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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도에서 소난지도, 대난지도 까지는 하루에 3편의 여객선이 운항된다.
▲ 도비도에서 바라본 해상 풍경 도비도에서 소난지도, 대난지도 까지는 하루에 3편의 여객선이 운항된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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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초와 지초는 옛 선비들이 너나없이 모두 사랑했던 꽃이다. 그 난초와 지초의 첫 글자를 딴 난지도에는 왠지 난초와 지초가 지천으로 널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충남 당진에 있는 소난지도(小蘭芝島)를 찾았다. 따스한 겨울 날씨만 믿고 길을 나섰다가 차가운 해풍에 온몸을 떨며 여객선을 기다린 지 한 시간여, 도비도항에서 불과 10여 분의 짧은 항해 끝에 마침내 소난지도 선착장에 닿았다.

관광지로 유명하다지만 소난지도 역시 겨울은 긴 휴식기인가 보다. 전임 이장댁 사모님이 운전하는 소형 트럭을 타고 좁은 도로를 달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멀리 당진화력의 육중한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뿐, 소난지도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섬처럼 적막하기만 하다.

숙소는 중앙에 2층으로 된 마을회관이 있고 좌우로 여러 채의 펜션이 들어선 구조다. 마을 가구 수에 비해 꽤 규모가 커서 의아했으나 몇 해 전 섬 인근의 발전소에서 주민들의 편의와 소득증진을 위해 지어준 것이라 한다.

 
울긋불긋 꽃망울을 터뜨린 수선화며 튤립 그림 사이로 <Lee’s House>라는 영문 표기가 앙증맞다.
▲ 언덕 위의 노란 집  울긋불긋 꽃망울을 터뜨린 수선화며 튤립 그림 사이로 라는 영문 표기가 앙증맞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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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오른쪽 해안가 언덕에 노란색 페인트칠을 앙증맞은 건물이 있어 올라가 보니 유류탱크를 개조해 만든 작은 별장식 주택이다. 울긋불긋 꽃망울을 터뜨린 수선화며 튤립 그림 사이로 'Lee's House'라는 영문 표기가 앙증맞은데,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내부에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여러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널찍한 테라스에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데 남서쪽으로는 비경도와 대산항, 화력발전소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먼 바다에는 입항을 기다리는 화물선들이 줄지어 서있다. 남동쪽으로는 소조도, 대조도 등의 섬과 도비도항, 그리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일직선으로 그어놓은 대호방조제가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대호방조제 위에서 뜨는 해가 비경도 상공을 지나 멀리 서해바다로 떨어지니 이곳 'Lee's House'는 이른바,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언덕 위의 노란집이다. 문득 날짜를 헤아려보니 안타깝게도 음력 보름이 한참 지난 후다. 보름에 맞춰 왔더라면 밤새 달과 나와 내 그림자가 만나 '월하독작(月下獨酌)'의 풍류를 즐길 수 있었으련만, 그런 호사를 누리기에는 내 몸에 아직 세속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있나 보다.

花間一壺酒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獨酌無相親 벗도 없이 홀로 술 마시네
擧杯邀明月 잔 들고 밝은 달 마중하여
對影成三人 그림자와 마주하니 어느덧 세 사람
月旣不解飮 달은 본래 술 맛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애오라지 내 몸 따를 뿐이나
暫伴月將影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行樂須及春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리라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도 서성이고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도 따라하네
醒時同交歡 깨어있을 때 함께 즐기다가
醉後各分散 취한 후에 각기 흩어지니
永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사귐 맺어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 기약하네


섬 동쪽에는 <소난지도 항쟁 추모탑>과 <의병총(義兵塚)>이 있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경기도 수원지방에서 거병한 홍원식 휘하 의병들이 이곳까지 밀려와 홍주의병 등과 함께 재기를 도모하다 1908년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100여명이 전사한 사건이다.

 
바다 건너 당진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해상에 대형크레인이 떠있다.
▲ 의병총 주변 풍경 바다 건너 당진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해상에 대형크레인이 떠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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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이곳 소난지도는 호남 등지에서 올라오는 관곡운송선의 중간 정박지였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으나 1970년대 들어 이곳 석문중학교 선생님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의병총>을 만들어 제향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의병총> 너머 바다 한가운데는 백여 년 전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선 민초들의 넋인 양, 육중한 해상 크레인이 우뚝 솟아있다.

이튿날, 여객선을 타고 대난지도 향하면서 보니 소난지도와 대난지도를 잇는 교량공사가 한창이다. 바로 지척에 있는 섬이면서도 번번이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수고로움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의 선녀바위를 감상하며 선착장에 내리니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둘레길이 잘 마련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는 거대한 규모의 태양광발전소 공사가 한창인데 공사장 한쪽에는 결사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넓은 백사장과 함께 바다 너머로 지는 일출이 장관이다.
▲ 난지도 해수욕장 넓은 백사장과 함께 바다 너머로 지는 일출이 장관이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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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별장 같은 삼봉초등학교 난지분교를 지나 해수욕장에 이르자 텅 빈 백사장엔 사람 그림자 없고 먼 바다엔 이국의 풍경인양 거대한 화물선들이 떠있다. 갈매기는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빛도 없이 낮게 날개를 드리우고, 푸른 바다는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릴 듯 드넓은데,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무인지경의 백사장 위를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하였다.

해안가 벤치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으니 전에 느끼지 못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아마도 난지도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그 난초와 지초의 향기일 게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비우고 욕심 버리면 비로소 맡을 수 있는 향기 말이다. 청나라 사람, 정섭(鄭燮)이 쓴 난초시(蘭草詩 )한 편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寫得芝蘭滿幅春 지초와 난초 그리니 화폭에 봄이 가득한데
傍添幾筆亂荊榛 그 옆에 몇 글자 쓰니 잡목처럼 어지럽네
世間美惡俱容納 세간의 아름다움과 추함 모두 용납하는
想見溫馨澹遠人 맑고 향기로운 사람의 모습 떠오르네

 

태그:#현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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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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