日" 소화 6년 신미 6월 초9일이라고 상량문이 적혀 있다. 소화 6년은 1931년이다.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는 상량문이 있던 방은 술병 창고여서 상량문을 올려다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상량문은 양조장에서 가장 빛나는 문구가 되었고, 예전 고두밥을 찌고 식히던 그 공간은 발효 전시 체험장으로 탈바꿈했다. 2층 바닥에 구멍을 내고 강화 유리를 대서, 아래층 발효실의 일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했다.
 

양촌양조장 2층 바닥 유리창으로 보이는 모습 ⓒ 막걸리학교


2층에서 지하 발효실로 내려가려면, 양조장 1층 작업실을 거쳐야 한다. 1층 작업실에 제성탱크가 있어 알코올 도수를 맞추고 술을 병입하는데, 그 옆에 양촌양조장의 탯줄과 같은 우물이 있다. 양조장에서는 쌀을 씻을 때, 술을 빚을 때, 알코올 도수를 맞춰 상품화시킬 때, 청소할 때에 물을 사용한다. 가까이서 물을 길어 쓰기 위해서, 양조장 안에 우물을 팠다. 우물 자리를 잡고, 우물을 파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 경우도 생겼으리라.
 

양촌양조장 2층 발효 전시 체험장 ⓒ 막걸리학교


우물은 제법 깊다. 신기하게도 우물 바닥에 항아리가 묻혀 있다. 처음 우물을 판 뒤로 점점 지하 수위가 얕아지면서 우물을 더 깊게 팠다고 한다. 그랬더니 모래가 나와서 다시 바닥을 파고 항아리를 묻었다고 한다. 우물물은 처음에는 두레박을 썼고, 그 다음엔 손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고, 지금은 모터를 이용하고 있다.

양촌 양조장 마당에는 큼지막한 술항아리들이 모여 있다. 항아리들이 마치 퇴역한 장군처럼 영화로웠던 옛날을 뒤로 하고, 한가롭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현재 양조장 내부의 발효 용기는 항아리에서 스테인리스로 바뀌었다. 항아리가 무거워 다루기 어렵고, 소독하기도 어려워지면서 생겨난 변화다.


양조장 이동중 대표는 변화는 받아들였지만, 차마 선대에서 쓰던 항아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집 뒤뜰에 모아두었던 항아리들을 사람들이 찾아와 신기하게 바라보자, 마당으로 불러냈다. 그랬더니 양촌양조장이 훨씬 따뜻해졌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항아리 곁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고 간다.

보물급 유산들을 대대로 보존

양촌 양조장 이동중 대표는 9남매 중의 넷째다. 아버지 이명재도 장남이 아니지만 가업으로 양조장을 이어받았다. 양촌양조장을 창업한 그의 할아버지 이종진은 집안의 종손이 아니지만, 집안의 종손 노릇을 하면서 선대부터 살았던 마을과 집안을 지키며 양촌에서 살다갔다.

양촌 양조장에는 보물급 유산들이 있다. 처음 그 물건들은 지금의 양조장 카페에 있었다. 인내천이 보이는 양조장 카페는 예전에는 막걸리 판매장으로 쓰였던 공간이다. 한동안 창고로 쓰였는데, 이동중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그곳에 보관해왔다.
 

충남 양촌양조장에서 나온 유물들. ⓒ 막걸리학교


나는 오래된 양조장이라 분명 오래된 물건들이 있을 것이라여겨 그 창고를 보자고 했는데, 그 창고 안에서 집안 어른이 영조 임금으로부터 직접 받은 족자, 전주에서 찍은 <동의보감>, 조선시대 스테디셀러였던 <징비록>, 술의 예법이 담긴 <향음주례>, 집안의 선산 위치도, 추사 서체 필사본 등 다양한 문적들이 나왔다.

