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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생가 텃밭에 활짝 핀 광대나물 꽃. 찬찬히 보면 꽃의 생김새가 입술을 닮았다.
 용아생가 텃밭에 활짝 핀 광대나물 꽃. 찬찬히 보면 꽃의 생김새가 입술을 닮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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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산수유, 동백에 이어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피면서 남도의 '꽃봄'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나무뿐 아니다. 남도의 꽃봄은 땅에서도 화사함을 뽐내고 있다. 봄까치, 광대나물, 노루귀, 냉이 꽃이 지천으로 앙증맞게 피었다.

그 중에서도 광대나물은 꽃이 입술을 닮았다고 '순형화(脣形花)', 코딱지가 붙어있는 것 같다고 '코딱지나물'로도 불린다. 꽃을 찬찬히 살펴보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벌어진 것처럼 생겼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처럼 손을 모은 듯한 모양새이기도 하다. 
 
장독대와 어우러진 용아생가. 지난 3월 17일 풍경이다.
 장독대와 어우러진 용아생가. 지난 3월 17일 풍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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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오른쪽)과 영랑 김윤식. 일본 유학시절 만난 두 사람은 평생 시심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 걸려 있다.
 용아 박용철(오른쪽)과 영랑 김윤식. 일본 유학시절 만난 두 사람은 평생 시심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 걸려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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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극이나 인형극, 줄타기, 판소리를 하는 직업 예능인을 통틀어 '광대'라 부른다. 우리 문학계의 광대에 빗댈만한 인물이 용아 박용철(1904~1938)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였다. 외국의 시와 희곡을 번역해 소개하면서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김윤식과 정지용의 시집을 자비로 내주기도 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용아 박용철은 큰 족적에 비해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떠나가는 배'가 그의 시다. 1980년대 중반에 김수철이 부른 '봄이 오는 캠퍼스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편지를 쓰네…'로 시작되는 '나도야 간다'가 이 시에서 차용됐다.

노래 '나도야 간다'는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주연의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곡이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영랑 김윤식과 둘도 없는 절친으로, 1930년에 '시문학파'를 결성하고 동인지를 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시문학' 동인 창립 기념사진. 뒷줄 가운데가 용아 박용철이다. 강진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된 사진이다.
 "시문학" 동인 창립 기념사진. 뒷줄 가운데가 용아 박용철이다. 강진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된 사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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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시비. 용아생가에 세워져 있다.
 용아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시비. 용아생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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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는다./ 압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의 전문이다. 그의 나이 26살 때인 1930년에 김영랑과 함께 발간한 〈시문학〉 창간호에 발표됐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젊은이가 겪어야 했던 갈등,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는 유랑민의 처지를 떠나가는 배로 표현했다. 비장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의식이 밑바탕에 깔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문학 제1호 표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 주도해 펴냈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시문학 제1호 표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 주도해 펴냈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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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 제3호 표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 주도해 펴낸 책이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시문학 제3호 표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 주도해 펴낸 책이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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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은 1904년 광주 송정에서 요즘말로 '금수저'로 태어났다. 부잣집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산수를 잘 했고, 사자소학을 익히면서 천재로 불렸다. 집안의 큰 기대를 안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학생의 신분으로 일제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 평생지기인 영랑 김윤식을 만났다.

용아는 다시 서울로 가서 김영랑, 정지용과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했다.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했다. 문예잡지인 〈문예월간〉 〈문학〉도 펴냈다. 이 잡지를 통해 외국의 시와 희곡도 번역해 소개했다. 1935년엔 자비로 정지용과 김영랑의 시집을 내주기도 했지만, 요절했다. 35살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용철 시인의 생가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다. 금호타이어 공장 건너편, 흙담장에 둘러싸인 넓은 초가이다. 장독대 옆 동백꽃과 어우러진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초가의 주춧돌과 나무기둥도 용아가 살던 당시, 옛것 그대로다. 광주시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떠나가는 배' 시비도 세워져 있다. 담장 밖에는 광대나물이 치천인 텃밭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시내에 도로 '용아로'도 있다. 광주경찰청에서 광주여자대학교를 거쳐 첨단산업단지를 잇는 도로다. 박용철 시인의 호를 따서 붙였다. 역사 인물의 호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주의 도로명 30여 개 가운데, 시인의 호가 붙은 유일한 도로다.
  
