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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설화산 아래 동서로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눈송이 닮은 초가집과 반듯한 기와집이 어깨를 나누며 옹기종기 모여 살아온 지 500년이 넘었다.
▲ 외암마을 정경  설화산 아래 동서로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눈송이 닮은 초가집과 반듯한 기와집이 어깨를 나누며 옹기종기 모여 살아온 지 50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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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殘雪)

설화산(雪華山) 아랫마을, 외암(外巖)에 마지막 눈이 남았다. 외암종가댁 돌담자락에, 건재고택 뒤꼍에, 감찰댁 뒷담에, 교수댁 연못가에, 송화댁 사랑마당에, 참봉댁 오지굴뚝 곁에, 참판댁 안마당에 남았다. 눈송이, 설화(雪華)는 아니더라도 3월을 앞둔 따스한 날, 외암마을에서 잔설을 보다니, 설화산이 이름값 좀 하는 모양이다.

초가을에서 늦봄까지 눈 덮인 풍광이 장관이라 설화산이라 했다. 한가위에 시작한 눈이 하지까지 녹지 않아 설악산도 설산(雪山), 설화산이라 한 걸 보면 눈 풍광만으로는 설화산이 설악산에 뒤지지 않는다. 건재고택 사랑채 당호는 설산장(雪山莊)이다. 집주인은 설화산 아래에서 설산, 설악을 꿈꾸지 않았나 싶다.

돌담과 물길

외암마을은 예안이씨 집성마을이다. 원래 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 500여 년 전, 예안이씨 이사종이 평택진씨 진한평의 맏사위로 들어와 처가 재산을 물려받고 눌러 살았다. 그 후 후손이 번창하여 외암은 어느새 예안이씨 씨족마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처가 재산을 물려받아 처가마을에서 가문을 일으킨 일이 종종 있어 그리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마을길은 돌담길. 돌 많고 말(글 읽는 소리) 많고 양반 많은 마을이라 삼다마을이라 했다.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은 돌이 천지다. 논밭 일궈 캐낸 돌로 수백 년 쌓고 또 쌓았다. 마을사람들 성정을 닮았는지 세월이 쌓인 건지 돌담은 두툼하다. 그 두툼한 돌담은 기와집, 초가집, 큰집, 작은 집 가리지 않고 쉬엄쉬엄 이웃을 이어 마을담이 되었다.
  
신창댁에서 시작한 돌담은 온 마을을 돌아 동쪽 깊숙이 외암종손댁까지 뻗었다. 그다지 높지 않고 두툼하다.
▲ 외암마을 돌담길 신창댁에서 시작한 돌담은 온 마을을 돌아 동쪽 깊숙이 외암종손댁까지 뻗었다. 그다지 높지 않고 두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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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댁 뒷담 물길이다. 설화산 계류는 마을 안에서 돌담 타고 흐른다. 마을 안까지 물길을 조성하여 방화수로 활용하고 이 물길로 정원을 꾸몄다.
▲ 외암마을 물길 감찰댁 뒷담 물길이다. 설화산 계류는 마을 안에서 돌담 타고 흐른다. 마을 안까지 물길을 조성하여 방화수로 활용하고 이 물길로 정원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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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줄기마다 옛집이 달렸다. 마을 어귀 신창댁을 시작으로 마을 동쪽 끝에 외암종손댁과 사당이 달렸고 그 밑에 송화댁, 참봉댁이 열렸다. 마을 한복판에 마을의 중심, 건재고택이 움텄고 옆으로 감찰댁, 위로 교수댁이 벌었다. 마을의 기둥, 참판댁은 동쪽 양지바른 터에 싹을 틔웠다. 모두 입향조, 이사종의 후손집들이다.

돌담이 이웃과 세대를 잇는 핏줄이라면 물길은 사람에게 이로운 생명줄이다. 외암마을은 물길을 내어 설화산 계류를 마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물길은 빨래터가 되고 설화산의 화기를 누르는 방화수를 제공했다. 풍류를 즐기는 집주인에게는 정원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송화댁, 건재고택, 교수댁 집주인은 이 물길을 이용해 전국에서 소문난 정원을 꾸몄다.

옛집들
  
송화댁은 이사종의 9세손, 이장현이 송화군수를 지내 송화댁이라 불린다. 사랑마당에 소나무가 가득하고 마당 앞에 크게 굽은 물길이 나 있다.
▲ 송화댁 사랑마당 정경 송화댁은 이사종의 9세손, 이장현이 송화군수를 지내 송화댁이라 불린다. 사랑마당에 소나무가 가득하고 마당 앞에 크게 굽은 물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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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댁은 살림집이 아니라 풍류깨나 즐기는 조선선비가 풍치 그윽한 자연에다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구현한 풍류공간으로 보인다. 넓은 사랑마당에 적당히 굽은 해묵은 소나무가 가득 하고 크고 작고 뾰족하고 펑퍼짐한 자연석으로 만든 물길이 나있다. 이 집주인은 연못 대신 물길에 애정을 쏟았다. 설화산 계곡 일부를 집안으로 가져오려 한 것인지, 물길을 사랑마당 앞에서 'S'자로 크게 휘어지게 하고 물길 안에도 높낮이를 달리 하였다.

