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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사회>, 줄리언 바지니 지음, 오수원 옮김, 예문아카이브(2018), 10000원
 <진실 사회>, 줄리언 바지니 지음, 오수원 옮김, 예문아카이브(2018), 10000원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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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수많은 정보들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인 지금 세상에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 '진실'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가짜 뉴스가 판치고, 사건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진실 공방, 끊임없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각종 의학, 상품 정보들 속에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 사회>의 저자 줄리언 바지니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철학 계간지 <필로소퍼스매거진(Philosopher's Magazine)> 편집장 겸 발행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진실을 열 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타당하게 진실을 확립하는 수단에 어떤 불완전성과 왜곡의 잠재성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믿을지, 누구의 말을 믿을지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지 선택할 때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어느 사회에서든 각 분야의 권위자라고 여겨지는 전문가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왜 그들을 그 분야의 전문가라 여기고 그들의 말을 믿는 걸까? 세상에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있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분야의 지식을 섭렵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각 분야를 오랜 시간 연구하고 공부한 전문가들의 통찰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 중에 어떤 기준으로 몇몇 특정인을 골라 그들을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 여기는 걸까?
 
사람들이 누군가를 인식론적 권위자, 즉 진리에 관한 권위자로 여기는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해야 할 작업은 무엇이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때로는 이런 권위를 자기발생적인 것으로서 특정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 숭배라고 여기고 싶은 유혹이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강연가나 미디어 관련 종사자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믿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들이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위는 항상 어떤 종류의 인장이 찍힌 채 등장한다. (31~32쪽)

여기서 말하는 '인장'이라는 건 '전문성'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난감한 역설에 빠지게 되는데, 어떤 전문가의 말을 믿을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온전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권위자들을 완전히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권위를 부여하는 인물에 관해,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그 같은 권위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한심할 만큼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판단을 실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내린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라는 명령의 함의다. "감히 알려고 하라!" 물론 이런 용기는 무모할 정도로 위험하다. 앎을 위한 용기에는 언제나 오류의 위험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자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라. 이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하거나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여러분 대신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줄 수 없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여러분 대신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41~42쪽)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순하지가 않아서 진실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노력은 끊임없이 시련을 겪게 된다. 과학의 빠른 발전으로 우리는 오늘날의 정설이 내일이면 한물간 오류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세계화에 따른 다양한 문화적 관점을 마주하게 되면서 우리가 우리 문화권 내에서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 편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민주 사회의 개방성 덕분에 자유로운 언론이 권력의 좁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일에 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폭로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만 당하고 있는지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진실을 향한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에서 자칫 맥이 풀리고 진실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냉소에 빠지기 쉬운 이유다.

이런 태도는 정치에 대해 논할 때 많이 볼 수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서른 전에는 정치에 무관심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정치인들은 죄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기에, 정치 얘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쓸데없는 감정 낭비한다며 속으로 한심하다 비웃었다. 정치 따위 어떻게 돌아가든 나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지와 게으름에 대한 비겁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었다. 부끄럽다. 그 시절 나의 냉소는 거짓말쟁이 정치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만사를 시들한 태도로 바라보는 냉소의 뿌리에는 일종의 패배주의, 다시 말해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진실을 시험하고 있는지"를 분간할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느낌에 시달리는 유권자들은 '감정적인 근거'라는 과거와는 다른 요인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지지할 정치인을 선택한다. 인간의 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우리는 이제 이성과 논리 대신 직관과 감정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단순한 진실이 주는 안락함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진실의 힘과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재건하려면 진실의 복잡성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파악하고, 발견하고, 설명하고, 입증하는 일은 얼마든지 어려울 수 있고 실제로도 어렵다. 반면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고 남용하기란 놀라울 정도로 쉽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하다. (14~16쪽)

냉소적인 태도와 함께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상대주의다. 세계화로 인해 다양한 문화적 관점에 노출되면서 우리는 쉽게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은 이렇게 일갈한다. "상대주의는 비열한 악당의 으뜸가는 피난처다."
 
