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특징부터 말할 수도 있었다. 혹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는 논리로 시작할 수도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연기를 해본 적 없다는 이 아이들의 사실 같은 '연기' 실력을 놀라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떠오른 자막을 보니, 이런 류의 생각이 단 한순간에 포말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건 허상이 아니라, 실재였다. 연기가 아니라, 생활이었고.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 현실을 나는 영화로 소비했다. 가난을 삶의 단짝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위태로운 그들의 삶을, 돈을 지불함으로써 '관람'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예는 이 글이다. 영화 속 카메라가 그들의 삶을 최대한의 예우로 담았듯, 나 역시 글 속에 그들을 정성껏 담으려 한다. 허공에서 부유하는 낱말을 예쁘장하게 조립한 글이 아니라, 하나하나 조심히 단어를 세공하고, 혹여나 그들이 불편한 데는 없을지 표현을 점검하며,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소년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이유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세미콜론 스튜디오

  
극 중 열두 살 어린 소년인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부모를 고소한다. 죄목은 '나를 태어나게 한 죄'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부모를 고소하느냐고 묻는다면, 자인의 부모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보고 이야기 해보세요."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유산이 가난뿐이었던 그들은, 그 비참한 되물림을 끊는 건 관심도 없는지 대책 없이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다. 기왕에 생명이 탄생했으면, 잘 돌보기라도 해야지. 급기야 사랑하는 딸 사하르가 막 초경을 했을 무렵, 그들은 돈을 받는 대가로 이 아이를 성인 남자에게 시집보낸다. 이에 자인은, 더 이상 그 집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일어서 집을 나선다.

배려 있는 영화는 인물들을 찍는 카메라의 시선조차 세심하다. 영화 속 카메라는 내내 무릎을 구부린 듯한 높이에서 촬영하는데, 그건 어린 자인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인 것 같다. 어른의 시선으로 자인을 '내려다' 보지 않고, 자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를 응시하거나, 때론 자인을 '올려다' 보기까지 한다. 사람에 대한 배려는 사소한 디테일마저 신경 쓰는 세심함과 동의어일 것이다. 자인만이 아니다. 기실 카메라는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가에서 그들을 응시한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 응시의 대상은 하나같이 소외되거나, 소외되는 중이거나, 소외될 사람이다. 삶의 벼랑으로 천천히 내몰리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 미혼모, 난민, 불법체류자, 무국적자인 갓난아기와 가족이 없는 노인. 더욱 우리를 목메게 하는 건, 이들이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따뜻하게 보듬는 순간이다. 그녀가 당국에 잡혔으므로, 한순간에 엄마를 잃은 요나스에게 자인은 새로운 보호자가 되거나, 영주권을 얻기 위해 취업했음을 증명해야 했던 라힐에게 가족이 없는 노인이 '보호자' 역할을 했던 것(비록 한순간이었지만)은 두고두고 뭉클한 장면이다. 휘청이는 개인을 붙잡는 건, 늘 함께의 힘이다.

자인의 버스 옆자리에 앉은 '바퀴 맨' 할아버지는 마치, 그들 모두를 향한 나딘 라바키 감독의 응원처럼 보인다. 스파이더맨 심볼에 바퀴벌레로 바꿔 넣은 수트를 입은 할아버지는 '바퀴 맨'인데, 이건 이 자체로 '바퀴벌레'의 상징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후에도 짧게 나온 쇼트를 통해 벽을 기어 다니거나 땅을 기는 바퀴벌레를 포착한다) 불법체류자인 라힐은 삶이 위태롭다고 느낄 때마다 '바퀴 맨' 할아버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곳이 참 더럽고 부박하고 비참하고 처절해도, 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라.

<가버나움>은 신을 고발하는 영화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세미콜론 스튜디오

  
자인은 부모를 고발하지만, 이 영화는 그의 부모를 고발하지 않는다. 영화가 비추는 건 그 너머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저 초월적인 그분을. (영화 초반, 카메라는 부감 쇼트로 위에서 아래로 이 도시를 내려다보는데 이건 초월자의 시점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영화는 신을 고발한다. 종교는 천지 만물에 사랑과 자비로 범재하는 신을 '느끼는데'(불법체류자 난민을 가둔 유치장에서 가톨릭은 찬양하고, 무슬림은 기도한다),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는 신과 '싸우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천국은 신이 있는 곳이므로, 신이 이곳에 있다면 이곳도 천국이다'라는 그들에게, 오직 자인만 '이곳은 지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투쟁해야 한다. 이 세상의 불행과 아픔을 그저 눈물 흘리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기꺼이 신과 투쟁해야 한다. 왜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고. 만들었으면 왜 세심하게 돌보지 않냐고. 지금 볼에서 흐르는 눈물이 보이지 않냐고. 그래서, 영화 <가버나움>은 준엄하게 신을 기소하는 법정이다. 자인은 인류의 대표인 검사로서.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세미콜론 스튜디오

  
영화에는 종종 자인의 뒷모습이 나온다. 영화의 문법에서 뒷모습은 도망침과 초라함, 또는 처절함의 상징으로 쓰이곤 했다. 자인의 뒷모습 역시 얼마든지 애처롭게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그의 등은 지금 무엇으로부터 피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주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삶과, 부모와, 신 앞에서 당당히 마주 서 있는 거라고.
 
가버나움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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