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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원 의원의 투기 논란으로부터 시작된 목포 도심재생 사업에 관한 관심은 도시재생, 투기, 젠트리피케이션, 근대화, 보도의  공정성, 정치인의 자세 등의 여러 토론의 논점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중에서 '투기, 참여, 근대화'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도시재생을 생각해본다.
 
목포의 무안통 거리에서 목포역으로 가는 거리
▲ 일제 강점기 목포 시내의 거리 풍경 목포의 무안통 거리에서 목포역으로 가는 거리
ⓒ 목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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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와 젠트리피케이션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투기는 안된다'는 데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투기를 막아내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한국에서 부동산 경제와 재건축과 투기심리는 광범위하게 굳건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투기는 특히 재개발 도시재생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목포의 일부 주민들은 "(낙후된) 이 동네가 투기할만한 곳인가?"라고 반문한다고 하지만 투기세력에겐 낙후된 건물들은 좋은 먹잇감일뿐이다. 목포 옛 도심은 오랫동안 부동산 가격이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상심리 차원에서 가격 상승 기대는 정당한 기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채씨(정씨) 부부는 이미 '10여 채를 2017년부터 사들였다'고 하고, 최근에 현지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들은 '목포 옛 도심재생 추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낙연 총리는 "부동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등하거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투기를 원천 차단하겠다"고 한다. 또한 목포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15채를 뒤늦게 매입하려고 소유주와 의사를 타진했지만 절반이 거부했다고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투기 대책에서 뒷북치지 말고 지금이라도 단호한 대책을 시급히 내놓아야 한다.  

"대지를 요를 삼고 창공을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습기가 가득한 밤이슬을 맞으면서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은 두 뺨을 인정없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이틀 되는 초 9일을 당하게 되었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 

위는 1924년 여름, 목포경찰서와 목포법원(현 목포근대문화역사공간 구역에 포함된 거리에 위치) 앞에서 벌어진 암태도 농민들의 집단 단식농성을 다룬 신문기사 내용이다. 목포 근방의 섬 암태도의 소작농들민들은 지주들이 소작료로 7~8할을 가져가자 4할로 낮춰줄 것을 요구하며 농민운동을 벌였는데 일제 경찰은 농민 수 십 명을 체포해 목포경찰서로 끌어갔다.

이에 농민 600여 명이 배를 타고 목포로 건너와 목포경찰서와 법원 마당과 도로에서 일주일 넘게 집단 노숙하며 '아사동맹'으로 죽기를 각오한 채 투쟁을 이어나갔다. 결국 농민들은 소작료를 4할로 크게 낮추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사건은 약 90년 전의 과거 역사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비슷하게 진행되는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당시의 소작농민들은 지금으로치면 작은 가게를 빌려서 장사하는 임대사업자로 바뀌었을뿐이다. 즉, 재주는 곰(소작농민,세입자,임대사업자)이 부리지만 수익은 주인(농토 주인,땅주인,건물주)가 챙겨가는 불공평한 행태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서울의 홍대앞, 삼청동, 한남동 등지에서 낙후된 골목 상권을 힘들게 형성시켜온 세입자들이 땅 주인(건물주)들한테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사례를 필자의 주위에서도 여러 차례 보아왔다. 작은 가게나 공방을 열어 땀흘려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팔고, 플리마켓 등을 열어 동네를 발전시켰지만 그 과실은 건물주와 투기꾼들한테만 돌아갔다.

월세가 200만원 하던 동네가 발전하자 갑자기 프랜차이즈 업체가 들어오면서 월세 1000만원으로 오른 것은 물론이고, 건물값은 한 두 해만에 몇 배로 폭등했다. 결국엔 젊고 의욕에 넘치던 창업자, 청년들은 또 다른 곳으로 정처없이 쫓겨나갔다. 지금 한국은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는 불건전하고 불공평한 나라다.

올해에도 서울의 을지로 등을 비롯하여 목포 군산 영주 등 전국에서 도심재생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 뒤따르는 투기의 악순환과 불평등, 젠트리피케이션을 어떻게 근절할 것인가는 한국 경제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촛불정부 문재인 정부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판단 기준의 하나로 거론될 것이다.

