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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퇴근 후 회사 근처에 들른 아내와 칼국수 집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설 연휴를 앞두고 최고의 명절선물과 최악의 명절선물이라는 기획을 준비 중인데..."
 

기자와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평소 찰떡 호흡을 과시하던 우리 부부는 눈빛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최악의 선물로 그만한 게 없지."

나는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빨간 속옷을 사드려야 한다는, 전설 속에나 존재할 것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내가 속옷을 사드렸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첫 월급으로 사드린 선물에 부모님은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래서 구정 때 회사에서 받은 첫 선물도 고향까지 가져갔다.

가격보다 훨씬 무거운 중량을 가진 참치 세트를 들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이미 기운이 빠졌다. 입석까지 만석을 이룬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로 환승까지 해야 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나는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처럼 참치를 안고 6시간 동안 버텼다. 그렇게 집에 도착 후, 바로 누워버렸다.

"엄마, 참치!"

부모님은 가격을 떠나 어떤 선물이든 너무나 좋아하셨다. 명절마다 아들이 회사에서 받아오는 선물세트를 통해 '우리 장남이 무사히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확인하셨던 건 아닐까? 엄마는 내가 명절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곶감을 챙겨 주곤 하셨다.

"회사에서 선물 주는 높은 분들 가져다 드려."

나의 고향행 선물 배송은 15년이 넘게 이어졌지만, 참치나 햄, 식용유, 목욕용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의 선물'을 받게 된 그해!

깁자기 웬 화장품?! 
 
화장품 세트. 본문과 상관 없는 자료사진.
 화장품 세트. 본문과 상관 없는 자료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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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회사에서는 신년을 맞아 (무려 주말 동안) 1박 2일 워크숍을 진행했다. 주요 테마는 고객 만족이었다. 고객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면 기업은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러분들도 살고 회사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고객의 클레임을 최소화하고 만족을 최대화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 시켜야 합니다. 고객 만족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임원급으로 구성된 강사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목청을 높였다. 마치 폭포수 아래에서 득음하려는 소리꾼처럼 말이다. 듣고 있던 직원들 모두 지쳐 갈 때쯤 한 강사의 목소리가 우리의 잠을 깨워 주었다.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처음으로 접하는 고객이 누구입니까? 바로 직원들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첫 번째 고객인 직원을 만족 시키지 못하는 회사가 어떻게 외부의 고객들을 만족시키고 발전해 나가겠습니까!"

세미나실이 떠나갈 듯한 박수가 이어졌다. 소위 잘 나가는 기업들의 사내 복지는 모든 직장인들 사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워크숍이 끝나고 얼마 후, 설 선물이 집으로 배송됐다. 택배를 받은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당신 회사에서 설 선물로 화장품 세트가 왔는데요?"

뜬금없는 화장품 선물에 회사 내 소식통을 찾았다. 경영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느 회사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화장품 세트가 우리 회사로 대 방출됐다고 했다.

"여보. 어머니는 장갑 사드린다고 해도 5천 원짜리 장갑이면 충분하다고 하시지만, 화장품만큼은 좋은 거 쓰시잖아. 난 이런 화장품이 있는 줄도 몰랐네. 이번에는 무겁게 들고 가지 말아요. 어머니 안 쓰실 거 같아."

여성용 화장품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고향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시각 중고물품을 사고 파는 사이트에서는 우리 회사 명절 선물이 활발히 거래되고 있었다.

"아이고! 회사가 아주 잘 나가나 보구나. 귀한 화장품을 다 주고."

역시 엄마는 아들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다 좋아하시는구나.

"여보, 그 화장품 말야..." 
 
회사에서 준 명절 선물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내 분노는 용암처럼 들끓었다. 사진은 본문 내용과 상관 없는 자료사진.
 회사에서 준 명절 선물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내 분노는 용암처럼 들끓었다. 사진은 본문 내용과 상관 없는 자료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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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후, 아내가 어머니 생신 선물로 화장품을 고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구정이 얼마나 지났다고 화장품을 벌써 다 쓰셨대?"
"여보. 어머니가 자기한테는 절대 비밀이라고 했는데, 그 화장품 말이야, 유통 기한이 이미 지난 제품이래."
 

그래도 아들 회사에서 준 선물이라고 어머니는 그걸 버리지도 않고,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단전 저 아래에서 분노가 용암처럼 끓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리 엄마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을 그들이 줬고, 심지어 내가 전달했다. 돈 쓰고도 욕먹는다는 게 이런 경우구나. 아, 돈 안 쓰고 재고 처리를 내부 고객에게 한 것이구나.

구정을 코앞에 두고 고객 만족을 외치던 회사였다. 그런데 "회사의 첫 번째 고객은 직원"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증발한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회사가 꼬박꼬박 월급을 지급해 주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부부싸움은 큰 일보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집보다 회사에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직원들 가족의 평화를 위해 조금만 더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대해주면 안 될까. 그게 기업의 발전에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선물'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이다. 이중 선사한다는 동사에는 "존경, 친근,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남에게 선물을 주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결국 마음을 전하는 게 선물의 목적일 터. 일 년에 두 번 주는 명절 선물이 곧 기업의 마음이다. 어마어마한 명품이나 값비싼 보약이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유통기한 지난 것만은 피해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태그:#설선물, #최악의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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