동백꽃과 어우러진 용아생가. 동백나무 한 그루에서 흰꽃과 빨강꽃이 한데 피어 있다.
 동백꽃과 어우러진 용아생가. 동백나무 한 그루에서 흰꽃과 빨강꽃이 한데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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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생가의 안채와 사랑채. 용아생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자리하고 있다.
 용아생가의 안채와 사랑채. 용아생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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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의 선조 박상(1474~1530)도 있다. 눌재 박상은 호남선비를 말할 때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송강 정철보다 한 세대 앞선다. 호남성리학의 스승으로, 사림의 영수로 불렸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해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박상은 옛날 광주에서 위세를 떨친 기, 고, 박씨 가운데 하나인 충주박씨로, 용아의 16대 할아버지이다. 광주 남구 송학초등학교에서 서창 한옥마을을 지나는 도로인 '눌재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눌재 박상을 배향하고 있는 송호영당 전경. 용아생가 바로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눌재 박상을 배향하고 있는 송호영당 전경. 용아생가 바로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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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의 영정. 송호영당에 모셔져 있다.
 눌재 박상의 영정. 송호영당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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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은 1474년 지금의 서창 사동마을에서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환경은 순탄치 않았다.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0년 뒤엔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맏형을 잃었다. 이후 부인과 세 자식까지 차례로 떠나보냈다. 그럼에도 성품을 반듯하게 다졌고, 급제를 해 벼슬길에 나갔다.

30여 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소신대로, 강직하게 대의를 지켰다.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훈구파와 왕의 인척들을 거세게 비판했다. 채홍사(採紅使)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었다. 채홍사는 연산군 때(1505년) 미녀를 찾으려고 지방에 파견한 관리를 일컫는다. 실적이 좋은 채홍사한테는 조정에서 토지와 노비를 내려줬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사라진 벼슬이다.

박상이 지금의 감찰반 격인, 암행어사와 비슷한 일을 하던 전라도 도사로 부임했을 때 얘기다. 나주에 사는 천민 우부리의 딸이 채홍사의 눈에 띄어 연산군의 애첩이 됐다. 하루아침에 연산군의 장인이 된 우부리의 횡포가 극심했다. 박상이 우부리를 잡아다가 벌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때려 죽여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연산군이 노발대발, 박상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다. 박상도 제 발로 임금한테 가겠다며 한양으로 떠났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길이 엇갈렸다. 그 사이에 중종반정(1506년)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됐다. 박상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박상은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이 숙청된 1519년 기묘사화 때도, 모친상으로 한양을 떠나 있어 화를 면했다.
  
연방죽과 어우러지는 만귀정. 흥성장씨 장창우가 풍류를 즐기려고 지은 누정이다.
 연방죽과 어우러지는 만귀정. 흥성장씨 장창우가 풍류를 즐기려고 지은 누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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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을 배향하고 있는 포충사의 옛 사당.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냈다.
 제봉 고경명을 배향하고 있는 포충사의 옛 사당.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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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을 모신 사당도 있다. 송호영당(松湖影堂)이다. 용아생가와 위아래로 있다. 송호영당이 윗집, 용아생가가 아랫집으로 나란히 있다. 송호영당에 눌재 박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황, 이이, 기대승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의 조카 사암 박순의 영정도 함께 있다. 〈눌재집〉과 〈사암문집〉도 목판으로 보관돼 있다.

용아생가와 송호영당 주변에 가볼만한 데도 있다. 강변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송산유원지가 가깝다. 서창으로 가면 한옥마을이 있다. 흥성장씨 장창우가 풍류를 즐기려고 지은, 연방죽과 어우러지는 만귀정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삽봉 김세근을 모신 학산사, 제봉 고경명을 배향하고 있는 포충사도 멀지 않다. 영산강과 어우러지는 누정 호가정은 동곡에 있다.
  
영산강과 어우러지는 누정 호가정. 조선 명종 때 유사가 세운 정자다.
 영산강과 어우러지는 누정 호가정. 조선 명종 때 유사가 세운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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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용아생가, #송호영당, #시문학파, #눌재 박상, #용아 박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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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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