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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그 날이야. 거울 속의 내가 헤파이토스처럼 보이는 날"
 
   열일하는 헤파이스토스님
  열일하는 헤파이스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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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파이스토스를 아는가? 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대장간의 신'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못생긴 외모를 가져 다른 신들에게 놀림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거울 속의 내가 못생겨 보이는 날이면 친구와 나는 '헤파이스토스를 닮은 날'이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곤 했다.

우리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평가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매일 거울 속의 자신을 평가했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 날이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 날은 자신감이 있었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다. 반대로 스스로의 얼굴을, 몸을 견딜 수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울적했다. 하루 종일 내 피부, 내 옷에 신경이 쓰여서 일이나 관계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차고 넘쳤다. 단순히 얼굴이 예쁜가, 몸매가 좋은가의 문제는 아니었다. 눈꼬리의 모양이 어떤지, 속눈썹은 얼마나 올라가 있는지, 팔에 군살은 없는지,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가 떨어져 있는지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예뻐야만 하는 곳'들은 넘쳤고, 항상 그 기준에 스스로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오력'을 했다. 살을 빼고, 화장을 배우고, 예쁘다는 옷을 구입했다. 손톱 관리를 받고, 속눈썹을 연장했다. 보톡스를 맞고 다이어트를 했다. 화장품으로 얼굴을 깎고, 코를 세웠다. 화장의 단계는 점점 늘어만 갔다. 파운데이션 바르기, 아이라인 그리기, 마스카라 칠하기, 눈썹 그리기로 시작되었던 화장은 쉐딩하기, 하이라이터 바르기, 눈썹 마스카라 바르기까지 추가되었다. 하나하나 꾸밈을 추가할수록, 거울 속 나는 예뻐졌다. 그럴싸해 보이는 스스로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충분하다는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매일 체중계에 오르고, 화장품의 종류가 늘어가던 나날
  매일 체중계에 오르고, 화장품의 종류가 늘어가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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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예뻐지면, 더 날씬해지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턱이 갸름해지면 팔뚝 살이 보였다. 팔뚝 살이 해결된 후에는 목주름이 신경 쓰였다. 언제쯤이면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멈출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나는 무조건 예뻐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쁜 나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친구들도, 연인도, 가끔씩 만나는 친척들도 모두 예쁜 것을 좋아했다. 나 역시 예쁜 내가 좋았다.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는 눈에 보이는 여성과 스스로를 비교했다. '쟤보단 내가 낫다', '저 사람은 너무 예쁘다' 등 마음속으로 끝없는 전투를 벌였다. 간혹 꾸밈에 관심 없는 친구를 만나면 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다. '조금만 꾸미면 더 예쁠 텐데. 아깝다'며 멀쩡한 친구를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처음 '탈코르셋'이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았다. 그전까지 한 번도 내가 하는 꾸밈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자연스럽게 화장품을 샀고, 매일 같이 친구들과 화장을 연습하면서도 '왜 나는 화장을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숨을 쉬고 밥을 먹듯 당연하게 화장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어떠한 의심도, 의문도 없었다. 그런데 '탈코르셋 운동'은 내가 했던 모든 꾸밈들이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박의 결과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꾸밈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었다.

이 새로운 시선을 접하자, 매일 당연스레 하던 내 행위들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나는 지금껏 목숨을 걸고 화장을 해왔던 걸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장을 한 날엔 사회가 강요하는 '꾸밈 노동'에 굴복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날엔 거울 속 내가 못생겨 보여 기분이 나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날이었다. '내가 하는 건 꾸밈 노동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꾸미는 거라고'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속 깊은 곳엔 찜찜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는 꾸밈이 나의 욕구인지 사회적 강요인지 구분해보려 애를 썼지만, 어디까지가 나의 욕구이고 어디서부터 사회의 요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탈코르셋'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탈코르셋'이라는 것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머리를 숏컷으로 잘라 보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뒷머리가 낯설면서도 좋았다. 하지만 왜인지 머리를 자르자 더 열심히 화장을 하고, 더 화려한 귀걸이를 착용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자름으로써 나의 '여성성'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화장을 하고, 더 화려한 귀걸이를 함으로써 사회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이미지에 부합하려 한 것이다.

