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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매체에서 "는"으로 써야 할 표현을 "늘은"의 형식으로 썼다. 요즘 기사들엔 이런 문제가 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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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매체에서 기사 제목을 "하루 더 늘은 2차 북미정상회담…"이라 쓴 걸 보았다. 김정은· 트럼프 간 2차 북미정상회담 일정이 하루 더 '는' 것을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이 동사의 기본형은 '늘다'니 그 관형사형은 '늘 + ㄴ→ 는'으로 써야 한다.
'늘은'이 아니라 '는'이다
'늘다'뿐 아니라, 어간의 끝소리가 'ㄹ'로 끝나는 모든(!) 동사·형용사는 같은 형식으로 써야 맞다. 이런 용언은 'ㄴ'으로 시작하는 어미(-ㄴ/-은/-는) 앞에서 반드시 '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외는 없다. 그래서 이러한 활용을 '규칙활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위와 같은 실수를 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ㄹ'이 떨어진 형태로 적으면 시각적으로 본래의 뜻과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는지 모른다. '날다'의 현재 관형형은 '나는'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날으는'으로 쓰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전 GS칼텍스 감독 조혜정이 1970년대 배구 국가대표 공격수로 날릴 때 그의 별명은 '날으는 작은 새'였다. '하늘은 날으는 피터팬'처럼 대중공연 제목 등에서 이런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쓰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들이 은근히 어법에 어긋난 표현을 써서 새로운 느낌을 의도하는, 이른바 '시적 허용'에 해당하는 비슷한 표현이 눈에 익은 탓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불은'(국수), '눌은'(밥)처럼 활용되는 용례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일단 이런 표현들은 형태상 'ㄹ' 뒤에 관형사형 어미 '-은'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뜻 이 낱말의 기본형이 '불다'·'눌다'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관련 글 :
'퉁퉁 불은 국수'와 '몸달은 KBS']
이와 관련된 '5지 선다형' 문제를 한번 풀어보자.
다음 밑줄 친 용언의 활용 중 어법에 맞게 쓴 것은?
① 퉁퉁 불은 국수
② 몸 달은 KBS
③ 하루 더 늘은 회담
④ 울은 옷깃
⑤ 회사서 알은 사람
보기 ①~③은 실제 매체에서 보도한 표현이고, 나머지는 있을 수 있는 표현이라 싶어 만든 예다. 보기는 모두 어간의 끝소리가 'ㄹ'이라는 점이 같다. 어간에 붙은 어미 '-은'은 뒤의 명사를 꾸며주는 관형사형 어미다.
우선 각 낱말의 기본형을 파악해 보자. ① 불다, ② 달다, ③ 늘다, ④ 울다, ⑤ 알다. 네 개(②~⑤)는 더 볼 게 없이 모두 'ㄹ'이 끝소리인 용언(동사·형용사)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들 낱말에는 모두 'ㄹ'이 떨어지는 규칙이 있다.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다.
② 몸 단 KBS
③ 는 회담
④ 운 옷깃
⑤ 회사서 안 사람
그런데 ① 은 어쩐지 긴가민가 싶다. '불다'? 뭔가 찜찜하다. '국수가 불었다'니 이는 '물에 젖어서 부피가 커지다'는 뜻인데 기본형을 '불다'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말의 기본형은 '불다'가 아닌 '붇다'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위쪽은 활용할 때 어간이 바뀌지 않는 규칙활용이고, 아래쪽은 'ㄷ'이 'ㄹ'로 바뀌는 불규칙활용이다. 그중에서도 '붇다'나 '눋다', '겯다' 같은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일상에서 기본형으로 쓰이는 일이 드물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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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눋다"는 "ㄷ불규칙용언"이다. "눌어, 눌으니, 눋는"과 같이 활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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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눋다'는 "누런빛이 나도록 조금 타다."의 뜻인데 '밥이 눋는 냄새', '밥이 눌어 누룽지가 되었다.' '눌은 보리밥', '방바닥이 눌었다.' 등으로 쓰인다. '눌은'은 과거형, '눋는'이 현재형, 미래형은 '눌을'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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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붇다"도 마찬가지다. "불어, 불으니, 붇는"과 같이 활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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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붇다'는 "① 물에 젖어서 부피가 커지다. ② 분량이나 수효가 많아지다. ③ 살이 찌다."는 뜻인데 '콩이 붇다', '오래되어 불은 국수', '젖이 불었다', '재산이 붇는 재미' 등의 형식으로 쓰인다. 그런데 '붇는'보다 '불어'의 형식으로 쓰이는 일이 많아서 '붇다'가 낯선 것이다.
'겯다01'은 "① 기름 따위가 흠씬 배다, ② 일이나 기술 따위가 익어서 몸에 배다."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때에 겯고 기름에 결은 작업복', '손에 결은 익숙한 솜씨' 등과 같이 쓰이는데,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겯다02'는 "①대, 갈대, 싸리 따위로 씨와 날이 서로 어긋매끼게 엮어 짜다. ② 풀어지거나 자빠지지 않도록 서로 어긋매끼게 끼거나 걸치다. ③ 실꾸리를 만들기 위해서 실을 어긋맞게 감다."의 뜻으로 쓰인다. '바구니를 겯다', '어깨를 겯다', '실을 겯다' 등으로 쓰이는데, 집회·시위에서 '어깨를 겯다'는 표현이 더러 쓰이기도 한다.
결론 : '붇다' 등도 '싣다'·'묻다'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다
우리에게 그 기본형이 다소 낯설긴 하지만 이들 낱말도 'ㄷ불규칙용언'으로 쓰임새가 같다. 그림 '시제별 관형형 활용'에서 보는 것처럼 '묻다'나 '싣다'와 다르지 않은 형식으로 활용되는 낱말인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봐도 'ㄷ불규칙용언'은 꽤 된다.
걷다, 겯다, 긷다, 깨닫다, 눋다, 듣다, 묻다, 붇다, 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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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제에 따른 관형형 활용은 "묻다"나 "싣다"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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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낱말을 쓰는 데 지장을 받는 이는 없다. 토박이말 사용자에겐 그게 굳이 어법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입에 밴 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겯다', '눋다', '붇다' 등도 '듣다'와 '싣다'와 같은 형식으로 편하게 쓰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