사랑채 동쪽과 남쪽에 각각 한 기씩 굴뚝을 세워 자칫 휑하게 보이는 공간을 따뜻하게 하였다. 굴뚝만 보면 참봉댁 안채 굴뚝이 더 인상적이다. 굴뚝 몸에 항아리를 올려 부풀게 하였고 위에 옹기를 덧대 키를 높였는데 그 모양이 참으로 요상하다. 집주인을 잘 알지 못하지만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참봉나으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참봉댁은 이사종의 12세손 이중렬과 아들 이용후가 참봉벼슬을 지내 참봉댁이라 불린다. 항아리와 옹기를 얹어 만든 굴뚝은 인상적이다.
▲ 참봉댁 굴뚝 참봉댁은 이사종의 12세손 이중렬과 아들 이용후가 참봉벼슬을 지내 참봉댁이라 불린다. 항아리와 옹기를 얹어 만든 굴뚝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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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고택은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지은 집으로 200년 정도 되었다. 조선 삼대논쟁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인물성동이론논쟁(人物性同異論論爭)의 중심에 선 외암 이간(1677-1727)이 태어난 집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태어난 터라 할 수 있다. 사랑채 이마와 기둥에 '설산장', '무량수각', '건재장', '외암서사' '고정실' 등 편액과 주련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고정실(古鼎室) 편액이 눈에 띈다. 추사 글씨다. 추사의 두 번째 부인, 예안이씨는 이간의 증손, 이병현의 딸로 외암마을은 추사의 처가 마을인 셈이다. 이 글씨는 추사가 처가에 들렀을 때 써준 것이라 한다. 추사는 다로, 승설도인, 고정실주인 등 차와 관련한 아호를 갖고 있는데 고정실은 이와 관련 있다. 대학자의 집에 대가(大家)의 글씨가 더해져 고택에는 은은한 문기(文氣)가 흐르고 있다.
  
추사글씨와 함께 여러 편액이 달려있다. 대학자 이간의 집에 대가 추사의 글씨가 더해져 문기가 은은히 흐른다.
▲ 건재고택 사랑채 추사글씨와 함께 여러 편액이 달려있다. 대학자 이간의 집에 대가 추사의 글씨가 더해져 문기가 은은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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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물길을 조성하여 설화산 계류를 끌어들였다. 디테일에도 신경을 써 물길 위에 아름다운 무지개돌다리를 설치하였다. 물길로 나뉜 두 세계를 무지개다리 타고 오가는 풍류를 즐겼다.
▲ 건재고택 무지개돌다리와 물길 집안에 물길을 조성하여 설화산 계류를 끌어들였다. 디테일에도 신경을 써 물길 위에 아름다운 무지개돌다리를 설치하였다. 물길로 나뉜 두 세계를 무지개다리 타고 오가는 풍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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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마당은 여느 집과 달리 답답하다. 집주인이 일본정원을 보고 꾸몄기 때문이라 한다. 일본정원을 흉내는 냈지만 다듬고 길들이고 늘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정적인 일본 정원과 다르다. 외암고택 정원은 동적이다. 집주인은 사시사철 푸른 나무만 심지 않고 산수유, 은행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라 색이 바뀌는 변화를 즐겼다.

집주인에게 물과 연기는 관리의 대상이었다. 설화산 계류를 집안으로 들여 굽은 물길을 내고 안채와 사랑채 연못을 거쳐 서쪽 담 밑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게다가 사랑채 마루 밑에서 시작하여 사랑채 동쪽 둔덕을 거쳐 사랑마당까지 내굴길(연도)을 내어 연기가 정원에 이르게 하였다. 큼직한 자연석 두 개를 세우고 위에 두툼한 판석을 덮어 연문(煙門)을 만들고 암막새로 느슨하게 막아 그 틈새로 연기가 퍼져 나오도록 했다.
 