더이상 도심 재생과 재개발에서 투기꾼, 건물주만 배부르게 하는 불평등이 악순환되어서는 안되며 안되며 토지 건물주와 임차인(소상공인) 그리고 지자체간의 상생 시스템이 법적이고 시스템적으로  확고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옛 도심 재생 사업의 성공적 사례인 런던의 이스트엔드의 거리
▲ 런던 이스트엔드의 브릭레인 거리 옛 도심 재생 사업의 성공적 사례인 런던의 이스트엔드의 거리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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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심 재생은 '다양하게 참여하는 사람들과 컨텐츠'를 통해 가능하다

도심재생은 영국에 성공적인 사례가 많다. 일찍이 산업혁명과 도시화를 경험했던 영국은 60년대 이후 탈산업화로 도심 공동화가 발생했는데 90년대부터 런던, 버밍햄, 맨체스터, 리버풀 등에서 도시재생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런던 테이트모던(Tate Modrn)은 2차 세계대전 후에 가동을 시작했다가 1981년 문을 닫은 화력발전소였지만 2000년에 현대미술관으로 재생되어 한 해에 400만명이 찾아오는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관이자 관광지로 변신했다.

런던 북동부지역인 이스트엔드(East end) 또한 문을 닫은 공장들과 낡은 주거지들의 밀집지역으로 우범지역으로 유명했지만 조각가인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자유롭고 창의작품 패션 공예 디자인 작품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도 속속 문을 열었다.

전시 공연 플리마켓 등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되면서 이스트엔드는 런던에서도 가장 핫한 동네로 탈바꿈했다. 이렇듯 도심재생은 누가 참여하느냐와 어떤 컨텐츠로 되살릴 것인가가 성공의 중요한 열쇠이다. 

도심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문화재청, 목포시와 정부 유관기관은 이번 기회에 목포 도시재생사업 예산 500억원의 상당액을 투자해 목포의 옛 건물을 매입하고 수리해 문화예술인, 공예인, 창업자 등에게 5년 혹은 10년동안 무상임대하는 등의 획기적인 유인책을 내놓아야 한다.

현지의 작은 건물들의 가격을 감안하면 한 채당 구입가와 수리가를 포함해 대략 몇 억원을 가정할 때 100여 채까지도 매입수리해 무상임대를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목포시는 뒤늦게 재생 지역의 등록문화재 15건을 대상으로 매입을 위해 45억원을 편성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등록문화재만을 대상으로 한 방어적 차원의 매입에 그치고 있다.

도시재생 사업에서 건물 수리, 도로정비 등의 하드웨어적, 돈 중심의 사업 추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모여살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 실질적인 대책을 실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목포와 전국에는 수많은 열정 있고, 창의적이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가난한 문화예술인 공예인 창업자들이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 도시재생에 즐겁게 참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들이 지방의 낙후된 도시에 정착해 5년간 10년간 마음놓고 살면서 젋고 창의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장사를 한다면 옛 도심은 자립적으로 활기차게 되살아날 것이다. 손 의원이 추진하는 나전칠기 박물관을 비롯하여 옛 도심에 곳곳에 다양한 예술문화공간, 역사공간, 공방들, 전시장, 카페 등이 함께 형성되고, 매력있는 축제, 전시회, 여행 등의 목포만의 특색있는 컨텐츠가 풍성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진행 과정에서 '시민 참여와 소통, 투명성, 공정성' 또한 담보되어야 한다. 
 
목포 근대문화역사공간의 거리 풍경
▲ 목포 옛 도심의 거리 목포 근대문화역사공간의 거리 풍경
ⓒ 다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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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는 일제가 아니라 조선 민중들의 자립적인 피땀으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조선의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인천에 이어 두번 째로 1897년 목포를 개항시켰다. 삼백(쌀,소금,목화)을 비롯한 풍부한 농수산물은 수송선을 통해 일본으로 싼 값에 팔려나갔고 그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경제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호남선 철로와 국도 1호선을 개설해 육로와 항로로 호남의 물자를 손쉽게 수집 수송해 국외로 반출해갔다.