이동중 대표는 여름이면 할아버지의 고서와 괘짝을 어머니가 그늘에 거풍(밀폐된 곳에 두었던 물건에 바람을 쐬는 것)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러나 온도 습도가 일정하지 않아 보관 환경이 좋지 못하고, 도난의 우려도 있으며, 모두 해독하기도 어려워서 내가 알고 있던 충남역사박물관팀에게 연락을 취했다. 바로 다음날로 찾아와 유물을 살펴보더니 최근 충청문화권에서 보고된 집안 유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동중 대표와 협의하여 그 유물을 충남역사박물관에 우선 기탁 보관하기로 했다. 두어 달의 조사 끝에 역사박물관팀으로부터 유물이 천여 점이 넘는다는 답변이 왔고, 이를 분석하는데 2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분석이 다 끝나면 전시회를 하자고 말했는데, 올해로 그 2년이 지났는데 해를 넘기게 되었다.
 

조선 영조 임금이 10대조 이봉명에게 하사한 군신제회도 ⓒ 막걸리학교

 
그 유물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이동중 대표의 10대조인 이봉명(1682~1746)에게 영조 임금이 하사한 군신제회도(君臣際會圖) 족자다. 이 족자는 1726년(영조 2년) 12월 29일, 영조가 희정당에서 친정(親政)하는 자리에 선온(宣醞, 술을 하사함)을 행하고 어제(御製)를 내려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짓게 한 내용이 담겨있다.

영조 임금이 '고기와 물이 한자리에서 함께 기뻐하다(同歡魚水一堂中)'라는 구절을 내리고, 16명의 신하가 운자를 맞추어 각자 칠언으로 1구에서 4구까지 시를 지어 올렸다. 이봉명은 가장 긴 시구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편안해도 위태로움 잊지 않는 것이 참으로 성상의 뜻이요 / 安不忘危眞聖意
취하여 말을 다 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충성이네 / 醉將殫語亦愚衷
지금의 세도를 누가 만회할 수 있으랴 / 卽今世道誰回挽
예로부터 임금 마음은 감통을 귀하게 여겼네 / 從古君心貴感通
 
이 족자를 만들게 된 경위를 병조참지 조명신이 족자 안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상(영조) 2년 병오(1726) 12월 29일, 친정(親政)이 끝나자 선온(宣醞)을 행하시고는 어제(御製)를 내리시고, 곁에 있던 여러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며 말하길, '이것은 선조의 고사이다. 오늘은 다만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는 날이니, 글 솜씨가 졸렬하더라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자 말로 읊조리면 이관(吏官)이 써서 올렸다. 가주서(假注書) 안상휘(安相徽)가 왕명을 받들어 구절을 모아 베껴 올리니 합 14운의 장률(長律)이었다.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마땅히 널리 영화롭게 해야 하니, 그림을 그리고 족자를 만들어 집에 보관하여 영세토록 보물이 되게 할지어다. 정미년 윤 3월 일. 조명신(趙命臣)이 삼가 서를 쓰다."

술자리는 1726년 년말에 이뤄졌고, 족자를 만든 시기는 1727년 윤 3월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92년 전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림에는 신하들이 엎드려있고, 임금의 용상은 비어있다. 임금의 용안은 감히 그리지 못하고, 비워두었던 관행을 지키고 있다.

이 족자에는 임금이 하사한 술을 지칭하는 향온(香醞), 법주(法酒), 선온(宣醞)이라는 글귀가 등장한다. 290년이 흘러 이 족자를 볼 수 있는 것은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집안의 힘이고,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가업을 이어온 양조장의 힘이다. 우연히 한 양조장에 들렀다가, 임금이 내린 그림을 보고 그 안에서 술 향기까지 맡았으니, 어찌 양촌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한 해가 저물어가니 자꾸 그 그림과 이야기가 떠오르고, 양조장 마당에 가득한 항아리들도 떠오른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술 한 잔이리라. 양촌 양조장에서 회심의 작품으로 내놓은 무감미료 우렁이쌀 막걸리도 맛보고 싶고, 국립농업과학원과 기술 제휴하여 복원한 맑은 술 청주도 맛보고 싶다. 내일은 그 술을 택배로라도 불러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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