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 번째 랑탕 트레킹이었다. 랑탕은 1971년 네팔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오지 탐험가 윌리엄 틸만(1898~1978)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 극찬했던 곳이다. 안나푸르나, 쿰부(에베레스트)와 더불어 네팔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지역이다. 그렇지만 2015년 네팔 지진이 발생했을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 중 한 곳으로 2016년 문재인 대통령도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두 번의 랑탕 트레킹은 지진 발생 전에 있었다. 추억 어린 사진을 꺼내 보니 낯익은 풍경과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뚝바(티벳 음식)와 삶은 감자를 슬며시 식탁에 덤으로 올려 주셨던 롯지 주인아주머니, 추운 겨울밤 맨손으로 찬물에 설거지를 했던 눈이 맑았던 소녀, 생각지도 않은 인연으로 하룻밤 신세를 진 단란한 가족까지. 그들 모습이 사진에 남아 있었다. 랑탕을 걸으면서 그들과 재회할 수 있다면 선물로 주고픈 마음에 옛 사진을 인화하였다.
 
2012년도 캉진 빌리지의 롯지 주인 부부
▲ 추억의 사진 2012년도 캉진 빌리지의 롯지 주인 부부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일박을 하며 정을 나누었었던 네팔리 가족
▲ 단란한 가족 일박을 하며 정을 나누었었던 네팔리 가족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지진 이후의 삶

지진의 흔적은 카트만두에도 남아 있지만 둔체(1950m)를 지나 샤브르벤시(1470m)에 도착할 무렵부터 뚜렷해졌다. 랑탕 트레킹의 출발지는 샤브르벤시. 이곳부터 3일을 걸어야 첫 번째 목적지인 캉진곰파(3860m)에 갈 수 있다. 곳곳에 산사태 흔적, 부서진 다리, 파괴된 마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계곡 건너편 능선에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칼로 종이를 자르듯 잘려 있는 모습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았다. 지진 당시 후폭풍 바람 때문에 잘려 나갔다. 지진 피해 흔적의 하이라이트는 '랑탕빌리지(3430m)'. 마을 초입에 긴 출렁다리가 있었고 야크를 방목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500여 명의 주민이 평화롭게 살았던 마을이었는데. 지진으로 능선 위 호수가 붕괴되면서 빙하와 토사가 흘러내려 마을 아래쪽은 묻혀 버렸고 마을 위쪽은 후폭풍으로 인해 모든 가옥이 전소되었다.
 
지진으로 붕괴된 마을 모습
▲ 캉진 빌리지 지진으로 붕괴된 마을 모습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단란한 가족 사진 모습 -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함
▲ 위령탑에서 단란한 가족 사진 모습 -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함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마을 위령탑(초르텐)에는 당시 사망한 17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평생을 랑탕 계곡을 벗어나지 않았고 남에게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며 마니차(Praying Wheel)를 돌리고 불경을 외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사망자의 이름에는 네팔리 외에도 낯선 이방인들의 이름이 보였다. 캐나다, 프랑스, 말레이시아 등에서 온 앳된 젊은이들의 모습. 탑 곳곳에는 그들의 친지가 남겨놓은 사진이 보였다. 2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인데 무엇 때문에 먼 이국 히말라야 자락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히말라야를 등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지 히말라야 자락을 걸으면서,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기약하기 위해 왔을 뿐인데 불귀의 객이 되어야 하다니. 고개 숙여 기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도 알지 못하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랑탕 트레킹 지도(네이버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빌려 왔음)
▲ 랑탕 지도 랑탕 트레킹 지도(네이버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빌려 왔음)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라마호텔 마을 모습
▲ 라마호텔 라마호텔 마을 모습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캉진콤파에서 하산하는 날. 라마 호텔(숙소 이름이 아닌 지명, 2480m)까지 오게 되었다. 숙소는 '프랜들리 호텔(Friendly Hotel)'. 이른 아침 향과 촛불을 밝히며 기도하는 샤우니(여주인) 모습에도 한이 서려 있었다.

사연을 묻자 친정이 랑탕 빌리지. 친정 식구 모두와 자신의 둘째 아들도 죽었다고 한다.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는 그의 눈가에는 어느덧 눈물 자국이. 가이드 겔덴의 말에 의하면 과거에 건장했던 그는 지진 이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떠날 때에 마당 가장자리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여주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트레킹중에 들려온 부고

랑탕 트레킹 팀은 트레커 9명과 스태프 15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첫날부터 눈에 띄는 앳된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치리 셀파(Chiri sherpa)'. 셀파족으로 쿰부 히말라야 아래 마을인 설레리 출신으로 고산 등반 대신 안전한 트레킹 가이드가 되는 것이 꿈인 25살의 젊은 친구. 18살에 결혼하여 부인과 4살 된 딸과 카트만두 외곽에 살고 있다며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수줍게 웃곤 하였다. 그의 직책은 보조 가이드. 어눌하지만 우리말이 통했고 항상 활기찬 모습으로 트레커의 각종 문제를 해결해 주는 슈퍼맨과 같은 친구였다. 매일 아침 6시에는 생강차를 숙소로 가져왔으며 포터와 주방을 모두 아우르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랑탕 빌리지에서 캉진곰파로 오르는 날은 폭설로 발을 떼기도 힘든 상황. 그 친구가 선두에 나서 러셀(겨울철 눈이 많이 쌓인 산을 등반할 때, 선두가 눈을 밟고 헤치며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하며 길을 만들었고 우린 그의 노력 덕분에 힘은 들었지만 편안하게 캉진 곰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점식 식사 후에 캉진리에 오르기로 하였지만 폭설 때문에 문 밖에 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4층 식당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치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당시 캉진곰파는 유선 전화를 제외하고 와이파이도 휴대폰도 데이터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25살의 젊은이 보조 가이드 치리 모습
▲ 보조 가이드 치리 25살의 젊은이 보조 가이드 치리 모습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폭설 때문에
▲ 캉진곰파 가는 길 폭설 때문에
ⓒ 신한범

관련사진보기

 
사연을 알아보니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동생이 죽었다고 한다. 소먹이로 잎을 따기 위해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져서 죽었다. 동생의 나이 겨우 스무 살. 캉진곰파에서 그의 고향 설레리에 가기 위해서는 이틀을 걸어 샤브르벤시로, 다시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야 카트만두. 카트만두에서 그의 고향까지는 지프로 18시간 이상 소요된다. 더구나 폭설 때문에 문 밖에 나가기도 힘든 상황. 고향집에 전화하기 위해 전화기 주위를 맴돌며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기만 하였다.

​일행과 상의하여 조의금을 걷어 그에게 전달하자 오열과 함께 나의 품에 안겼다. 다행히 다음날 날이 좋아 길이 열렸고 랑탕빌리지까지 하산한 다음 공사 때문에 왕래하고 있던 헬기를 타고 샤브르벤시로 이동하였으며 이틀 후 카트만두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고향에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씩 되풀이하며 헬기에 오르는 치리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덧붙이는 글 | 2019년 1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히말라야, #네팔, #랑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