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남한 생활에 적응을 못한 것 같다. 요즘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나면 펑펑 눈물이 흐른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악몽처럼 느껴진다."

박용기(56·가명·충남 아산시 외암로) 씨는 올해로 12년째 남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8살에 입대해 장교까지 됐다. 또 북한 최고 엘리트 집안의 수재들만 갈 수 있는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교사를 만나 결혼했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뜻밖의 비극이 닥쳤다. 정치범으로 긴급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박씨는 보석으로 풀려나자마자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탈북 당시 4명이 함께 강을 건넜는데, 그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인생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파란만장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18살에 군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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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기씨 부부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얻어 근로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또 둘이 악착같이 모은 돈 6000만원 중 병원비와 약값으로 4000만원을 소진하고, 나머지 2000만원은 사기를 당해 수중에 단 한 푼도 남지 않았다.
ⓒ 충남시사 이정구	관련사진보기

박씨는 북한 함흥시 흥남구의 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온종일 어울려 놀고,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즐거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종일 바닷가에서 뛰어놀다 지쳐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허기진 아들을 위해 맛있는 지짐이와 만두를 만들어 주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셨던 지짐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풍족하던 시절이었다.

박씨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국전쟁 때 포로로 북한에 온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북한 함흥에 정착했다. 납북된 아버지의 신분은 박씨의 출세길에 늘 걸림돌이었다.

그런데도 박씨는 운동 실력이 매우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대장 역할을 독차지했다. 특히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청소년기 방황하는 날이 많아지자 어머니는 그를 자원입대 하도록 권유했다. 

18살 되던 해 군인의 길을 택했고, 장교를 양성하는 군사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몸담았던 군사대학은 북한에서 김일성 대학에 이어 두 번째로 실력을 인정받는 곳이다. 군사대학을 졸업한 그는 남한의 해병대와 비슷한 항공육전대 중대장으로 편입돼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그는 태권도 8단에, 격투기를 두루 섭렵한 전투 요원이 됐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그는 지금도 무도 관련 책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조예가 깊다.

행복한 결혼도 잠시... 찾아온 불행

27살 되던 해, 박씨는 친구들 소개로 5살 연하의 한 여성을 만났다. 북한에서 최고 엘리트 과정인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첫 만남에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박씨는 포기하지 않고 간곡한 구애를 했고,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부부의 가정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사랑의 결실로 예쁜 딸까지 얻었다. 시간이 갈수록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이들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신의주 출장을 다녀온 친구는 남한에서 제작한 영화 CD를 가져왔다. 내용도 모른 채 박씨의 아내와 딸 그리고 그 친구가 함께 CD를 재생했다. 바로 그때 남한의 기무사에 해당하는 보위성 요원 5명이 들이닥쳤다. 

박씨는 정치범으로 분류돼 구타와 조사를 당했다. 교원이었던 아내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전도유망했던 박씨의 나이 고작 44살, 대대장 계급도 한순간에 박탈당했다. 

북한에 있는 지인에 따르면,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린 아내는 큰 충격으로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고 있다. 15살이던 딸은 정치범 부모를 둔 낙인이 찍혀 27살이 된 지금까지 생존 위협을 받고 있다.

당시 아내의 부친은 평양시 당 간부로 높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CD 관람 사건 이후 좌천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박씨 부부와 연루된 집 안팎 구성원들 모두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남한 CD를 함께 관람했던 친구는 여전히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중이다.

남한생활 적응 중 마주한 시련

북한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박씨는 탈북을 결심했다. 중국 연변으로 탈북을 주선해 주는 알선책에게 300만 원을 주기로 약속하고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했다. 박씨를 포함해 남성 2명, 여성 2명 등 총 4명이 두만강을 건넜지만, 여성 1명이 북한 측에서 쏜 총을 맞고 사망했다.

중국 연변에 도착한 박씨는 한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내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6살 연상의 여성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 둘은 한국에 정착하며 부부의 연을 새롭게 맺었다.

박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정착지원금 720만 원을 받았다. 이 중 탈북을 도왔던 알선책에게 애초 약속했던 300만 원과 추가 비용 100만 원을 지급했다. 수중에 남은 돈은 320만 원, 그 돈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 새롭게 정착한 부부는 밤낮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박씨는 생활비를 쪼개 한 달에 20~30만 원씩 북한에 남기고 온 아내와 딸에게 보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자 6000만 원의 목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발생한 심장·폐 질환이 심해졌고, 그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했다. 게다가 2015년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무릎연골과 척추를 심하게 다치면서 발목, 종아리, 무릎 수술을 받아야 했다. 또 달팽이관 이상으로 평형감각에 이상이 발생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시련은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그의 아내에게도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어지럼증을 호소해온 아내는 심혈관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난치병 질환을 판정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류머티즘 관절염과 C형간염 판정까지 받았다. 

순식간에 사라진 6000만 원...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들어

박씨 부부는 어느 순간 큰 병을 얻어 근로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또 제법 큰 돈이라 생각했던 6000만 원도 순식간에 소진해 버렸다. 몇 차례 수술과 약값으로 조금씩 지출하던 돈은 어느새 4000만 원에 이르렀다. 수중에 남은 돈은 2000여만 원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나, 지인이 이자를 두둑하게 주겠다며 빌려 갔다. 그러나 박씨 부부는 이마저도 사기를 당했다. 돈을 가져간 지인이 연락 두절되고 만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박씨 부부는 현재 기초생활 수급비로 살아가고 있다. 둘의 기초생활수급비는 70만 원 남짓. 그러나 두 부부가 한 달간 지출해야 하는 병원비와 약값만 30만 원이 넘는다. 게다가 임대료와 관리비 14만 원, 가스요금 2만 원, 교통비 20만 원, 통신요금 5만 원, 생활비 13만 원 등 최소 90만 원을 가져야 한 달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낯선 이방인인 이 부부가 돈을 마련할 곳은 전혀 없다. 근로 소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지 못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북한의 두 모녀를 돕기는커녕 자신의 몸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최근 진행된 '북미정상회담'을 지켜보며 박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남쪽 영화 한 편 봤다고 온 가족의 삶이 망가졌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북녘땅에서도 더 이상 나 같은 불행한 정치범 가족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남한에서든 북한에서든 가진 것은 건강한 몸 하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무너져 버렸다. 몸이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무슨 일이건 하면서 살고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며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