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른이 되면> 포스터

영화 <어른이 되면> 포스터 ⓒ (주)시네마달

 
"만약 누군가 13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너는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서 외딴 산꼭대기 건물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평생을 살아야해."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을 만든 장혜영(이하 혜영) 감독이, 당시 13살이었던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이하 혜정)에게 닥쳤던 상황을 그려낸 말이다. 상상해 본다. 인적조차 없는 낯선 곳에 떨어진 13살의 나를. 곧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눈물이 쏟아진다. 혜정은 사는 내내 삼켰을 설움일 것이다. 뭔가 억울하고 죄인 같았을 18년.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의 시간들. 혜영은 발달장애 동생 혜정을 더 이상 시설에 두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제 이 자매 앞엔 어떤 시간들이 놓일까.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 
 
 영화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영화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시설에서 나온 혜정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것.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이다. 하지만 시설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겐 빼앗긴 하루다. 동생을 감옥 같은 시설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다시 사회에 복귀시켜야 하는 혜영은 분주하다.

동생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병원 진료도 받아야 하고, 18년간 시키는 대로만 사느라 잠재워둔 동생의 욕구를 탐색해 보도록 도와주고도 싶다. 또 동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소속시켜 줄 공동체도 찾고 싶다. 그런데 막상 혜영은 막막하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폐 동생에게 '나는 네 언니고 믿어도 돼'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떨어져 살았던 18년을 시간 여행자처럼 훌쩍 뛰어 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부터의 과정은 어찌 보면 혜정이 아니라 혜영의 분투기일지도 모른다.
 
혜정을 장애인 야학인 '노들'에 참여시켜 본다. 노들은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의 장을 열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단체다. 장애인 탈시설 운동 단체인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에도 문을 두드려 본다. 같은 처지의 장애를 가진 분들이 모여 배움을 이루는 곳이지만 혜정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낯설다. 혜영은 혜정을 장애인 공동체뿐 아니라 자기의 지인과 친구들에게도 무람없이 소개하며 사회 속에 개입시킨다. 딴청을 피우고 혼잣말을 하고 아직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치 못하지만 혜정은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간다.
 
혜영은 "자신의 선택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로 격리되어 오랜 시간을 살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살아남아 다시 돌아와 사회에 적응해가는 동생"을 자랑스러워 하며, 환경재단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에 선정된 상의 몫을 동생에게 돌린다.

파티처럼 이루어지는 시상식의 축하 공연이 이어지자 흥이 난 혜정은 제대로 기분을 내본다. 무대 위로 올라 맘껏 춤사위를 펼친다. 표정이 압권이다. 음악에 흠뻑 젖은 혜정의 얼굴은 마치 신들린 연주자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혜정은 자유로이 춤을 춘다. 비장애인이 이 정도로 감정의 농도가 짙은 퍼포먼스를 펼치려면, 적어도 프로 춤꾼이거나 알코올의 힘에 기대고서야 눌렸던 끼를 발산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음악에 취해 저토록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다면, 저 몰입은 평범한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재능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혜정의 남다름은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능력'인 것이다.
 
할리우드 히어로물에 종종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능력이 너무 뛰어난 이유로 장애인이 된다.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한 그들의 '초월성'에 대한 시기와 두려움이었으면서, '돌연변이'라 호명하여 '위험한 것들'로 낙인찍는다. 무엇이든 표준을 넘어서면 (그 표준은 지배하려는 자의 편리에 맞게 만들어졌으면서)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다르게 굴지 말고 똑같아지라는 말이다. 말을 잘 들어야만, 사회나 국가의 요구에 순응해야만 성원권을 주겠다는 으름장이다.
 
 영화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영화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활동 보조 등급을 심사하는 단 20분의 인터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단 20분의 심사로 한 달 94시간의 활동보조를 배당받은 자매는 왜 94시간이 주어졌는지 설명 받지 못했다. 94시간을 30일로 나누면 하루 3시간 정도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혜정을 면담한 보조인들에겐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혜정은 혼자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일도 혼자 할 수 있게 교육하지 않은 시설에서 18년을 산 혜정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기는 일은 어렵다. 그 구분을 위해 혜정은 오랜 시간 학습해야 한다.

그러기에 혜정에게 활동보조 서비스는 매우 절실한 도움이다. 그런데 고작 하루 3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나머지는 오롯이 언니 혜영이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된다. 그즈음 혜영은 자기 나이에 혜정을 낳고 막막했을 엄마를 자주 생각해 본다. 그때 엄마에게 혜정을 돌봐줄 보조인이 있었다면, 도움을 청할 친구나 지인이 있었다면, 엄마는 동생을 시설에 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닿는다. 가족이 장애인이면 다른 가족은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나라면 기꺼이 그럴 수 있을까?
 