설화산 아래에 있는 집답게 사랑채 이름을 설산장이라 했다. 사진 아래쪽에 기와로 덮여있는 구조물이 놀랍게도 굴뚝이다. 사랑채 밑에서 정원까지 가래굴을 내어 연기가 정원에 이르게 하였다.
▲ 설산장과 굴뚝 설화산 아래에 있는 집답게 사랑채 이름을 설산장이라 했다. 사진 아래쪽에 기와로 덮여있는 구조물이 놀랍게도 굴뚝이다. 사랑채 밑에서 정원까지 가래굴을 내어 연기가 정원에 이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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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바닥에 깔리도록 연기를 유도한 것이다. 연기가 정원수의 허리, 솔잎, 나뭇잎을 감싸는 광경, 운해(雲海)의 멋을 즐기려 한 것이다. 집주인은 부드러운 둔덕, 사계절 색이 바뀌는 정원, 곡수(曲水), 운해로 설화산 계곡에 있을 법한 별서정원을 꿈꾸지 않았나 싶다.

외암마을 옛집 중에 사람이 살아 윤기가 흐르는 집다운 집이 참판댁이다. 이 집은 고종이 구한말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열(1868-1950)에게 '퇴호거사(退湖居士)'의 사호와 함께 하사하여 지은 집이다. 퇴호는 일본이 굴욕적인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 요구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낙향하였다. 현재 이정열의 손자, 이득선옹이 종부와 함께 살고 있다.
  
고종이 하사하여 지은 집이라 한다. 대문채 돌담 밑에 새로 세운 옹기굴뚝이 연엽주 익어가듯 익어가고 있다.
▲ 참판댁 정경 고종이 하사하여 지은 집이라 한다. 대문채 돌담 밑에 새로 세운 옹기굴뚝이 연엽주 익어가듯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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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두 개로 기단에 연기구멍을 낸 기단 굴뚝이다. ‘퇴호거사’의 의미와 잘 어울린다.
▲ 참판댁 굴뚝 기와 두 개로 기단에 연기구멍을 낸 기단 굴뚝이다. ‘퇴호거사’의 의미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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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영친왕이 쓴 퇴호거사의 편액이 걸려 있다. 퇴호거사는 '강호에 물러나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라는 뜻 아니겠는가. 이 편액에 아주 잘 어울리는 굴뚝이 사랑채 굴뚝이다. 기단에 기와 두 개를 포개 구멍을 낸 기단굴뚝이다. 숨어 살기로 작정한 거사가 그 의지를 담아 만든 굴뚝으로 보인다. 새로 세운 굴뚝이기는 하나 대문채의 오지굴뚝도 볼 만하다. 이 집안의 비법으로 빚은 연엽주(蓮葉酒) 익어가듯 익어가고 있다.

잔상(殘像)

설화산 서쪽에 외암마을이 있고 그 너머 동쪽, 중리 큰마을에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살림집 맹사성고택이 있다.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하는 맹사성집이니 굴뚝이 궁금하여 가보았다. 살림채 토방에 앉아 따뜻한 볕을 쬐고 있는 종부에게 말벗이 될 겸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주고받다가 대문채 화방벽 한가운데에 기왓장 하나가 불룩 튀어나와 있어 물어봤다. 굴뚝이라 짐작은 하였지만 확인 차 물어본 것이다.

"굴뚝 맞아유. 예전엔 거짝서 연기가 나왔슈~."

벽체 가운데에 구멍을 낸 굴뚝은 여주 영릉재실(寧陵齋室)에서 보고 처음 본다. 기왓장 하나로 이런 굴뚝을 만들다니 대단한 발상이다. 건재고택의 납작 엎드린 굴뚝은 풍류의 멋이 있는 굴뚝이고 참판댁 굴뚝은 은자, 거사에게 어울리는 굴뚝이라면 아무런 장식 없이 소박하게 만든 맹사성 대문채 굴뚝은 청백리에 어울리는 굴뚝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살림집이다. 원래 주인은 최영장군으로 손녀사위인 맹사성이 물려받은 후 맹씨집안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 맹사성고택 정경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살림집이다. 원래 주인은 최영장군으로 손녀사위인 맹사성이 물려받은 후 맹씨집안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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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 좌우 벽체 한가운데에 암키와 하나로 단출하게 만든 굴뚝이다.
▲ 맹사성고택 대문채 굴뚝 대문채 좌우 벽체 한가운데에 암키와 하나로 단출하게 만든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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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는 나오는 길에 "나도 성삼문 후손유"라 불쑥 한마디 하였다.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꺼낸 짧고 굵직한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 말 중에 종부의 맘에 들지 않은 것이 있었나 보다. 이 말 한마디에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참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마디로 잘라 말하는 충청도사람의 기질이 녹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충청인의 '냅둬유' 기질이지...

돌아오는 내내 종부의 농익은 사투리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불쑥 건넨 한마디는 이상하거나 서운하게 들리기는커녕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응어리진 '잔설'을 녹이는 힘이 있었다. 내 마음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월23일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외암마을, #건재고택, #참판댁, #송화댁, #맹사성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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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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