화장을 안 해보려고도 시도했다. 어느 날은 눈썹을 그리지 않아 보고, 어느 날은 피부 화장만 해보는 등 화장의 단계를 줄여보았다. '화장 안 하는 거 별 것도 아니네.' 싶은 날도 있었고,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화장품 가게에 달려가 급히 아이라인을 그리는 날도 있었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비로소 나는 그동안 나의 얼굴을 지독히도 미워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성 혐오'는 외부의 누군가만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인 나 자신도 스스로를 '예뻐야만 가치 있는 존재'로 규정한 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비하하고 있었다. 그 자체가 다른 무엇도 아닌 '여성 혐오'였다. 그제야 더 예뻐지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예쁨을 받는 게 '힘'이 아니라, 꼭 예쁘고 멋진 상태가 아니더라도 괜찮은 것이 '더 큰 힘'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그동안 내가 그토록 추구하려고 했던 '여성성'은 무엇이었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이미 '여성'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더 '여성'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짧은 머리의 나는 긴 머리의 나보다 '덜 여성'인 걸까? 화장을 한 나는 화장을 하지 않은 나보다 '더 여성'인 걸까? 이미 나는 여성인데 왜 '여성'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노력들을 해야만 하는 걸까. 언제부터 나라는 사람보다 긴 머리, 하늘하늘한 옷, 높은 구두가 더 여성으로 인정받아 온 것일까
 
   구글에 woman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대다수가 젊고, 긴 머리에 곱게 화장을 한 모습들이다.
  구글에 woman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대다수가 젊고, 긴 머리에 곱게 화장을 한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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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호기심에서 시작된 '탈코르셋'은 애초에 목표했던 '편안함'을 넘어 더 먼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탈코르셋'은 그저 불편한 외적 꾸밈을 벗어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탈코르셋 운동'의 목적은 긴 머리, 하늘하늘한 옷, 높은 구두와 화장 등으로 대변되는 획일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타파하는 것이다. 꼭 숏컷이 긴 머리보다, 바지가 치마보다 더 편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차림이 기존의 '여성성'이라 규정되는 모습을 벗어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긴 머리, 하얀 피부, 날씬한 몸' 등등의 사회가 여성으로 간주하는 특성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가 바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에 '여성성'으로 규정되는 특성들은 상대적으로 활동성보다는 외양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획일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타파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부가적으로 얻게 되는 이득이 '편안함'이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겉모습 하나 바꾸는 게 뿌리 깊은 '가부장제'를 바꾸는 데 무슨 영향이 있겠냐고 말이다. 임금 격차라던가, 가정폭력에 대한 미약한 처벌 등 사회의 굵직굵직한 이슈들을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겠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탈코르셋'은 사회가 요구하는, 타인이 요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모습을 취하겠다는 결정이다. 그동안 외부에 맡겨왔던 기준을 나에게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무엇이 아닌 내가 결정한 무엇이 되겠다는 결심은 비단 외모에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도 지하철에서 틴트를 덧바르는 십 대 여성을 본다. 신도림역까지 이르는 약 10여분 동안에도 그는 몇 번이고 거울을 보며 틴트를 덧바른다. 이제는 십 대 여성에게도 화장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은 부끄러워 마스크를 낀다는 요즘 학생들의 문화에 나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낀다. '여자에게 화장은 예의'라는 지금의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로 전달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화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개인적인 선택이며 '탈코르셋'을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얼굴을 공개한 오픈 페미니스트들은 '탈코르셋'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여성운동적인 측면에서 '짧은 머리'와 '긴 머리'가 그저 동등한 의미를 갖는 선택지라고 여기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지점에 서 있고, 얼마큼 용기를 낼 것인지는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완벽한 탈코르셋', '완벽한 페미니즘',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다.

'탈코르셋'은 스위치를 껐다 키는 것처럼 간단한 과정은 아니다. 지금도 나는 '추운데 왜 머리를 그렇게 짧게 잘랐냐.', '입술이라도 바르고 다녀라', '화장품 빌려줄까'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래서 모든 화장품을 버렸다가 틴트를 구입하기도 하고, 환멸을 느끼며 다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그 과정은 그렇기에 두 발자국 앞서 나갔다가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속적으로 꾸밈을 덜어내는 쪽으로 용기를 내고 싶다. 나와 친구들, 그리고 다음에 올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외모 그 이상이며, 당신은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라곰은 청년정책칼럼 편집위원입니다. 이 글은 서울청년정책LAB 블로그 및 페이스북을 통해 2018년 12월 21일 발행된 칼럼입니다.


태그:#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서울청년정책LAB, #탈코르셋, #페미니즘, #여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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