일제는 유달산 노적봉 아래 바다를 매립한 넓은 땅에 신도시를 건설해 일본인들을 집단 거주케 하였고, 일본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설치해 수탈을 강화했음은 물론이고 유달산 곳곳에 80 여개의 불상과 송도신사, 동본원사(현 오거리문화센터) 등까지 설치해 종교적 차원의 식민지 정책을 자행했다. 그때의 일제의 흔적들이 목포 중앙동 유달동 만호동 대의동 영해동 일대에 걸쳐 일본식 건물로 남아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근대'라는 단어에 숨어있는 혹여 잘못된 인식은 버려야 한다. 즉 일본 덕분에, 외세에 의해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는 식민사관적인 선입견이나 역사관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항과 근대화는 독립 정신을 가진 조선 내부의 민중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의 시각이 타당하다.

근대화는 단순한 산업화, 도시화, 철도 도로 등의 인프라, 근대건축물 등의 표면적이고도 장밋빛 차원의 일차원적인 시선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저임금, 착취, 참혹한 주거 환경을 극복한 민중들의 당당하고 자립적인 노동과 삶 그리고 상업, 산업, 문화의 발전이라는 원천적인 에너지에 주목하는 것이 종합적인 역사관으로서 온당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자립적으로 정치경제를 발전시켜왔다. 만호진(목포진)은 조선 세종 때인 1497년 설치된 수군이 주둔하던 곳이며, 목포항 앞의 고하도에는 이순신 장군이 1597년 107일간 머물던 당시의 성곽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일제는 1909년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펼쳐 전북 전남의 호남의병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4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은 참혹하게 죽거나 체포당했고 극히 일부는 만주 등으로 도피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때 목포경찰서(초원관광호텔 자리)로 수많은 항일 의병들이 잡혀왔다.

목포에서 이후에도 부두노동자 파업이 벌어졌고 1919년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학교, 영흥학교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목포광주의 민족자본가들은 일제 자본을 거부하고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1920년 호남은행(현 목포문화원)을 설립했고,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구 목포청년회관)는 서울지회보다 한 달 앞서 결성되었다.

산업적으로 당시 목포에는 20여 개의 목면(솜)공장들을 비롯해 고무공장, 내화벽돌공장(조선내화) 등이 들어서 경제발전을 이뤄갔다. 이렇듯이 일제시대의 산업 발전과 근대문화의 발전은 일제의 탄압과 수탈을 극복해가는 당시 조선 노동자들과 민중들 문화예술인들의 독립정신 민족자주정신의 피땀어린 결과였다.

그런데 이번의 목포의 '근대문화역사공간' 구역은 당시 주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중앙동 만호동 등의 지역으로만 한정되어 지정되었다. 조선인 거류지역에서는 근대 희곡의 선구자였던 김우진, 극작가 차범석, 소설가 박화성,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까지, 현대적으로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대중 대통령의 거주지, 광목사태(1980년 당시 용어)로 불렸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장소인 목포역을 비롯해 동아약국 등 수많은 '근대 및 현대의 문화역사공간'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근대화, 일제, 적산가옥'의 단편적 시각을 버리고, '조선민중의 자주적 근대문화 발전'이라는 민족 자주적인 역사문화관으로서 조선인 거류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역사 공간 또한 포함하는 쪽으로 목포의 '근대문화역사공간'의 구역은 재조정 확대되어야 한다.

목포 투기논란으로 점화된 근대 옛도심 재생사업(목포,군산,영주)은 전화위복의 자세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건물 경제 차원의 재생에서 더 나아가 정신문화의 재생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파를 떠나고, 사리사욕을 초월해 가진자와 못가진자가 함께 상생하는 공동체적 삶의 현장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선점과 독점 독선 과욕 탐욕 질시보다는 공유와 상생 공존 다양성 참여 소통, 열정과 진심 겸손의 자세로서 내실있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태그:#목포, #도시재생, #근대문화역사공간, #젠트리피케이션, #손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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