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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연합뉴스) 문동환 목사가 지난 9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98세. 2019.3.10 [문동환 목사측 제공]
  (서울=연합뉴스) 문동환 목사가 지난 9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98세. 2019.3.10 [문동환 목사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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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은 지난 9일에 소천한 문동환 목사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사료를 최초로 공개하고자 한다. 이 기사에서 공개하는 사료는 문동환 목사와 김대중 대통령과 관계된 것으로, 문동환 목사의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동환 목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이었으며, 그의 민주화 운동 여정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그만큼 두 인물은 매우 긴밀한 관계 속에서 여러 활동을 함께 했다.

유신 때부터 시작된 문동환-김대중 인연
 
1983년~1984년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시기, 대화를 나누는 김대중과 문동환.
 1983년~1984년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시기, 대화를 나누는 김대중과 문동환.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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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문동환과 김대중의 활동을 1988년 평화민주당 때부터 조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사람의 정치적 인연과 연대는 1976년 유신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에는 함께 옥고를 치렀으며, 1980년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에는 미국에 있던 문동환이 김대중의 구명과 문익환 등 민주 인사들의 석방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 이후 김대중이 2차 미국 망명(1982.12.~1985.2.)을 할 때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문동환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두 사람의 평민당 활동은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기사를 통해 공개할 사료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관련 사료 1점, 1980년 문동환의 김대중 구명 관련한 사료 1점,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 당시 문동환-김대중 관련 사료 3점 등 총 세 시기에 걸친 5점의 기록이다. 시간 순서대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관련 사료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수감 중인 문동환의 인권을 위해 노력한 문혜림 여사

1975년 한신대학교에서 해직된 문동환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22개월간 감옥생활을 하게 됐다. 선언에 함께한 김대중 역시 투옥됐다. 문동환은 당시 김대중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뜻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고난을 함께하면서 민주화 투쟁의 동지가 된 것이다.

문동환의 평가에서 확인되듯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과 재야 민주화 인사들의 연대를 공고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수감 생활을 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고통은 매우 컸다. 가족들은 투옥 중인 이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들의 조속한 석방과 인권개선을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사건으로 김대중은 총 34개월 동안 수감됐는데,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인해 얻은 다리 부상에 대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김대중은 수감 기간 도중에 큰 고통을 호소했고, 결국 다리 부상이 악화돼 지팡이를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부인 이희호 여사는 3.1 사건으로 투옥된 민주 인사들의 조속한 석방과 인권 개선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특히 해외의 주요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문동환·문혜림 부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동환 역시 수감 기간 중에 여러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부인 문혜림(Harriett Faye Moon) 여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문혜림이 1977년 8월 19일 미국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고 문동환 목사의 반려자 문혜림 여사가 1977년 8월 19일 작성한 서신. 이 서신은 미국으로 보내졌으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 [최초공개] 문동환 목사의 반려자 문혜림 여사가 수감된 남편의 인권 보호를 촉구하는 서신 고 문동환 목사의 반려자 문혜림 여사가 1977년 8월 19일 작성한 서신. 이 서신은 미국으로 보내졌으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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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8월 19일

한국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여러분들의 도움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저의 남편(문동환 박사)은 모두가 기대했던 바와 달리 8월 15일에 석방되지 못했습니다. 모든 정치범들은 민주화 투쟁을 한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작성해야만 석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에 따라 결연히 행한 일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성과 회개를 한다는 진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석방되어야 합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미군철수에 대한 보상으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앤드류 영은 "우리는 독재자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미국이 미군철수와 함께 한국 정부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늘린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억압은 훨씬 더 심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인권을 회복시키고, 기본적 자유를 되찾아야만 합니다. 독재자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군사적 원조를 늘리자는 것입니까? 저는 이러한 정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최대의 적은 군사적 원조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전입니다.

만일 인권이 진정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원조 증가에 반대하는 서신을 가능한 많이 보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아직까지 31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을 뿐 수백 명의 정치범들은 여전히 수감 중에 있습니다. 이는 단지 카터 대통령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 발의 피'에 불과한 사면조치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저의 남편은 여전히 독방에 구금되어 있으며, 단백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빵, 면, 밥 등으로 구성된 열악한 식단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하루 30분의 운동시간을 제외하고는 햇볕을 쬘 수도 없습니다. 그의 혈압은 150/110인데, 최저 혈압 수치가 상당히 높습니다. 또한 그는 요통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의사의 말로는 신장 쪽 문제의 징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내 남편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은 15일 이후로 오로지 쌀만 섭취하며 절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미국 대사관과 이와 관련해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이와 같은 금식은 종교적인 수련일 뿐이며 그는 아무런 요구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그가 진술서 작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문혜림
 
편지를 보면 당시 수감 중이던 문동환의 안위를 걱정하는 문혜림 여사의 심정과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활동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이 합쳐져 문동환은 형인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등과 함께 1977년 12월 31일 석방됐다.

문동환은 그 직후 1979년 8월 YH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다가 12월에 석방돼 1980년 봄 세계교회연합회의 참석차 독일로 출국했다. 그런데 그 기간 한국에서 광주항쟁이 발생했고, 문동환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자 그는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문동환, 김대중 구명-민주인사 석방 위해 미국서 노력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쿠데타와 광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그래서 주동자로 몰린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문익환 등 수 많은 민주화 인사들에게 중형을 내리는 등 가혹한 탄압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신군부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죽음같은 침묵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폭주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의 압력이 필요했다. 그 당시 미국, 일본, 유럽 등 당시 한국 정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들의 주요 인사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고 미국에 있던 문동환 역시 이와 같은 흐름에 동참했다.

