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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계엄사무소 앞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 박정희와 장도영 5.16 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계엄사무소 앞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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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5ㆍ16군사쿠데타는 고려 정중부ㆍ최충헌 일당의 무단통치 이래 최초의 무인지배체제였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인 5ㆍ16군사쿠데타는 4월 민주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 8개월 만인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발생했다.

5ㆍ16은 군정 3년과 유신에 이어 그 아류 전두환ㆍ노태우의 제5,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장장 31년에 걸친 군사통치의 시발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육군 소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예비역 육군 중령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이 동원된 반란군은 이날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입성에 성공했다.

서울로 진격한 반란군은 중앙청 및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새벽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항의 이른바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 명의의 포고령을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힘으로써 쿠데타는 일단 정권 찬탈에 성공했다. 혁명공약 6항에서는 '원대복귀'를 약속했지만, 쿠데타 주역들은 번의를 거듭한 끝에 민정에 참여하여, 스스로 공약을 짓밟았다. 대국민 속임수였다. 

쿠데타 주동자들이 처음으로 거사를 모의한 것은 60년 9월 10일 김종필을 비롯한 영관급 장교 9명이 서울 충무장에서 모임을 갖고 군의 정풍운동을 시도하는 한편 쿠데타를 결의하게 되며, 같은 해 11월 9일에는 신당동 박정희 소장 집에서 다시 회합, 쿠데타 거사를 논의했다.

이들은 61년 4월까지 쿠데타 조직 및 거사계획을 완성하고, 4월 19일을 택일했으나 좌절됐고, 다시 5월 12일로 예정했으나 역시 실패, 그리하여 16일에 거사한 것이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강제진압의 의사를 밝혔으나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라고 군사 쿠데타를 인정, 반란군에 승복하면서 매그루더 장군의 쿠데타 저지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쿠데타는 기정사실화되었다. 

한편 수녀원에 피신해 있던 장면 총리는 18일 은신처에서 나와 국무회의를 열고 내각총사퇴와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이양을 의결했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결정을 그대로 재가했다. 같은 날 미국무성도 한국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자가 반공친미적임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하여 쿠데타는 기정사실화되었다. 

한때 미국무성은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이유로 원주의 제2군사령부를 동원하여 진압을 구상했으나 군통수권자인 윤보선과 장면의 '투항'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쿠데타의 원죄가 박정희와 김종필이었다면, 동조 또는 방조자는 윤보선과 장면이었다. 전시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의 책임도 못지 않았다.
  
1961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 외무 김홍일,내무 한신, 재무 백선진 등을 임명하는 등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1961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 외무 김홍일,내무 한신, 재무 백선진 등을 임명하는 등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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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장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 부의장은 쿠데타의 실질적 주도자인 박정희를 선임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포고령 제1호를 통해 옥내외 집회금지, 전국 대학의 휴교령, 국외여행 불허, 언론 사전검열, 야간통행금지 시간연장 등을 발표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반란군은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여 최고권력기구로서의 법적 뒷받침을 마련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권ㆍ행정권의 전부와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산하에 법제ㆍ사법ㆍ내무ㆍ 외무ㆍ국방ㆍ재정ㆍ경제ㆍ교통ㆍ체신ㆍ문교ㆍ사회ㆍ운영ㆍ기획 등 1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한데 이어 직속기관으로 중앙정보부ㆍ재건국민운동본부ㆍ수도방위사령부ㆍ감사원을 두어 본격적인 군정을 실시했다.

또한 산하기구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통해 용공분자의 색출을 표방하며 구정권 인사들과 혁신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한편, 각급 정당과 사회단체ㆍ언론매체ㆍ노동조합을 강제해산시키는 등 민주세력에 대한 폭압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반란군은 5월 20일 장도영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이주일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최영규 준장을 소장으로 하는 혁명재판소와 박창암 대령을 부장으로 하는 혁명검찰부를 설치하여, 자유당ㆍ민주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5ㆍ16쿠데타 전후의 이른바 반혁명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군정은 3ㆍ15부정선거와 관련 최인규, 발포책임자 곽영주, 정치깡패 이정재 등을 사형하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반국가죄로 처형한 반면에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독점재벌 등 부정축재자들을 경제건설에 적극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거의 사면조처했다. 

쿠데타 세력 사이에는 정권 장악이 확실해지면서 내부의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5ㆍ16쿠데타를 방관 동조자였던 장도영을 몰아내고 실권자인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박정희 세력은 7월 3일 장도영과 쿠데타의 주동자이였던 육사 5기 출신의 박치옥ㆍ문재준 등이 반혁명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고, 김종필 계열의 육사8기 출신들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군정기간에 적발된 이른바 반혁명사건이 13건에 달했고, 최고회의에 참여하였던 최고위원 장성들의 상당수가 여러 가지 혐의로 제거되어 63년 2월 최고회의에는 발족 당시 32명의 위원 가운데 6명만 남을 정도의 치열한 숙청이 단행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정치정화법을 제정하여 민간정치인들을 일부는 거세하고 일부는 포섭하는 등 '분열시켜 통치'하는 전략을 펴면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화폐개혁과 통화증발 등의 경제조치를 단행했다. 

5ㆍ16은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반헌법의 악폐를 한국현대사에 남기게 되었으며, 그 선례는 이후 군부야심가들에게 권력욕의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쿠데타를 주동한 박정희는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업보통학교 훈도(교사)로 재임 중 39년 일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쓰고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장교로 들어갔다. 우수자로 뽑혀 42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되고 44년 일본육사 57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일본 관동군에 배속되고 이어 만주국군 제8단의 소대장으로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공격 작전에 참가하는 등 일본군 장교로 활약했다. 팔로군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참여하여 항일전을 벌인 중국 부대다.
  
일본 육사 졸업 뒤의 박정희.
 일본 육사 졸업 뒤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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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패망으로 무장해제 당한 박정희는 46년 5월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이해 조선경비사관학교 3개월 단기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되고, 재학당시 형 박상희가 대구 10ㆍ1사건으로 경찰에 살해 당하면서 남로당의 군 내부 책임자가 되었다.

47년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 소대장을 지내고, 48년 제주 4ㆍ3사건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발탁되어 근무 중 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만군ㆍ일군 출신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을 면한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49년 형집행정지와 함께 군에서 파면되었으나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 중 6·25전쟁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49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제5사단장과 제6관구사령관을 거쳐 60년 1월부터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임하고, 장면 정부에서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2월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친일인명사전> 요약)

민주국가에서 군사쿠데타는 국헌을 유린한 반란행위다.

더욱이 일본군 장교 출신들의 쿠데타는 헌정사 이전에 민족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반역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 5개월 10일 동안의 집권기간에 군정 940일, 계엄령 3회, 위수령 4회, 대학휴교령 5차례, 국가비상사태 1회, 긴급조치 9회 등 폭압통치로 일관했다.

그의 집권기간은 이승만보다 6년이 길고,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 3대의 합계 15년보다 3년 반이 더 많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정희쿠데타, #이승만, #이명박, #박근혜, #5.16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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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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