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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에 발행된 <백조> 창간호
 1922년 1월에 발행된 <백조> 창간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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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9일, 홍사용(1900~1947), 박종화(1901~1981), 나도향(1902~1927), 박영희(1901~?) 등의 동인들이 참여한 순수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편집인은 홍사용, 발행인은 일제 검열을 피해 미국인 선교사인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H. D. Appenzeller, 1889~1953)가 맡았다.

<백조>는 휘문의숙 출신의 박종화·홍사용과 배재학당 출신의 나도향·박영희 등 문학청년들의 교제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절망에 빠져 있던 이들은 젊은이들이 모여 문예와 사상을 펼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마침 김덕기·홍사중(홍사용의 육촌 형)과 같은 후원자를 만나 출판사 '문화사(文化社)'를 세워 문예 잡지 <백조>와 사상잡지 <흑조(黑潮)>를 간행하기로 하고, 먼저 <백조>를 창간한 것이었다.
 
<백조> 창간호는 1922년 1월 9일, 경성의 '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백조> 창간호는 1922년 1월 9일, 경성의 "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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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에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創造)>가 발간된 이래, 3·1운동 이후 신문과 잡지 발간이 허용되면서 일제의 침략으로 위축되었던 문학계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일간지와 종합지 <개벽>과 순문학 동인지 <창조>, <폐허>, <백조> 등을 중심으로 문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창조>, <폐허>와 함께 근대문학의 주춧돌 구실

<백조(白潮)>는 1921년 제9호로 종간한 <창조>와 1920에 창간된 <폐허(廢墟)>와 함께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주춧돌 구실을 담당하였다. <폐허(廢墟)>와 <백조>는 3·1운동의 좌절로 인한 허무와 패배 의식의 영향으로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는데, 황석우(1895~1960), 홍사용, 박영희 등이 대표적인 시인이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제1연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이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 박영희, 「월광으로 짠 병실」 제4~5연
 
<백조>는 통권 3호로 종간되었지만, 이상화와 박영희, 나도향과 현진건의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백조>는 통권 3호로 종간되었지만, 이상화와 박영희, 나도향과 현진건의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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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을 전후하여 <창조>가 창간된 이후, <폐허>, <백조>, <장미촌>, <금성>, <영대> 등의 동인지 출간이 이어졌다.
 1920년을 전후하여 <창조>가 창간된 이후, <폐허>, <백조>, <장미촌>, <금성>, <영대> 등의 동인지 출간이 이어졌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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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에선 대체로 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제3호),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제2호)·「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제3호), 홍사용은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나는 왕이로소이다」(제3호), 박종화의 「흑방비곡(黑房悲曲)」(제2호)·「사(死)의 예찬(禮讚)」(제3호) 등을, 소설 분야에서는 나도향의 「여이발사」(제3호), 현진건(1900~1943)의 「할머니의 죽음」(제3호),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제3호) 등을 들 수 있다.

<백조>의 문학적 경향을 흔히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시 분야에 국한된 일이고 소설 분야에서는 역시 당시 유행 사조(思潮)인 자연주의적 성격이 짙었다. 이들의 문학 경향을 '○○주의'로 규정하지 않고 '○○주의적(的)'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시 동인지가 어떤 뚜렷한 문학적인 주의나 사조를 표방하기보다는 문학 동호인의 친교적 성격이 강해 무슨 '주의'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로 포장된 퇴폐적 경향의 시와 자연주의적 경향 소설

어쨌든 이들 '백조파'들의 문학적 경향은 서구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병적이고 퇴폐적인 면이 강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3·1운동 실패로 인한 좌절감을 애수와 비탄, 자포자기, 죽음의 동경, 정신적 자폐증 등의 감상적 경향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시기, 소설은 잡지와 동인지를 중심으로 작가층이 확대되었고 계몽적인 의식을 넘어 개성의 발현을 지향하거나, 현실에 대한 첨예한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백조> 동인들도 지식인의 고뇌를 실감 나게 그렸다. 현진건과 나도향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당대의 사회가 겪는 고민을 형상화했다.
 
<백조> 동인들. 이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청년이었다.
 <백조> 동인들. 이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청년이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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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화원', 통권 3호로 종간

<백조>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자 발행인을 외국인으로 두는 편법을 취했다. 1호 발행인은 배재학당 설립자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의 아들, 2호는 미국인 선교사 보이스 부인, 3호는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훼루훼로였다. 그러나 '한국 근대 낭만주의의 화원(花園)'으로 불리는 이 잡지는 1923년 9월,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백조>는 격월간으로 정기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사상잡지 <흑조(黑潮)>의 간행도 좌절되었다. <백조> 창간호를 펴냈을 때 편집인 홍사용은 스물둘, 박종화와 박영희는 스물하나, 나도향은 갓 스물이었다.

이십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동인들은 3·1운동의 좌절로 인한 허무와 패배 의식의 영향으로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극적이긴 해도, 이들의 문학이 당대 식민지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그:#<백조> 창간, #동인지, #낭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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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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