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변을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는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룬 빨간 지붕의 집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 위로 푸른 녹음이 가득했고, 그 녹음 위로는 바다까지 내려온 발칸반도의 회색빛 산맥들이 육중한 몸체를 과시하고 있었다. 순한 바다에는 태고적부터 이어졌을 햇살들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탄성을 지르게 하는 경치들이 나타난다.
▲ 아드리아해의 풍경. 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탄성을 지르게 하는 경치들이 나타난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버스는 해변까지 닿은 산 중턱의 아래를 굽이굽이 돌아가기에 차창 밖 모습은 핸들을 꺾을 때마다 주변 풍광이 확 바뀌고, 그에 따라 나의 눈길도 따라서 돌아간다. 멀어지는 마을의 풍광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아름다워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아름다운 해변에 비해 마을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드리아 해변을 유람하듯이 달리던 버스가 멈추어섰다. 크로아티아(Croatia)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와 나라사이의 경계를 만난 것이다. 아드리아해를 닮은 푸른 색상의 국경검문소에는 몇 대의 차량들이 멈춰서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운행하는 버스마다 남자 안내원이 기사와 동승하고 있었다. 버스에 함께 탄 안내원은 국경에 도착했으니 모두 여권을 준비하라고 한다. 승객들은 내리지 않고 이 안내원이 승객들의 여권을 걷어서 검문소의 세관원에게 가지고 갔다.

항상 무사태평인 아내는 국경에 도착했지만 옆자리에서 계속 편하게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내 여권과 아내의 여권을 함께 안내원에게 건넸다. 이 국경검문소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왕래하는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 어느 나라 여권인지 간단하게 체크만 하고 쉽게 통과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육로로 가려면 꼭 거처야 하는 국경이다.
▲ 보스니아 입국.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육로로 가려면 꼭 거처야 하는 국경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버스가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한 여자 여행객이 급하게 소리쳤다.

"왜 출발을 하는 거죠? 우리 여권을 아직 안 돌려줬단 말이에요!"

나도 살짝 긴장했다. 다행히 버스는 검문소를 통과하여 50m 정도를 가더니 다시 멈춰 섰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우리 여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 중에, 오랜 만의 국경 통과라 왠지 어리둥절해진다.

머리 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크로아티아 입국 때 입국 도장을 안 찍어줘서 보스니아 입국하면서 문제가 되었나? 아니면, 우리 버스에 보스니아 입국이 까다로운 나라 사람의 여권이 있나? 여권을 제출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던데 그 사람들은 보스니아 사람들인가?

근심 걱정 별로 없는 아내는 편하게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히 한참 만에 나와 아내의 여권, 그리고 모든 버스 승객들의 여권은 무사히 돌아왔다. 그런데 버스 승객 중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입국 심사가 지체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신속하게 돌아가는 한국의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발칸 반도의 여행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드디어 우리는 크로아티아를 벗어나 보스니아 땅을 밟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보스니아의 네움(Neum). 같은 바다와 같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잠시 나라를 옮겨 왔기 때문인지 마을의 느낌이 크로아티아와는 약간 다르다. 도시 이름 '네움'은 '새롭다'는 뜻인데, 이름처럼 새로운 느낌이 드는 곳이다.
 
보스니아의 유일한 해안도시 네움은 아름다운 바닷가를 자랑하는 관광도시이다.
▲ 네움. 보스니아의 유일한 해안도시 네움은 아름다운 바닷가를 자랑하는 관광도시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크로아티아의 서쪽 국경선은 아드리아해를 옆에 끼고 길게 늘어져 있는데, 서남쪽 국경의 21km 정도가 보스니아 땅인 네움으로 인해 단절되었다가 다시 연결된다. 네움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 속하는 주인 헤르체고비나 네레트바 주(Hercegovačko-neretvanski kanton)에 속해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국경이 특이하게 남은 것은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Treaty of Passarowitz) 때문이다. 이 조약의 결과로 아드리아해 북동부 연안인 달마티아의 대부분 지역이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었던 라구사 공화국(현재의 두브로브니크)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네움은 오스만 제국의 땅으로 남아 양자 간의 완충 지대가 되었다.

