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05 09:28최종 업데이트 19.03.05 09:28
나는 농구 코트를 뛰어다니는 초등학생이었다. 큰 키 때문에 우연히 반 농구팀 대표로 뽑혔는데, 그전에는 피아노나 미술을 배우느라 흥미 붙일 새 없었던 운동을 덜컥하게 된 것이다. 몸 쓰기가 어색해 쭈뼛대는 건 잠시였고, 곧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농구공 하나 들고 운동장으로 향하는 재미에 폭 빠졌다. 농구공이 땅에 튕기는 탄성을 느끼며 공을 팡팡 치고 달리기, 온몸을 이용해 내 키의 세 배 되는 골대에 공 던지기, 땀범벅인 몸으로 벤치에 앉아 시원한 물 벌컥벌컥 마시기. 처음으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노는 즐거움을 알았던 것 같다. 

내 즐거움을 위협하는 유일한 방해꾼은 같은 반 남자애들이었다. 다른 반 농구팀과 시합하던 날, 전 학년이 둘러앉은 농구코트 어디선가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여자애들이 뛰니까 진짜 웃긴다. 출렁거려. 경기를 저렇게 하냐. 아 답답해.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내 귀를 찌르던 목소리들. 그날 경기 결과는 기억나지 않지만, 억울하게도 그 말들만 세세하게 기억난다. 


내 농구 사랑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서 주말마다 친구와 빈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 시합을 벌이곤 했다. 오락실에 있는 농구 게임도 제법 잘해서 군대 휴가 나온 친구들과 내기 농구로 꽤 쏠쏠한 수입을 냈다. 가끔 내 농구 사랑을 들려주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네가 농구를 해?' 가 아닌, '여자가 농구를 즐겨? 하면 얼마나 잘하겠어'라는 시선. 여자와 농구. 나에겐 자연스러운 취미가 누군가에겐 성별 이분법에 따라 판단되는 놀라움이다.

내 친구 조재는 전직 특공무술 사범이다. 조재는 잘하는 게 많다. 백 덤블링, 칼 던지기, 오토바이 몰기, 드로잉, 요리, 슬라임 만들기. 조재는 자신이 잘하는 수많은 것 중에 특공무술이나 오토바이가 항상 입방아에 오른다고 했다. '무슨 여자애가 저런 걸 해'라거나 '여자가 대단하다'는 반응. 심지어 사범 일을 할 때도 초등학생들조차 자기를 가르치려거나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남성의 영역'을 침범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익숙한 태도다. 조재는 반복되는 반응이 화나기보다 지루하다고 했다. 드로잉이나 요리는 여자에게 어울리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지만, 오토바이나 특공무술은 여자에게는 이질적인 요소로 취급되는 편견은 뻔하니까. 

이 사회는 성별 이분법에 따라 공간, 행동, 감정 등을 제한한다. 같은 '기술가정' 시간이어도 여성은 가정을 남성은 기술을 교육받고, 여성에게는 수줍음과 수동성을 남성에게는 대범함과 능동성을 요구하고, 여성에게는 엄마의 역할을 남성에게는 아빠의 역할을, 여성에게는 악기를 남성에게는 운동을 부추기는 식이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이분법에 따라 길든 인식은 개개인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들은 신체적으로 핸디캡을 갖게 된다"고 말하면서, 성차별 사회에서는 신체적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와 자극의 부족, 여성스러운 몸가짐에 대한 경직된 기준, 끊임없는 대상화, 몸이 공격받는 것에 대한 위협이 뒤섞여서 대다수 여성이 가진 온전한 신체적 잠재력이 박탈된다고 말한다.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46p)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농구의 맛을 알게 된 계기가 새삼스러워졌다. 만약 내가 우연히 키가 크지 않았다면 아마 농구의 즐거움은 평생 모를 수도 있었겠지. 조재 역시 우연히 들른 체육관에서 특공무술을 접하지 않았다면 평생 몸을 단련하는 즐거움을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내가 놓친 즐거움이 뭐가 있을까? 나는 또 무엇을 지레 포기하고 살았을까. 축구, 야구, 복싱, 목공, 설비. 언젠가 꼭 배우고 싶은 다양한 목록 중에 요즘 내 화두는 운전이다. 이제는 여성 운전자가 많이 늘어났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조수석에 앉기만 했던 나에게 운전은 진입장벽이 높은 도전이었다. 

