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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는 2019년 2월 18일 "천주교 생명운동본부가 여성에 한해 형법상 낙태죄 처벌조항 폐지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하면서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단독] 천주교 "낙태죄, 여성 처벌은 폐지 가능"… 형법 개정에 첫 긍정적 반응)
 
천주교 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 산하 단체인 생명운동본부는 18일 본보에 보낸 입장문에서 "여성의 죄를 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라고 밝혔다. 반면 의료진 처벌조항은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형법 제 269, 270조는 각각 낙태한 여성과 시술한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중 269조의 폐지에 대해서만 긍정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입장문은 "태아도 엄연한 인간생명이며, 결국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라면서 '낙태는 죄'라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의사에 대한 처벌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다만 여성의 경우 이미 임신한 순간부터 낙태를 결정하고 실행하기까지 사회경제적, 개인적 고통과 부담이 크니 형법으로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생명운동본부 "여성 처벌 조항 폐지, 천주교 내 논의 필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낙태는 분명 살인 행위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명 경시 풍조의 근원'이라고 천명해 왔다. 

천주교 생명운동본부는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가 근본적으로 태아를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반생명적이고 반인륜적으로 인간의 기본권마저도 부정하고 있어서 악법이라고 규정하고, 이 조항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생명 문화의 심각한 현상인 낙태를 조장하는 독소 조항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2003년 범국민운동 차원에서 설립된 단체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밝혀온 일관된 입장과 생명운동본부의 탄생 배경을 볼 때 이번 의견 표명은 의료진 처벌 조항은 유지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진일보한 변화라 할 수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교회의 기존 입장은 변화가 없으며 생명운동본부의 입장 표명은 낙태죄 처벌 조항 개정에 대하여 천주교 내에서도 논의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 정도였다고 한다. (천주교, "낙태 여성 처벌 면제 논의 필요"). 그러나 '낙태는 살인 행위'라고 천명해 온 천주교 입장을 대변해 온 생명운동본부가 낙태죄 처벌 조항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여성의 목소리로부터 논의 시작해야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의 피켓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의 피켓
ⓒ 이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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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9년 2월 14일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2018년) 주요결과를 발표했다. 2018년 9월부터 10월까지 만 15세 이상 44세 이하 여성 1만 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실시했는데, 낙태한 여성(형법 제269조)과 의료인(형법 제270조)을 처벌하는 현행 형법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75.4%, 개정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3.8%로 나타났다.

현행 형법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복수응답)로는 '인공임신중절 시 여성만 처벌하기 때문에(66.2%)', '인공임신중절의 불법성이 여성을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시키기 때문에(65.5%)', '자녀 출산 여부는 기본적으로 개인(혹은 개별가족)의 선택이기 때문에(62.5%)'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를 보면, 현행 형법 조항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많은 여성은 낙태가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임신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데도 여성만 처벌받는 것은 잘못이며, 인공임신중절을 임신·출산·양육에 수반되는 사회경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이미 임신한 순간부터 낙태를 결정하고 실행하기까지 사회경제적 고통은 물론 개인적 고통과 부담이 매우 크다. 이런데도 또다시 낙태를 형법 조항에 넣어서 일괄적으로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다수 여성에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 조사 결과는 보여준다.

의료인 처벌 유지가 남기는 문제

여기서 낙태를 선택한 여성과 여성이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게 의료적 도움을 주는 의료인을 처벌하는 현행 형법 조항이 과연 낙태를 근절해 태아의 생명을 지키자는 가톨릭의 생명존중운동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행 형법은 낙태를 막는 데 아무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음성적으로 많은 인공임신중절이 행해지는데도 낙태죄로 기소되어 처벌받는 일은 드물다.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사법연감(통계)에 의하면 2017년에 낙태죄로 기소된 사건은 8건에 불과하고 1심 판결이 선고된 사건도 14건이 전부였다. 그리고 14건 중 10건에 대해 선고유예 판결이 선고되었다. 법원 판결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낙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현행 형법 조항은 사문화되어 존립 근거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오히려 사문화된 현행 형법 규정이 임신과 낙태의 결정과정에서 가장 고통받는 여성을 위험에 내몰고 있는 상황이다. 낙태를 결정한 여성은 불법적인 비의료기관 혹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적 환경에서 음성화 된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낙태 과정에서 임부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에 대한 위한 여부를 가리는 공개변론이 열리고 있다. 2018.5.24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에 대한 위한 여부를 가리는 공개변론이 열리고 있다. 2018.5.2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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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많은 국가가 태아 생명 보호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낙태에 대하여 우리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규제정책을 취해 낙태 관련 현실과 법의 괴리를 줄이고 태아와 임신한 여성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실효적인 방안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괄적인 처벌 대신 낙태 안전을 위한 법 제도를 정비하고,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결정하기 전에 심사숙고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오히려 낙태를 예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생명운동본부가 천주교 내에 낙태죄 폐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가톨릭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지 고민하면서 동시에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동참할 때 교회는 아픈 이들을 위한 따스한 온돌방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허윤정 변호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입니다.


태그:#임신중지, #낙태, #인공임신중절, #천주교,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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