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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과 물산장려운동(경제자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및 근우회에서 비중 있게 활동했다고 하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수록된 15000명 이상의 유공자들과 대등한 대우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해방 뒤 북한에서 활동하고 그쪽 공직을 받았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인물이 있다. 해방 전에는 남한에서 유명했지만, 해방 뒤에는 남한에서 잊힌 인물이다. 정칠성(丁七星, 1897~1958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훈처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정칠성이란 이름이 검색되지만, 이 정칠성은 남성이며 한자 성명은 鄭七星(1908~1971년)이다. 이분은 경북 칠곡에서 농민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벌여 두 차례에 걸쳐 총 4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분 역시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분은 여성 정칠성이다.

기생 금죽
 
31세 때의 정칠성. 기사 본문에 인용된 <비교문화연구> 제43집에 실린 사진.
 31세 때의 정칠성. 기사 본문에 인용된 <비교문화연구> 제43집에 실린 사진.
ⓒ 노지승,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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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주인공 정칠성은 대구 출신이며, 원래 이름은 칠성이 아니라 금죽(錦竹)이었다. 금죽 역시 최초의 이름은 아니다. 금죽을 쓸 당시의 직업이 기생이었으므로, 금죽은 예명이나 기명(妓名)이고 그 전에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기였고, 관기는 공노비(관노비)였다. 여성 공노비 일부가 관기로 충원돼, 행사 때 예능인으로 활동했다. <춘향전>의 월매·춘향 모녀가 모두 관기가 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관기는 대개 세습됐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기울던 1897년 출생한 정칠성은 그런 전통적 경로로 기생이 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의 저명한 대중잡지인 <삼천리>에 따르면, 그는 색다른 사연으로 기생이 됐다. 1937년 발간된 <삼천리> 제9권 제1호 속의 '저명인물 일대기'에서 정칠성(당시 40세) 본인이 기생이 된 사연을 직접 소개했다. 당시 언어로 기록된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조 말엽, 우연한 기회로 당시 대구관찰사의 진체(잔치인 듯)를 구경하게 되고, 그 마마의 지위를 부러워하여 그 길로 이웃 기생집에 찾아다니면서 공부라고 시작한 것이 천재란 말까지 듣게 되어 부득이 부모님이 그 길에 내놓게 되었는데, 그때 8세였다."
 
대구관찰사(대구시장)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기생들의 공연을 보고 나이 8세에 스스로 기생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곽 문화가 상륙해 기생이 성매매와 연결되기 전만 해도, 기생(妓生)은 예능인과 동의어로 통했다. 여덟 살 소녀가 반한 대상은 예능인으로서의 기생 직업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서 그런지 정칠성은 두각을 보였다. 군청이나 도청 행사 때마다 초청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충청·전라·경상 출신의 한양 기생들이 만든 한남권번에 적을 두고 활동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명문가 남성들의 첩으로 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정칠성의 인생을 확 바꾼 결정적 계기가 있다. '확 바꾼'이란 표현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는다. 인생이 180도로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스물둘 때 벌어진 1919년 3·1혁명이다. 위 <삼천리> 기사에서 정칠성은 3·1 당시를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아래 인용문 속의 '10년 전'은 '8년 전'으로 수정되고, '21세'는 '22세'로 높여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즉 21세 시(時), 당시는 3·1운동 직후, 조선 안은 어수선하던 판이라. 깊은 뜻은 모르지만 종로 네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젊은 가슴은 흥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 뒤를 따라다닌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활동사진에서 본 것과 이때 받은 충동은 마침내 현해탄을 건너게 만들어 ······"
 
종로 사거리에서 젊은 가슴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시위대 대열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흘러내리는 눈물뿐 아니라 요동치는 심장 박동도 함께 느끼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들한테 저항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 정칠성은 '3·1혁명' 때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았다. 비무장한 민중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구호를 외치고, 일본 공권력이 한편으로는 무력 진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가 죽어 위축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힘의 가능성을 느꼈던 듯하다.