 

 

누군가의 차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앉으면서 귀에 박히게 들었던 말. 아씨, 저거 분명 여자일 거야. 딱 김여사네. 왜 운전하겠다고 나와서. 집에서 밥이나 하지. 애나 보지. 오죽하면 아예 차량용 스티커에 "지금 밥하러 가는 중입니다"라거나 "애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라는 문구도 심심치 않게 본다. SNS를 조금만 검색해도 '김여사 레전드' '주차 민폐 김여사'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은 김여사' 따위의 게시물이 널려있다. 아무리 통계적으로 여성 운전자의 사고 비율이 남성에 비해 더 적다는 사실, 여성은 공간 지각 능력이 없다는 건 편견이라는 사실을 알려줘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도로의 세계는 일상 세계와 닮은 부분이 많다. 가령, 외제차의 경우에는 스치기만 해도 돈이 곱절로 나가기 때문에 매연도 맡지 말라는 속설이 있고, 실제로 평소에 난폭 운전하던 사람도 주변에 외제차가 있으면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겸손해진다. 차의 계급에 따라 몸 사리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 한 친구는 어머니의 외제차를 일주일간 몰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도로가 그렇게 친절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어. 이래서 다들 외제차 타는 건가 싶어." 

최근 베이지색 경차를 구입한 친구는 이전에 큰 차를 타고 다닐 땐 못 느꼈던 위협을 자주 경험했다고 했다. 친구가 이전에 탔던 차는 중고 SUV였는데, 그때보다 확실히 지금 차가 '여성 차'로 보이기 때문인지 도로가 불친절해졌다고 했다. 차선 하나 바꾸기도 어려워지고, 뒤에서 이유 없이 클랙슨을 울리거나 쌍라이트를 켜대는 일이 늘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차종과 색에 따라 젠더를 구분하고, 운전 실력에 따라 조금 서툴면 당연히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도로 위의 여자 딱지다. 

얼마 전 난생처음 차를 구입하러 자동차 판매점에 갔다. 딜러에게 경차를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한참을 차에 대해 설명하던 딜러가 말했다.

"만약 차를 사신다면 선텐은 꼭 해드려요. 여성 운전자들은 아무래도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경우가 많잖아요. 선텐은 안전에 필수예요." 

안 그래도 운전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차에, 내가 도로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더 걱정되었다. 선텐이 차 내부의 과열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말, 같은 기능도 다르게 해석될 만큼 도로는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정글처럼 위험한 곳인가 싶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앉는 일. 내게 주어진 자리를 이탈하는 일을. 

김현경 교수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깨끗한 여자는 사회에서 현상되지 않는 여자'라고 했다. 집에서 가만히 애 보지 않고 밖으로 나오는 여자는 '맘충'이라 불리고, 살림하지 않고 스스로 소비하는 여자는 '김치녀'라 불리고, 조수석에 타지 않고 감히 운전석에 앉는 여자는 '김여사'가 되는 식이다. 깨끗한 여자라는 목표가 애초에 달성 가능하지 않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면 굳이 내 운전석을 양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차를 사기 직전, 주위 사람들은 내게 초보 운전 딱지를 절대 붙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걸 붙이는 순간 도로에서 무시당하고 오히려 더 위협을 당한다는 것이다. 나는 초보 운전 딱지보다 여자 딱지가 더 걱정되는데. 걱정과 두려움이 한가득이지만, 언제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기 위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운전에 익숙해지면, 다음에는 복싱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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