당시 문동환은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Campaign To Free Kim Dae-Jung and The Other Democratic Leaders)을 조직해 공동의장을 맡았다. 당시 이 조직에는 미국의 국회의원, 학자, 종교인 등 저명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모임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이는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도 큰 압력이 됐다. 

짧은 기간 안에 저명한 미국 인사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1973년에 조직된 재미교포 민주화 단체인 한민통 미국본부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1973년 김대중이 1차 미국 망명할 당시 조직한 한민통 미국본부에는 종교인, 언론인, 지식인 등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문동환 역시 이들과 관련이 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Campaign To Free Kim Dae-Jung and The Other Democratic Leaders)에 문동환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참여한 미국 측 인사는 당시 미니에폴리스 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도널드 프레이저(Donald M. Fraser)였다.

도널드 프레이저는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 연방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의 인권정책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민주적 활동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을 이끌기도 하는 등 제3세계 인권 문제와 관련해 많은 활동을 전개했었다.

문동환과 도널드 프레이저는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Campaign To Free Kim Dae-Jung and The Other Democratic Leaders) 공동의장 자격으로 전두환 대통령에게 1980년 11월 24일 편지를 보냈다. 당시 김대중은 9월 17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1월 3일 2심에서도 사형선고를 받는 등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 공동의장인 문동환 목사와 도널드 프레이저 당시 미니에폴리스 시장이 1980년 11월 24일 작성해 전두환씨에게 보낸 서신. 이 서신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 [최초공개] 문동환 목사 - 도널드 프레이저 미니에폴리스 시장이 전두환씨에 보낸 서신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 공동의장인 문동환 목사와 도널드 프레이저 당시 미니에폴리스 시장이 1980년 11월 24일 작성해 전두환씨에게 보낸 서신. 이 서신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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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 공동의장인 문동환 목사와 도널드 프레이저 당시 미니에폴리스 시장이 1980년 11월 24일 작성해 전두환씨에게 보낸 서신. 이 서신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 [최초공개] 문동환 목사 - 도널드 프레이저 미니에폴리스 시장이 전두환씨에 보낸 서신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 공동의장인 문동환 목사와 도널드 프레이저 당시 미니에폴리스 시장이 1980년 11월 24일 작성해 전두환씨에게 보낸 서신. 이 서신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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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24일

전두환 대통령께,

우리는 김대중과 그의 공동 피고들을 처벌하려는 당신의 확고한 결정에 대해서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민주주의 이상을 옹호하는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점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미래 대한민국의 비전으로 제시한 '민주적 복지국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치적 반대 세력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과 이성적 범위 내에서 받아들 수 있는 차이와 의견불일치는 진보, 조화, 안정을 위한 추동력이 되는 반면, 강압적인 침묵과 의견일치는 언제나 침체, 부패, 불안정을 초래합니다.

한국의 주요 언론사에서 1980년 초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 국민들은 민주화를 위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한 예로 동아일보 조사를 보면 72.8%의 국민들은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서 경제적 번영보다 민주화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들 중에서 89.5%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이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밝혔습니다.

김대중과 그의 공동 피고인들은 서로 다른 관점과 이상이 경청되고, 교환되고, 이해되는 민주주의적 환경의 형성을 위해 오랫동안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관용, 중용, 정의, 자유를 옹호함으로써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과정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갈망해왔을 뿐, 그것을 지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투옥은 한국 국민들과 한국 정부 사이를 멀어지게 할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한국의 안정과 한미관계의 미래에 좋지 않은 징조이며, 이는 정권교체기에 있는 현재 미국 정부와 차기 미국 정부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민주적이고 불안정한 한국은 도덕적 경제적 군사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부담이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한국 국민들의 뚜렷한 소망과, 평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그들의 열망에 대해 진정어린 경의를 표하며, 대통령께서 김대중과 그의 공동 피고인들을 조건 없이 석방해 주실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공동의장 도널드 프레이저
공동의장 문동환
  
이와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김대중은 1981년 1월 23일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직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7개월 동안 투옥하다가 1982년 12월에 미국으로 강제출국당해 2차 미국 망명활동을 전개하게 됐다.

2차 미국 망명 당시 김대중은 문동환과 함께 한국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펼쳤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83년 6월 초 뉴욕에서 열린 김영삼 단식투쟁에 대한 지지 활동이었다. 당시 김대중과 문동환은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과 한국의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함께했다.
 
1983년 6월 김대중-문동환이 미국 현지에서 김영삼 단식을 지지하는 활동을 함께하는 모습.
 1983년 6월 김대중-문동환이 미국 현지에서 김영삼 단식을 지지하는 활동을 함께하는 모습.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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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9일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문동환 목사와 함께 작성한 합의서.
▲ [최초공개] 김대중-문동환 합의서 1983년 9월 9일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문동환 목사와 함께 작성한 합의서.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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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문동환-김대중, 민주화와 평화통일의 한 길

이처럼 김대중과 문동환은 1976년부터 민주화 투쟁의 동지로서 중요한 활동을 함께했다. 특히 1983년, 1984년 김대중의 미국 망명 기간 도중 두 사람은 함께 투쟁하면서 전보다 더욱 긴밀한 관계가 됐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문동환의 평민당 참여가 이뤄진 것이다.

그동안 문동환의 형인 문익환과 김대중의 각별한 관계 및 인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동환-김대중의 관계는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동환-김대중의 관계는 문익환-김대중의 관계와 독자적인 측면에서 이뤄진 측면이 크다.

그렇게 보면 문익환-문동환-김대중 3명의 지도자는 한국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에 있어 매우 큰 업적을 남겼다. 그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후대 사람들이 지키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작성한 장신기씨는 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그:#문동환, #김대중,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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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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