탈시설 장애인의 고군분투를 기록한 서중원의 책 <나, 함께 산다>를 보면, 장애인들은 시설에 있었던 자신을 '정물화'에 빗댄다. '보호'라는 명분 아래 진행되는 시설의 시스템은 '탈 인간화'를 막을 수 없다. 시설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배우고 먹고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통제 당한다. 이들은 탈 시설을 하고서야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 볼 수 있었지만, 그 욕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도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 시설한 장애인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힘들지만 절대 시설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국에선 당연하게 여겨지는 장애인 시설이 다른 나라에서도 그럴까? 스웨덴의 경우는 아예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인간도 그 의지에 반해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진 후, 모든 장애인 시설을 없앴다. 장애인을 모두 사회로 돌려보내고 장애인의 필요에 따라 활동보조를 제한 없이 이용하게 만들었다.

스웨덴에선 장애인을 자주 볼 수 있다. 장애인을 가두지 않고 사회에 복귀시켰고, 사회로 돌아간 그들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으로 대처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장애인을 보기 어렵다. 장애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더 부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장애인은 시설에서도 집에서도 갇혀 있다.
 
장애인들은 탈시설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한다. 그럼에도 장애인이 독립해 홀로 살아가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당신이 나간 것이니 탈시설에 알아서 적응하라는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탈시설에 맞춰 나가야 한다.(건물 진입로의 휠체어 경사로,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화 등) 이들 모두 사회의 구성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갖은 노력으로 힘겹게 탈시설을 한 장애인들에게 가장 목마른 것은 배움과 관계이며, 가장 아쉬운 것은 활동보조 서비스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먹는 것, 씻는 것, 배우는 것, 밖에 나가는 것 모두 활동보조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혜정의 경우처럼 독립주거가 어려운 경우, 그룹 홈 방식으로 모여 살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도 한다. 혜정의 경우 언니인 혜영의 결단으로 탈시설할 수 있었지만, 장애인들의 탈시설에 대부분의 가족들은 반대한다. 감당해야 할 자신의 삶이 벅차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을 이기적인 가족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구도 그렇게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내 삶의 대부분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가족인 혜영 앞에 닥친 난관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 걸까?
 
장애는 누구의 책임인가?
  
 영화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영화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장애의 어려움을 오직 가족에게만 귀속시키는 것이 사회나 국가의 책무일까? 천재지변이 생기면 다들 한 마음으로 돕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들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떤가? 누가, 무엇이 장애를 발생시켰는가? 장애도 재난처럼 불가항력으로 닥친다. 그렇다면 이 또한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천재지변이 국가 재난으로 인식되어 공동의 노력을 요구하듯이, 장애 또한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혜영은 혜정의 독립에 도움 준 모든 분들을 초대해 작은 파티를 연다. 파티에서 혜정은 그동안 갈고 닦은 노래 솜씨를 뽐내 본다. 시상식 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독보적인 무아지경에 빠져,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를 부른다. 무르익는 즐거움 속에 문득 슬픔이 스며든다. 30살이 넘은 혜정은 이미 어른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에게 장애라는 낙인을 찍어 '어른'으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거부당한 혜정에게는, 늙으면 누구나 되는 할머니가 되는 일이 당연히 오는 미래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어른이 되면>이 장애인 동생을 돌본 비장애인 언니의 성장기로 비칠까 우려된다. 혜영의 노력을 가족의 당연한 헌신으로 상정한다면, 혜영이 혼자 짊어져야 하는 개인의 성장서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를 극복한 닉부이치치와 그의 다리가 되어 평생 곁을 지킨 그의 아버지의 헌신을 더 이상 찬미해서는 안 된다. 모든 장애인이 닉부이치치가 될 수 없고 모든 장애인 가족이 닉부이치치의 아버지가 되서는 안 된다. 이들의 서사가 아름답다고 계속 믿는 한, 사회나 국가는 제 할 일을 개인에게 미룰 것이기 때문이다.
 
혜영이 장애인 동생 혜정과 사는 일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접어야 하는 포기의 역사로 남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혜영의 헌신을 찬미하는 대신,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내 삶이 소중한 것처럼, 장애인과 그 가족도 소중한 삶을 포기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는 국가에 이렇게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국가는 장애를 구별 짓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장애인의 활동보조 서비스를 적극 확대하라. 장애에 등급을 매긴 수당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두에게 평등한 기본소득을 지급하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어른이 되면 장혜영 감독 탈 시설 운동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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