네움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편입되었다가, 티토가 구 유고 연방을 만들며 집권한 이후 옛 오스만 제국의 국경선을 이어받은 보스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확정된 국경선이 옛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복잡한 분쟁을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물가가 저렴하여 네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생필품을 사는 여행자들이 많다.
▲ 네움 시내. 물가가 저렴하여 네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생필품을 사는 여행자들이 많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네움의 주민들은 대부분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어서 주변국인 크로아티아 주민들과 민족적으로는 전혀 다름이 없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각 나라들이 전쟁을 치를 때에도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상인들은 완충지대인 이 네움에서 교역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국경을 넘으면서 봐도 두 나라의 주민들 사이에는 전혀 불편함이나 위화감이 없어 보인다.

나는 아드리아 해의 또 다른 보석인 네움의 바닷가까지 천천히 내려가 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붉은색 지붕의 집들과 해안선이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관광도시인 네움에는 바닷가뿐만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이 좋은 곳에는 크고 작은 호텔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달콤한 디저트 용의 빵은 없고 주로 주식용 빵을 팔고 있다.
▲ 네움 빵집. 달콤한 디저트 용의 빵은 없고 주로 주식용 빵을 팔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나는 네움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시장기를 달래보기로 하였다. 네움 빵집(Pekara Neum)에 들어갔다. 빵집에는 다양하고 맛있어 보이는 빵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여행객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는 인근의 두브로브니크는 최근에 물가가 많이 올라서 네움에서 쉬어가거나 숙박하는 여행객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를 이해하게 됐다.

우리나라 빵집과는 다르게 이 빵집에서는 디저트용 빵이나 케이크는 팔지 않고, 보스니아 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식사용 빵을 팔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달콤한 빵들은 주로 카페에서 팔고 있었다.

식사용 빵으로 파는 키플레(Kifle)를 가장 먼저 먹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소시지 빵 모양 같이 생긴 페이스트리 빵이다. 반으로 갈라진 빵 안에 치즈나 닭고기, 소시지가 들어있는데, 공기가 잔뜩 들어있고 촉감이 푹신푹신하다. 갓 만든 빵을 먹어보니 마치 잘 녹은 고기의 살 같이 부드럽다. 빵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소금기의 거친 맛이 매력적이다.

반죽을 기름에 튀겨서 만든 빵 우슈팁치(Ustipci)는 작은 사각형 모양의 평범해 보이는 빵이다. 빵 속이 많이 비어 있어서 부드럽게 찢어먹었다. 크기가 작은 빵이고 은은한 맛이 있어서 여러 개를 먹게 된다. 이 빵 위에 치즈를 조금 발라 먹으니 풍미가 더욱 다양해졌다. 주식인 빵에서 구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아스라한 추억이 느껴진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과자나 음료의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 노점 가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과자나 음료의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시내의 노점가게에서 파는 과자들의 가격도 놀랍도록 싸다.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과자를 마구 마구 사들이게 될 것 같은 환경이다. 쾌 큰 마트인 콘줌(KONZUM)에 들어가 보니 이곳에서도 저렴한 물가가 확인된다. 렌터카로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차량 트렁크에 여행 생필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지점이다.

길을 걷다보니 네움의 천주교 성당인 츠르크바 스베토그 이바나(Crkva svetog Ivana)가 나온다. 이슬람 신자들이 가장 많은 보스니아에서 천주교 성당들은 1992년~1995년 동안 내전을 겪으며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이 성당도 내전 후 2012년에 새롭게 지어졌다. 현재는 시내의 중심 건축물로서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지만, 가장 혹독한 시련을 이겨낸 땅에 다시 들어선 성당이다.
 
보스니아의 내전의 역사를 잊고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 네움의 천주교 성당. 보스니아의 내전의 역사를 잊고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보스니아 땅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들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이 성당 신자들의 모습에서는 평온함이 느껴진다. 이 성당의 교인들이 겪었을 아픈 내전의 역사를 잠시 잊게 해주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보스니아의 성당에서는 평화의 소중함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바다까지 가는 길은 아주 가까웠다. 바닷가의 풍경은 한적했다. 가파른 산 언덕 바로 아래 자리한 깨끗한 모래 사장이 네움의 관광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가 매력적인 곳이다.
▲ 네움의 바닷가 풍경.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가 매력적인 곳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바닷물은 진한 파란 물감색 그대로이지만, 맑고 투명한 바닷 속은 멀리서도 다 보일 정도이다. 대기를 거쳐온 햇살이 이 투명한 바다 위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닷가에서 계속 산책을 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보스니아, #보스니아여행, #네움, #네움여행, #아드리아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