상대주의는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문화권이 넓어지면서 가장 엉성하고 너절한 종류의 상대주의가 패권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상대주의라고 불리는 개념에 대한 생각은(늘 그 생각을 제기하는 이들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기존에 확립된 진실과 권력구조에 주의 깊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풍성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 상대주의라는 카드는 대부분 대화를 중단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너의 진실은 네 것이고 나의 진실은 내 것이니 더 이상 할 얘기 없다"라는 식이다. (82쪽)

세계를 기술하는 방법, 사물에 가치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참된 진실은 하나일 수 없고 뚜렷한 윤곽을 갖고 있지도 않다. 실제로 이따금씩 진실은 정확히 뭔가가 모호하거나 불확정적이라는 것, 오히려 거짓이야말로 분명하고 확정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게 진실인 것이 여러분에게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나 여러분 중 한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거나, 두 사람 모두 진실의 일면만 알고 있으므로, 진실 전체를 보기 위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타당한 견해들의 모음이 진실의 파편화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이런 견해들 중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종합해 실재에 대한 더 온전한 견해를 만들어내야 한다. (87~88쪽)

한때 나는 TV에서 MBC스페셜 <지방의 누명> 프로그램을 보며 충격을 받아 '고지방저탄수' 식단으로 삼겹살, 버터를 잔뜩 먹고 쌀밥과 밀가루는 거의 먹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지방이 건강에 해롭지 않다는 그들의 말은 내가 믿었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삼겹살이나 버터 같은 포화지방은 각종 성인병과 비만의 주요인 아니었던가.

식단을 유지하면서도 나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고, 주변의 반대도 엄청났다. 관련 서적도 여러 권 읽어보고 인터넷에서 검색도 해봤지만 지방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각각 달랐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방'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나의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고지방저탄수' 식단을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내가 얻은 건 '탄수화물은 적게 먹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지방은 잘 모르겠다'라는 모호한 결론뿐이었다.

물론 나의 의견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식단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진실의 '핵심'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핵심 가닥들이 있을 뿐이며 타인을 설득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점이라고 한다.
 
누구든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의 그물망이 끊어지지 않도록 진정 애쓰고 있는데 타인이 그 그물망 중 어느 부분이라도 끊어버리려 한다면, 이들은 자신이 지탱하고 있는 허약한 구조물이 실제로는 턱없이 가느다란 실 몇 가닥에 기대어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끊어진 부분을 허둥지둥 다시 이어 붙이려고 할 것이다. (113쪽)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엄격한 자기 검토가 필요하다. 자신의 그물망을 정직한 태도로 살피면서, 어느 부분이 탄탄하고 어느 부분에 지지대가 부족하며 어느 부분의 올이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어느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차근차근 교정해나갈 수 있다. 저자는 개개인의 믿음의 그물망은 고독한 거미의 그물망이 아니라, 더 넓고 사회적인 그물망의 일부라는 점에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진실을 최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지식을 구축하기 위해 타인들의 지식에 의존한다.
 
진실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진실은 단순 명료하지는 않더라도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반짝거리는 조약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단단하고 명확한 형태를 지닌 불변의 암석으로 차곡차곡 구축한 인공정원과 같은 진리로서의 진실.

그러나 실제로 진실은 현실의 자연스러운 정원과 더 비슷하다. 모든 구성인자들이 서로 연관을 맺는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체계다. 이 정원의 일부 요소들은 영구적이거나 불변의 것인 반면, 다른 것들은 성장하거나 변하거나 소멸한다. 또한 진실은 정원처럼 정성스럽게 돌봐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화와 왜곡과 오해와 거짓말이라는 온갖 잡초가 정원을 뒤덮어버리고 만다. (119~120쪽)

저자는 역사와 철학이 우리의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역사는 진실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어떻게 이용되고 남용되었는지 알게 도와주고, 철학은 진실의 이상적인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진실을 향한 길을 안내하는 훌륭한 지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굳건히 걸어 나갈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단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태그:#진실사회, #줄리언바지니, #진실, #상대주의, #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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