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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시청 중이었다. 주제는 바로 강남역 살인사건. 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 숨어있던 범인이 6명의 남성 다음으로 들어온 23살의 여성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다.

평소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피의자의 진술은 우리사회의 극심한 여성혐오가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졌음을 확인시켜주었고 이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방송을 보는 내내 여성혐오로 인해 고통 받는 피해자들이 생각났고 나의 피해경험 또한 함께 떠올랐다. 당시 임신5개월이었던 나는 애써 기억을 억누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그날의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내가 5살 때, 아빠는 엄마와 이혼하고 홀로 날 키웠다. 가난했던 아빠는 나를 데리고 부산진구 부전동일대의 허름한 월셋방을 전전했다. 일하느라 날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땐 지인들에게 곧잘 나를 맡기곤 했다. 우리 집엔 아빠의 애인을 비롯한 지인들이 종종 드나들었다.

그중 자주 우리 집에 오던 한 남자를 나는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는 우리 집에서 종종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그날도 우리 집 안방 뒤쪽 작은방에 그가 누워있었다. 어린 나는 반가워하며 그의 옆에 누웠다. 그는 나를 품에 안더니 갑자기 손을 내 팬티 속에 넣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 성기를 주물렀다.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나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가끔 그때의 일이 생각났고 내가 성폭력을 당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다고 여겼기에 계속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후 교회를 다니며 여자가 '순결'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고 나선 내 몸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강간을 당한다면 그땐 정말 더러워진 날 돌이킬 수 없을테니 자살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내가 교회에서 받은 가르침과 연결지어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교회는 남녀 모두에게 성욕을 억누르고 혼전순결을 지켜야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남성의 경우 여성을 겁탈해도 이후 회개하고 신의 뜻에 순종하면 의인으로 추앙받는다. 전쟁 중인 부하의 아내를 겁탈한 다윗을 대다수의 신도는 성폭력범이 아닌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성의 경우 간음하면 율법에 의해 돌로 쳐 맞아죽거나 강간당하면 더럽혀졌다고 버림받는다.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섹스를 하지 않고 임신을 한다. 성경 속 여성들은 남자에게 종속되고 억압당하는 이가 대부분이며 그나마 존경받는 여성으로 기억되는 이가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은 '순결'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을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순 없지만 교회는 신도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의도하고 성경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르침을 그대로 흡수했던 나는 20대가 되어 교회 밖으로 나와 다양한 책을 읽고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등 다른 종교관을 가진 이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혼전순결'이란 단어가 얼마나 고리타분한 것인지를 알았고 여성에게 정숙함을 요구하는 가부장제사회의 억압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여자가 성폭력으로 '더럽혀졌다'고 말한다면 애초에 더러운 건 가해자가 아닌가?"라고 누군가 쓴 글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깨달은 것이 곧장 몸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내 몸은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난 잘못한 게 없었다. 난 그저 아무 힘이 없는 5살 여자아이였을 뿐이었다. 날 인간이 아닌 그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구멍취급한건 가해자였다.

그럼에도 내 몸은 오래오래 그날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성폭력을 당한 여자는 제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부끄러운 여자고 그 몸은 이미 더럽혀 진 것이라며 힐난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은 내 몸 도처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치심이 얼마나 많은 성폭력피해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을까. 미투운동을 통해 만난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가진 공통점은 바로 피해자들이 너무나 오랜 시간 홀로 그 고통을 감내해왔다는 사실이었다. 피해를 당한 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상관없이 피해자들의 고통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용기 내어 신고를 하지 않아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까지 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어 결국 가해자 처벌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가 저주스러웠다.

나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길 간절히 바란다.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더더욱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다. 그의 얼굴은 흐릿하게 기억나지만 난 그가 어디 사는지, 이름이 뭔지도 알지 못한다.

29년 전 사건이니 가해자는 그날의 일을 기억조차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내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나는 왜 고통스러운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 눈물 흘리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가?

이 땅의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우리 탓이 아니며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피해자를 억압하는 이 사회와 가해자들을 향한 우리의 분노가 연대라는 힘을 만들어 낸다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성폭력의 굴레를 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냄으로서 나의 용기가 되어준 그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꼭 말하고 싶다. 내 글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_서로의_용기다

태그:#페미니즘, #강남역살인사건, #미투,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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