두번의 변화, 정칠성이 되다

젊은 가슴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표현을 보면, 제국주의를 포함해 자신을 억눌렀던 모든 것들로 인한 한(恨)이 그때 어느 정도 해소됐던 모양이다. 일제뿐 아니라 모든 억압하는 것들을 상대로 '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그 뒤 그에게 벌어진 일을, 여성사 학자 박정애는 '3·1독립운동 뛰어든 사상(思想) 기생, 사회주의운동가로 활동'이란 기고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상 기생들이 그랬듯이, 지적 능력을 갖추고 일찍이 공적 공간에 진출하여 정세를 민감하게 읽고 있었다는 점이 정칠성의 결심을 재촉한 듯 싶다." - 2002년 4월 15일자 <한겨레신문>.
 
여덟 살 때 스스로의 판단으로 기생이 됐듯이, 스물두 살 때도 그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인생 방향을 수정했다. 역사학자 박순섭의 논문 '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은 이렇게 말한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강습소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타이핑 기술을 익혔다. 또한 이때부터 기명이던 금죽 대신 칠성이란 이름으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 한국여성사학회가 2017년 발행한 <여성과 역사> 제26집.
 
어학을 공부하고 타이핑을 배웠다는 것의 공통점은, 언어적 표현 수단의 계발이다. 언어와 문자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목적으로 일본 유학을 했던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정칠성이 착수한 활동은 여성해방운동이다. 2016년 촛불혁명 뒤에 미투운동으로 대표되는 여성운동이 활발해진 것처럼, 3·1혁명 뒤에도 여성운동이 활발했다. 유관순으로 상징되는 여성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결과였다. 정칠성은 신간회와 자매조직인 근우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여성인권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사회운동가로서 정칠성이 어느 정도의 위상을 확보했는지는, 위에 소개된 <삼천리> 제9권 제1호 '저명인물 일대기'에 소개된 사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기사에서 정칠성은 안창호·이광수·윤치호 같은 거물급들과 함께 소개됐다. 전직 기생이라는 사실이 약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여성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다.

정칠성이 생각하는 진정한 독립은, 민족해방뿐 아니라 여성해방까지 함께 달성되는 차원이었다. 그가 추구한 여성해방의 구체적 실상을 1929년 <삼천리> 제2호에 실린 '적연(赤戀) 비판, 꼬론타이의 성도덕에 대하여(대담)'란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직집 집필한 대담 형식의 이 글에서, 정칠성은 여성해방론을 아래와 같이 개진했다.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었다.
 
"우리들이 새로운 양성(兩性) 관계를 세우려면, 뭐니뭐니해도 경제적 독립부터 얻지 않으면 다 헛일이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이 남성 중심의 가족제도를 뛰어넘어서 경제적 독립을 얻을꼬 하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최후의 말은, 언제든지 무산자의 해방이 없이는 부인의 해방이 없다는 말 한마디가 있을 뿐입니다."
 
정칠성은 진정한 독립은 노동자를 자본에서 해방시키고 여성을 남성에서 해방시킨 뒤에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일본을 내쫓은 뒤에도 낡은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해방과 독립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외세뿐 아니라 동족 중의 적폐세력도 함께 청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인간해방을 성취해야만 진정한 독립이 가능하다고 봤던 것이다.

단순히 일본을 몰아내는 데만 신경 쓰지 않고 일본을 몰아낸 뒤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까지 고민했다는 점에서, 정칠성은 앞서가는 항일투사였다. 노지승 인천대 교수의 논문 '젠더, 노동, 감정 그리고 정치적 각성의 순간 -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삶과 활동에 관한 연구'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정칠성은 자신이 잠재적인 혹은 실질적인 프롤레타리아임을 깨닫지 못하고 남성의 돈으로 의존적으로 살면서 그러한 노예 됨을 인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교육받은 신여성으로 여기는 사이비 신여성에 대해 ····· 분노를 쏟아낸다." -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가 2016년 발행한 <비교문화연구> 제43집.
 
노동과 여성이 함께 해방돼야만 진정한 독립이라는 정칠성의 사상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그를 월북으로 인도하게 된다. 북한에 간 그는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는 등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하지만 김일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1958년 숙청됐다. 그래서 6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경력 때문에 그는 남한에서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 왔다.

기생이 되고 독립운동가가 될 때처럼 월북할 때도 정칠성은 자기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독립운동 한 것은 그렇다 치고 북에는 왜 갔냐?"는 비판을 남한 사람들한테 듣는다 해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그대로 실천하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태그:#정칠성, #신간회, #근우회, #여성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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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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